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엉덩이의 아픔까지 달래줄 거야
2011-11-2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상영시간 200분 이상의 초장편영화 5편

이번 영화제의 목록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인간의 조건> <영화사>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천국의 문> <십계> <아라비아의 로렌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등 장르와 감독을 넘나드는 상영시간 200분 이상의 초장편영화가 13편이나 된다. 게다가 모두 영화사의 진귀한 걸작들이다. 용기있는 프로그래밍이고, 우리에겐 그만큼이나 흔치 않은 기회다. 그중에서도 대표작 다섯편을 골랐다.

<뱀파이어>

무성영화 시기의 대작부터 말하는 게 좋겠다. 이 <뱀파이어>는 칼 드레이어가 아니라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다. 정확히 말하면 뱀파이어가 아니라 뱀파이어라는 이름의 갱단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영화다. 일찍이 알랭 레네와 조르주 프랑주는 푀이야드에게 “환상적 사실주의의 선구자”라는 칭송을 바쳤다. 푀이야드는 초현실주의 그룹과 미학적으로 공유하는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도 담아냈다. 한편으로 그는 알렉산더 뒤마와 같은 전통적 대중문화의 창작자로 분류되었으며 그 자신 또한 “영화는 대중의 욕망으로 가득 찬 오락이어야 하며, 대중이 나의 주인”이라고 선언했다. <뱀파이어>는 10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푀이야드는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그리피스식 편집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한편, 무엇보다 역동적인 서사 구조와 우아한 동작과 동선들 그리고 기기묘묘한 숏과 프레임의 운용으로 대작 범죄영화를 만들어냈다.

<히틀러>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라면 대중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대신 “이미지와 사운드의 감각적 즉시성으로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재신화화”가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그 신념으로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그의 역사영화가 히틀러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로 이뤄진 거대한 역사 콜라주 <히틀러>다. 독일영화의 마라톤맨 알렉산더 클루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지버베르크가 꼽히는데, 그의 <히틀러>는 무대 위의 연극성을 전면에 세운다. 과장되고 저속하게 풍자하되 동시에 전위예술에 가까운 행위들로 개념을 실어나른다. 다만 몇명의 배우들과 무대장치와 소도구들과 영상 자료들로 지버베르크는 전대미문의 장엄한 장광설이자 마술쇼이며 에세이이자 역사적 푸닥거리를 완성해낸다. <루드비히 동정왕을 위한 진혼곡>(19세기 바이에른의 국왕에 관한 영화), <카를 마이>(19세기 말에 활동한 독일의 대중 작가에 관한 영화)와 함께 독일 3부작이라 불린다. 수잔 손택은 이 영화를 두고 “충성의 맹서를 요구하는 고귀한 명작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란 지버베르크의 방식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대서사시 <1900년>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영화의 대가로 말해지고 있으나 실은 졸작도 많이 양산한 베르톨루치이지만 <1900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00년이라는 같은 해에 지주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격변의 수십년을 친구로서 혹은 적으로서 살아가는 두 주인공(혹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 이야기는,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와 감독의 유려한 연출과 그 결과 얻어지는 세월의 무게를 담아내는 인간사의 흔적들이 쓸쓸하면서도 웅장하다.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도취적 대서사시다.

<멜랑콜리아>

나머지 두편은 근래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영화들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성”이라고 말한 헝가리의 감독 벨라 타르, 그의 영원히 남을 대표작이 <사탄탱고>다. 공산주의 몰락의 시기에 헝가리의 한 집단농장 마을을 감싸고 있는 황폐함과 불안과 불신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벨라 타르의 염세주의로 가득 그려진다. 동세대 영화형식주의의 최전선인 이 영화는 악마적이면서도 메시아적인 분위기로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할 정도다. 21세기에 출현한 대표적인 초장편 걸작은 라브 디아즈의 <멜랑콜리아>다. 실패한 혁명 전사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을 잊지 못하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조건들을 질문하고 견딘다. 라브 디아즈는 단순한 정치적 주장 대신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끌어안는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영화를 선사한다. 강성한 정치적 의도가 시적이고 음악적인 형식과 조우하여 하나의 기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영화다.

이 다섯편의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2057분을 극장 안에서 보내게 된다. 그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 경험은 당신의 일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꿈결 같은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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