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간들이 형벌처럼 안고 사는 절망감 그린다”
2011-11-08
글 : 이영진
사진 : 백종헌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인터뷰

<돼지의 왕>이 본격적인 프로덕션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다. 올해 5월에 편집본 작업이 끝났으니, 1년이 채 걸리지 않아 장편애니메이션이 뚝딱 나왔다. 1억5천만원이라는 저예산 제작비를 갖고서 불가능한 계획를 완수했다고 박수치진 말자. 2009년에도, 2008년에도, 2007년에도, 2006년에도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기어이 <돼지의 왕>을 완성하고 싶었던 몇 가지 이유.

-2006년부터 본격적인 구상을 시작했다. 실질적인 제작기간은 짧았지만 완성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단편 잘 만들면 장편으로 쉽게 데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만든 <지옥: 두개의 삶>(이하 <지옥>)은 반향이 컸다. <사랑은 단백질>은 단편이지만 제작비가 <돼지의 왕>보다 많은 2억원이었다. <지옥>을 끝내고 <돼지의 왕>에 바로 착수하지 못했지만 <사랑은 단백질>은 제대로 된 프로덕션 아래서 배우고 준비하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여전히 힘들었다. 애니메이션은 안되나. 장편은 못 만들고 끝나나. 이제 소설을 써야 하나. 만화를 그려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제작비 마련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자 관건이었을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쪽에서는 초반에 거절했다. 그 뒤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데 정말 돈에 환장하게 되더라. 2008년쯤이었나. 경상도쪽에 어마어마한 돈이 묻혀 있다는 첩보를 술자리에서 입수하고 무작정 KTX 타고 내려간 적도 있다. 한 대학으로부터 4억원까지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해 말에 해당 대학 총장이 비리에 연루되면서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이듬해엔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다시 지원했는데 예선통과도 못했다.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 있다는 루머 때문에 명망있는 교수님이 프로듀서를 맡아 대신 지원했는데도 안되더라.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실사영화로 만들어볼 생각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내 입장에선 가릴 게 없었다. 실제로 한 영화사와 작업을 하기도 했다. 결국 무산됐지만. 그 뒤 그 회사 대표님이 아예 다른 이야기를 써보자고 제안해서 함께 시나리오 개발작업을 했다. 그때 대표님이 계약금으로 700만원을 내주셨는데 이걸 받을까 말까 하던 차에 <지옥>이 프랑스에 팔렸고 목돈이 들어왔다. 1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벌었다. 일단 대표님께는 영화가 만들어지면 시나리오 개발비 받겠다고 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때도 <돼지의 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컴퓨터 2대 놓고 시나리오가 안 풀리면 <돼지의 왕> 작업을 했다. 지난해 여름에 (프로듀서인 조)영각이 형을 만나 KT&G 상상마당의 지원을 받은 건 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군대 시절에 쓴 <1991년 우리들의 영웅, 철이>라는 시놉시스가 바탕이 됐다고 들었다. 왜 하필 1991년이었나.
=그때는 아주 짧은 단상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이 영웅이 아니었다는 정도. 9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싶었던 건 그때가 내가 중학생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앞서 90년대부터 시작된 상실의 감정을 다루고 싶어서였다. 가끔 어떤 분들이 영화 보고서 90년대 그림체라고 하시는데 그건 의도한 바다. 사실 구상할 때 모티브로 삼았던 노래가 있다. 정태춘의 <1992년 장마, 종로에서>. 수많은 깃발이 사라진 뒤의 허무가 담겨 있다. 그에 앞서 80년대는 목적의식이 분명히 존재하던 때였다. 보이는 거대 권력을 부수면 됐다. 그런데 권력을 끌어내린 뒤 90년대가 시작됐지만 변한 것은 많지 않았다. 실체는 민주 대 독재의 문제가 아니었고, 기득권과 또 다른 기득권의 다툼이었다.

-교실은 계급사회로서의 현실을 빗대는 주요 공간 중 하나다. 규율과 상하관계로 얽힌 군대나 직장 역시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유년 시절의 폭력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아닌가.
=내가 글을 쓰고 (최)규석이가 그린 인권만화 <창>에 군대 시절 경험이 녹아 있다. 군대에서 난 이 체제를 유지해야만 누구나 공평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철책 근무하는 부대 성격상 제대할 무렵에야 이등병이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막내가 병장 계급장 달고 침상을 닦았다. 나 역시 그런 상황에서 밑의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캐릭터였다. 제대 한달 전까지 열외하지 않고 구보 인솔하고 군가 똑바로 안 부른다고 윽박지르고 그랬다. 그런데 고문관인 이등병이 들어오면서 내 생각에 에러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하려는 그 친구에게 폭력이 가해졌고, 얼마 뒤 그 이등병은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돼지의 왕>에 대한 시놉시스도 그 무렵 썼다.

-철이라는 인물은 실제 모델이 있나. 구성 단계에서 줄거리와 캐릭터가 조금은 변형됐을 텐데.
=만든 캐릭터다. 규석이도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서 자기 학창 시절을 쉽사리 떠올리진 못하더라. 우화로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이 철이처럼 그런 분노의 감정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잘 나오진 않지만 철이라는 인물을 한때 부잣집 아이였던 설정으로 바꾸었다. 그 지위를 박탈당하자 분노를 갖게 되는 인물로 말이다. 종석과 경민 역시 가난한 아이들로 한데 묶기보다 그 그룹 안에서도 서로 구별되는 인물로 만들었다.

-강민 패거리는 무조건 악행부터 저지르는 치들은 아니다. 경민과 종석을 괴롭히기에 앞서 나름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든다.
=전에 애니메이션 평론하시는 분이 강민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다. 전형적인 주인공 이름을 가져다 썼다면서 새롭다고. 그런데 요즘 기득권 세대들 보면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고 말도 나긋나긋하게 하지 않나. 이전 기득권 세대들은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징글맞게 싸웠던 사람들이라 얼굴에 악함이 새겨져 있다. 반면 그 아래 2세대, 3세대들은 오랜 기득권의 성 안에서 예쁜 것만 보고 자랐으니 다르다. 그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웃으면서 때린다.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대립 구도로만 짜여졌다면 <돼지의 왕>은 아주 단순한 회고담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돼지의 왕>의 진짜 대립은 힘없는 돼지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종석과 경민은 같은 인물을 둘로 분리해 다른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마지막 대목을 반전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두명의 캐릭터가 존재해야 했다. 그래야 같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금하게 만들 것 같았다. 에피소드를 만들거나 새 캐릭터를 등장시킬 때 종석과 경민이 하나이되 둘이고, 둘이되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배치하려고 애썼다.

-과거와 현실을 한데 얽는 구성을 고려할 때 <미스틱 리버>를 많이 참조했다고 말한 적 있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대중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초반은 <드래곤 볼>의 구성을 따르려고 했다. <드래곤 볼> 보면 쓰러진 상대가 항상 내가 왕인 줄 알지만 난 버러지에 불과해, 나보다 더 센 애가 있어 그러잖나. 액션물, 학원폭력물의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따르다가 어느 지점부터 그것들을 다른 식으로 비틀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미스틱 리버>가 떠올랐다. 스릴러로 끌고 가서 전혀 다른 식으로 끝을 맺는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중간에 드러나지만 핵심적인 이야기가 뒤이어서 펼쳐지는 구성이다. <미스틱 리버>를 보면서 저렇게 이야기를 짤 수도 있구나 싶었고, 거기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경민이 갑작스럽게 종석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할 때의 마음은 무엇인가. 마지막 장면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는 감정인데.
=목소리 연기를 한 (오)정세씨와도 그 이야기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복수의 감정이라고 본다. 경민이 종석에게 끊임없이 묻는 질문을 기억하나. 결국 종석은 답변하지 않는데 뒤이은 경민의 선택 역시 그에 대한 복수였다고 본다.

-현실에서 경민과 종석이 나누는 대화는 최소화되어 있다.
=편집의 산물이다. (웃음) 편집하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국 한 호흡으로 쭉 끌고 가는 것이 맞다고 결론냈다. 그래서 30분을 걷어냈는데 그 과정에서 고깃집 대화가 많이 빠져나갔다.

-선/악, 영웅/군중, 권력/폭력 등에 대한 주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지옥>을 보지 않은 관객이라고 할지라도 <돼지의 왕>에서 감독의 관심을 쉽게 알아차릴 것 같다.
=규석이도 <돼지의 왕> 시나리오 보고 ‘<지옥> 극장판이군’ 하더라. 등장하지 않는 신, 보이지 않는 체제 그 아래서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인간들이 형벌처럼 안고 사는 압박감, 절망감들을 앞으로도 그리고 싶다.

-차기작 <사이비>는 어떤 이야기인가.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다. 곧 수몰될 마을이 배경인데 그 마을에 사이비 교회가 들어오면서 진실을 말하는 악한과 거짓을 말하는 선인이 대립한다는 이야기다. <돼지의 왕> 제작이 미뤄지면서 썼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작업 중이다. 최악의 엔딩을 준비 중이니 기대해도 좋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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