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당신이 ‘최초’의 주인공
2011-11-22
글 : 송경원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10편의 영화들

자, 여기는 실력파 시네필을 위한 자리다. 당신이 이번 상영작 중 정전도 모두 섭렵했고 그 대안적 목록까지 눈여겨보았으며 영화계의 친구들이 소개하는 작품과 초장편의 대작들까지 다 보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건 여기 소개된 ‘국내 최초 상영작들’이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 운영팀에 따르면 이번 개관 기념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국내 최초 상영작은 25편이나 된다.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상영회를 한번 더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름과 제목으로만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영화들! 10편을 골랐다.

<버라이어티> Variety

감독 앙드레 뒤퐁 | 1925년 | 72분 | 35mm | 흑백 | 독일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앙드레 뒤퐁의 명작 <버라이어티>는 다양한 장르영화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는 샘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버라이어티’하다. 서커스 공중곡예사들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스펙터클한 공중그네 장면은 물론 인물 개개인의 기발하고 심도있는 심리묘사까지 두루 포섭한다. 20년대 독일영화의 정점에 이른 미학적,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내면의 시각화를 위해 다양한 앵글과 주관적 시점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창의를 선보인다. 물론 이같은 상이한 요소들을 매끄럽게 이어나가는 근본에는 탄탄하고 정교한 편집의 힘이 있다.

<여행으로의 초대> Invitation to a Journey

감독 제르맹 뒬락 | 1927년 | 38분 | 35mm | 컬러 | 프랑스 | 15세 관람가 | 무성영화
‘순수영화’와 ‘시각적 조화’의 어머니인 제르맹 뒬락은 20년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한명이자 예술로서의 영화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녀는 영화가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새겨넣은 것임을 증명했다. 보들레르의 시 <여행으로의 초대>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여러 시각적 요소와 움직임이 조화된 한편의 영상시에 다름 아니다. 무료한 중산층 여성이 여행을 꿈꾸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다의 이중노출, 분할화면 등을 통해 서정적 추상을 구체적 이미지로 재현해나간다. 그렇게 영화는 예술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에 의해 예술답게 만들어졌다.

<Little Rural Riding Hood>

<텍스 에이버리 애니메이션> Tex Avery’s Animation(총 6편)
<Dump-Hounded>(1943), <Who Killed Who?>(1943), <Swing Shift Cinderella>(1945) <King-Size Canary>(1947), <Bad Luck Blackie>(1949), <Little Rural Riding Hood> (1949)

감독 텍스 에이버리 | 1943~ 49년 | 44분 | 컬러 | 미국 | 전체 관람가
텍스 에이버리는 규범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고 그래서 규범이 되었다. 세상만사 귀찮은 듯한 드루피 독, 멍청하고 음흉한 늑대, 늘 당하고 살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검은 고양이 등 그가 창조한 수많은 캐릭터들은 언제나 틀에서 벗어나 엄숙함을 조롱해왔다. 디즈니의 전통 애니메이션과 달리 과장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세계는 일견 과격해 보이지만 그 자유스러움이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답게 만드는 활력을 부여한다. 이번에 공개된 6편의 작품은 40년대 워너브러더스의 토대를 마련했던 그가 MGM으로 옮긴 뒤 선보인 대표작들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최초의 섹시스타 ‘레드’를 탄생시킨 <늑대와 신데렐라>(원제 ‘Red Hot Riding Hood’)는 MGM 단편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이며 수많은 패러디의 원천이 되었다.

<마리아 칸델라리아> Portrait of Maria

감독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 1944년 | 94분 | 35mm | 흑백 | 멕시코 | 15세 관람가
40년대 멕시코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거장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 마리아 칸델라리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만 그녀를 돕는 유일한 존재인 로렌조가 있어 슬프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로렌조는 병에 걸린 마리아를 구하기 위해 약을 훔치다 감옥에 갇히고 마리아는 로렌조를 구하기 위해 화가의 모델로 일한다. 화가의 끈질긴 누드모델 제의를 거절했음에도 오해는 거듭되고 그녀를 향한 세상의 비난은 그치지 않는다. 멕시코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낸 아름다운 화면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멕시코의 전설적 촬영기사 피게로아 마테로스와 페르난데스 감독이 함께한 2번째 영화로 46년 칸영화제 최우수촬영상을 받았다.

<아이언 게이트> The Iron Gate

감독 유세프 샤힌 | 1958년 | 77분 | 35mm | 흑백 | 이집트 | 15세 관람가
이집트의 국민감독으로 추앙받는 유세프 샤힌 감독의 대표작이자 아랍영화의 영원한 고전. 대표적인 3세계 감독 중 한명인 샤힌 감독의 영화는 ‘이집트’ 그 자체다. 40여편에 이르는 장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애정과 보수적인 이집트사회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아이언 게이트> 역시 카이로의 중앙역을 배경으로 해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네오리얼리즘적인 방식으로 가감없이 담아낸다. 소설가 나기브 마푸즈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특유의 휴머니즘적 시선이 심어놓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불합리로 점철된 이집트사회 내부의 파열음을 놓치지 않는다.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샤힌 감독이 직접 출연한다.

<흑인소녀> Black Girl

감독 우스만 셈벤 | 1966년 | 65분 | 35mm | 흑백, 컬러 | 프랑스, 세네갈 | 15세 관람가
작가이자 세네갈 문학운동의 선구자이며 아프리카영화의 아버지, 우스만 셈벤 감독을 지칭하는 말들은 한마디로 하자면 ‘투사’다. 글을 모르는 민중을 위해 영화를 선택했던 그에게 영화란 민중의 힘을 지지하는 혁명가의 무기인 동시에 아프리카의 혼과 자존심을 지키는 방패였다. 프랑스로 이주한 세네갈 출신 소녀의 비극적인 삶과 프랑스 지식인들의 허위를 그려낸 <흑인소녀>가 충격적인 까닭은 최초이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허구와 불합리를 비판하는 내용은 서구 영화적 전통과는 다른 형식으로 필름에 새겨졌다. 어딘지 낯설고 투박하지만 영화 전반에 감도는 은은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

<나는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다> I Even Met Happy Gypsies

감독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 | 1967년 | 94분 | 35mm | 컬러 | 유고슬라비아 | 15세 관람가
1960년 전세계에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던 그 시기, 유고슬라비아에도 ‘검은 물결’의 파도가 쳤다.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기성 영화에 반기를 들며 일어났던 ‘검은 물결’의 선봉장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가 집시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시골버스를 타고 있던 집시와 신혼부부,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도난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골자지만 그보다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매혹적인 집시음악과 이방인으로 매도당했던 그들의 신비로운 문화에 더 눈길이 간다. 집시들에 대한 감독의 절절한 애정과 함께 목가적인 영상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법자 조시 웨일즈> The Outlaw Josey Wales(2010 디지털 복원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1976년 | 135분 | D-cinema | 컬러 | 미국 | 15세 관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60년대에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얼굴이었고, 70년대에는 돈 시겔의 <더티 해리>가 낳은 마초 스타였으며, 80년대 이후부터는 서부극이 사라져버린 황야를 애도하는 마지막 카우보이다. 모던 웨스턴의 걸작 <무법자 조시 웨일즈>는 그런 이스트우드의 그리움과 이상이 묻어나는 한편, 다음 행보로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북부군에 가족을 잃은 조시는 남부군 잔당에 합류하여 북부군에 대항하지만 다시 한번 배신당하고 인디언 마을에 숨어든다. 전통 서부극에서 악역을 담당하던 인디언에 대해 이해의 변주를 시도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장르영화에 충실하면서도 지극히 ‘이스트우드적’인 영화가 여기서 출발한다.

<비올란타> Violanta

감독 다니엘 슈미트 | 1978년 | 95분 | 35mm | 컬러 | 스위스 | 15세 관람가
알랭 레네, 장 뤽 고다르 등 문제의식으로 충만한 스위스 출신 감독들 중에서도 특히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독을 고르자면 단연 다니엘 슈미트를 꼽을 수 있다. 오페라 연출가이기도 한 다니엘 슈미트는 독특한 상상력과 거리낌없는 형식의 파괴를 통해 특유의 불투명하고 아름다운 미학을 창조해냈다. 이탈리아 국경의 계곡 마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드라마 <비올란타>는 그 정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마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과부 비올란타를 둘러싼 비밀이 근친상간, 자살, 살인, 유령 등 기이한 소재들과 결합하며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흩어진다. 그럼에도 착실하게 미학적 극단에 도달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성실한 영화다.

<전염병 개> The Plague Dogs

감독 마틴 로즌 | 1982년 | 103분 | Digibeta | 컬러 | 미국, 영국 | 전체 관람가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실험동물의 탈출을 통해 인간의 비이성적인 잔혹성을 풍자한 애니메이션이다. 영국 정부의 동물실험 연구소에서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비인도적인 두뇌 실험을 반복하는데 그 와중에 연구소를 탈출한 두 마리 개 ‘스니터’와 ‘로우프’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숲에서 방황하던 개들은 여우 ‘토드’의 도움으로 야생에 적응해나가지만 그것도 잠시, 탈출한 개들이 전염병을 옮겨 양들이 죽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간들의 잔혹한 사냥이 시작된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개들과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무자비한 사람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우화와 상징으로 해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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