은막 뒤에서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테렌스 맬릭에게 동료들과의 우정은 절실하다. 맬릭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침묵할 때 그들은 맬릭의 세계를 지지하고, 대변해주는 사람들이다. 여기 소개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 제작자 사라 그린은 그중 가장 중요한 맬릭의 식구들이다. 그들이 맬릭의 화폭에 인간의 얼굴과 풍경과 집과 나비를 그려 넣는 방식을 알고 나면 맬릭에 대한 궁금증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구체적 공간에 관념이 뿌리내리도록…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
1970년대 초,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잭 피스크는 시대극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테렌스 맬릭도 1950년대 연쇄살인마 찰리 스타크웨더에 관한 영화(<황무지>)를 준비 중이었다. 소식을 들은 피스크는 흥분에 겨워 혼자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이 그에 관한 소문을 맬릭에게 전했고, 결국 피스크가 <황무지>의 미술을 맡게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피스크는 맬릭의 모든 작품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책임지며 맬릭의 종교적, 철학적 관념이 구체적 공간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는 맬릭이 원하는 초자연적 풍경을 찾아 광범위한 로케이션 답사를 감행하고, 맬릭의 인물들에 걸맞은 세트를 창조하고자 끈질기게 캐릭터들을 연구한다. 특히 세트를 미완성의 조각품으로 여기는 피스크는 맬릭이 ‘액션!’을 외치기 전까지 세트에서 불필요한 디테일들을 덜어낸다. 훌륭한 세트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이야기와 정서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피스크를 신뢰하는 맬릭은 그에게 무한한 창의적 자유를 허락한다. 아마 그것이 피스크가 맬릭의 현장에 오래, 기쁘게 머무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즐겁게 카오스 속을 헤엄치다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
매번 새로운 촬영감독과 작업했던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처음으로 에마뉘엘 루베츠키와 두번 연속 손잡았다. 만약 <체>(Che)가 제때 투자를 받았더라면 이번이 세 번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체>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맬릭에게 제안한 체 게바라 전기영화였다. 하지만 제작 중단 등의 소동을 거치며 결국 소더버그가 감독으로 확정되었고, 맬릭과 루베츠키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 ‘다음’이 <뉴 월드>였다. 한 작품 만에 맬릭의 이상적인 파트너로 자리잡은 루베츠키는 내러티브나 대사보다 이미지로 말하겠다는 맬릭의 신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맬릭은 보다 ‘순수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카메라와 인물의 동선을 짰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 그 카오스 속에서 ‘진짜’ 순간을 발견해낸다고 한다. 그런 맬릭과 함께 루베츠키는 온종일 카오스 속을 헤매길 즐긴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감정이나 기억이 자연발생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루베츠키는 비주얼적인 감각이 뛰어난 촬영감독”이라는 맬릭과 “맬릭은 순수하게 영화적인 감독”이라는 루베츠키의 결합은 앞으로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
필생의 역작을 알아보는 눈
제작자 사라 그린
신비주의 감독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가 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리수상자는 제작자 사라 그린이었다. <뉴 월드>부터 함께해온 그린은 맬릭의 대변인 역할을 즐기진 않지만 충실히 다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2002년이었다. 맬릭이 그린에게 70년대에 썼던 시나리오를 내밀며 “이제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고, 그린은 맬릭에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요”라고 화답했다. 그렇게 <뉴 월드>에 착수하기가 무섭게 맬릭은 그녀에게 또 다른 작품을 내밀었다. <트리 오브 라이프>였다. 물리치지 않고 시나리오를 읽은 그린은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이 맬릭의 필생의 역작이 되리라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뉴 월드>의 후반작업을 하면서는 두 시나리오를 합쳐 한편의 영화로 완성시킬까 고민하기도 했다. 맬릭을 철학자이자 영화감독으로서 존경하는 그린은 그가 아무리 고비용의, 과작의 작가라 해도 괘념치 않는다. 그녀는 우직하게 그가 오래 꾸준히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아마 그녀와 함께하다 보면 맬릭은 이제까지보다 빠른 속도로 필모그래피를 늘려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