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저평가된 수작, 비서구권 걸작 총망라
2011-11-2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의 전당이 선장한 영화사 걸작 100편 중 놓치면 후회할 정전 10편

영화의 전당 시네마 운영팀이 선정한 영화사 100편의 걸작선이 여기 있다. 100편의 목록에는 1902년의 <달세계여행>에서 1997년 <영화사>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정전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독특한 점이 있다. 거장의 작품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수작 혹은 비서구권의 걸작들이 여기엔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것은 기존의 영화사 100편이 아니다. 능동적인 ‘대안의 영화사 100편’의 명단이다. 그중에서도 연대별로 10편을 추렸다. 이 작품들의 국내 상영이 드물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뒤바리 부인> Madame DuBarry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 | 1919년 | 85분 | 35mm | 흑백 | 독일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에른스트 루비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흥행작. 이 작품으로 루비치는 “비극의 마스터”, “영화의 라인하르트”, “유럽의 그리피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의 정부로 유명했던 마담 뒤바리, 그녀의 영광과 몰락의 일생을 다루는 영화다. 루비치는 흔히 로맨틱코미디의 절대적 일인자 혹은 모던한 소극의 달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마담 뒤바리>를 보면 저 유명한 ‘루비치 터치’가 유장한 ‘에픽’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라스트신은 가히 충격적이다.

<모아나> Moana

감독 로버트 J. 플래허티 | 1926년 | 95분 | 35mm | 흑백 | 미국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북극의 나누크>로 명성을 얻은 다큐멘터리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사모아 섬을 찾는다. 하지만 지상낙원에 가까운 이곳은 소문으로만 듣던 거대한 바다 괴물도 없고 생존을 위해 자연과 사투를 벌이던 ‘나누크’도 없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지나가다 떨어지는 야자열매에 우연히 머리를 얻어맞지 않는 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잭 C. 앨리스). 그러자 플래허티는 ‘모아나’라는 청년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몇주간의 축제 혹은 통과의례를 중심으로 놓고 이 섬의 여러 풍속을 기록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심심한 인류학적 보고서가 아니다. 플래허티 다큐의 태도인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의 영화의 특징인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빛을 발한다.

<마지막 밤> The Last Night

감독 유리 라이즈만 | 1937년 | 98분 | 35mm | 흑백 | 소련 | 15세 관람가
무성영화 시기인 1927년에 데뷔하여 1980년대 말까지 영화 경력을 멈추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러시아 영화감독, 그러나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유리 라이즈만. 왜일까? “아마도 정치적 격변기를 용케 다 빠져나온 그를 서방 비평가들은 스탈린 체제에 동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라이즈만의 영화들은 회고할만한 가치를 지닌 진정한 인간들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반영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비다 존슨) <마지막 밤>은 말 그대로 1917년 10월 혁명의 마지막 밤의 민중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라이즈만은 극작가 예브게니 가브릴로비치와의 협력하에 이 영화를 완성해냈으며, 이후 40여년 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가장 러시아적인 역사영화”라고 평가받고 있다.

<도망자> The Fugitive

감독 존 포드 | 1947년 | 104분 | 16mm | 흑백 | 멕시코, 미국 | 15세 관람가
존 포드가 독립제작 방식으로 만든 첫 번째 영화. 발표 당시에는 실패작으로 간주되었다. 제작 과정상의 불화로 존 포드의 오랜 동료였던 각본가 더들리 니콜스와 소원한 관계에 이르는 계기가 됐으며, 흥행도 신통치 않았다. 신앙을 갖는 것이 불법인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에서 한 신부(헨리 폰다)가 당국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고 있다. 그는 원주민 여인의 도움을 받아 이 마을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향하게 되는데, 도중에 배신자에게 속아 체포된다. “어떤 포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주관적(태그 갤러거)”이라는 평처럼 지금은 가장 개인적인 존 포드 영화로 통한다. 신학적 딜레마라는 주제 면에서 로셀리니의 <유로파51>,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와 비교되기도 한다. 존 포드는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취하기를 원했던 지점에 가장 가까이 간 작품 세편을 꼽은 적이 있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 <웨건 마스터>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작품 <도망자>다.

<아카딘씨> Mr. Arkadin

감독 오슨 웰스 | 1955년 | 93분 | 35mm | 흑백 |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 15세 관람가
<제3의 사나이>에서 오슨 웰스가 연기했던 인물 해리 라임. 그를 주인공으로 한 라디오극 <해리 라임의 일생>. <아카딘씨>는 이 라디오극 시리즈에서 단초를 얻어 시작됐다.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거부 아카딘(오슨 웰스)은 젊은 청년 스트래튼을 고용하여 자신의 과거에 관한 조사를 부탁한다. 하지만 아카딘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 죽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른바 ‘조사 내러티브’라고 부를 만한 오슨 웰스의 창의적 이야기 방식은 이미 <시민 케인>으로 유명해졌는데, <아카딘씨> 역시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또 다른 수작이다.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

감독 몬티 헬만 | 1965년 | 82분 | 35mm | 컬러 | 미국 | 15세 관람가
<바람 속의 질주>는 몬티 헬만 영화 중에서도 <복수의 총성>과 함께 그를 대표하는 걸작 서부극이다. 잭 니콜슨이 프로듀서를 겸하고 각본과 연기에도 참여한 이 영화는 기껏해야 마차를 터는 것에 불과한 세명의 카우보이들이 한 무리의 지독한 살인범들과 우연히 하룻밤 섞이게 되고, 그로써 보안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내용이다. 몬티 헬만은 한마디로 이 영화의 주제를 말해야 한다면 “결합하게 된 죄”일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엉뚱한 계기로 살인자들과 ‘결합한’ 세 주인공들의 상황을 모호하며 무력하고 그러면서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운 긴장감으로 묘사해낸다. 영화의 중간부터 보는 듯한 느낌으로 불현듯 시작하여 예측 불허의 긴장감으로 시종일관 진행되다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느낌으로 끝나는 영화.

<카사노바> Casanova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 1976년 | 155분 | 35mm | 컬러 | 이탈리아, 미국 | 청소년 관람불가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카사노바가 프랑스어로 쓴 자신의 자서전 <나의 기억>을 환상영화의 대가 페데리코 펠리니가 연출한 영화다. 펠리니 영화의 미학적 핵심 중 하나라고 할 만한 허세와 퇴폐의 감각적 장식들이 총합된 것으로 <사티리콘>과 <카사노바>를 들 수 있는데, <사티리콘>이 신화로부터 저 깊은 음험함을 끌어내고 있다면 <카사노바>는 한 예술가의 인생에서 저 깊은 쾌와 불쾌를 끌어낸다. 거대한 세트에서 촬영된 영화는 고전적 세트 영화가 안겨 줄 수 있는 어떤 최고치의 시각적 향락을 제공하며 동시에 한 인간의 혹은 한 예술가의 생에 관한 처연한 아름다움 또한 그려낸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장면, 마네킹을 끌어안은 채 춤을 추고 있는 카사노바, 그리고 주름이 깊이 팬 카사노바의 얼굴 클로즈업은 영화 사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수람 요새의 전설> The Legend of Suram Fortress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도도 아바시드제 | 1986년 | 88분 | 35mm | 컬러 | 소련 | 15세 관람가
그루지야의 민족성을 지나치게 드러낸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로부터 탄압받았지만 결국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를 전세계적으로 알린 영화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도 그루지야의 예술적 전통 아래 만들어졌다. 파라자노프의 후기 걸작에 속하는 <수람 요새의 전설>은 1969년 <석류의 빛깔>을 마지막으로 오랜 휴지기 끝에 내놓은 그의 복귀작이다. 내용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수람 요새가 마침내 한 젊은이의 존귀한 희생으로 굳건해진다는 것이다. 정치적 함의로도 읽는 것이 가능한 영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파라자노프의 미학적 독창성, 가령 기묘한 앵글과 동작과 색채들의 향연이다. 비범하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이미지와 사운드가 펼쳐진다.

<잠들 수 없어> I Can’t Sleep

감독 클레어 드니 | 1994년 | 110분 | 35mm | 컬러 | 프랑스. 독일 | 15세 관람가
어쩌면 클레어 드니는 영화에서의 ‘존 쿳시’(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소설가)가 이미 되었는지도 모른다. 드니의 가장 최근 영화 <백인의 것>의 주인공을 두고 “마치 존 쿳시의 소설에서 온 것 같아 보였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여주인공 이자벨 위페르였다. 이산민들 혹은 국외자들 혹은 그 모든 주변인들에 관한 드니의 관심은 직설적인 옹호나 명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녀의 인물들은 종종 세상의 흐름 앞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자기들만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답이 아니라 질문을 떠안고 살아간다. <잠들 수 없어>는 파리의 흑인 청년이 홀로 사는 노인들만을 골라 살해한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건 동기일 뿐, 이 영화에는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여행 온 젊은 여인의 이야기 등이 서로 비스듬히 섞여 있다.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 속에서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시선 속에서 삶의 유연함과 유동성을 표현해내는 드니의 역량이 놀라운 작품이다.

<정오의 이상한 물체> Mysterious Object at Noon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 2000년 | 83분 | 35mm | 흑백 | 타이, 네덜란드 | 15세 관람가
처음에는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감독은 타이 전역을 돌면서 사람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채집한다. 앞사람이 멈춘 이야기의 끝을 이어 뒷사람이 새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부추기고 감독 자신은 그걸 시나리오 삼아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하나의 집단 구술에 의한 창작이며 상상적 공동체의 서사이고 다큐와 극의 오고감이며 그로써 21세기에 출현한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첫 발걸음이다. 타이를 넘어 신세기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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