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연이어 체급을 올리는 권투선수의 도전기를 닮았다. <은행나무 침대>부터 <쉬리>를 거쳐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규모와 기술, 장르적 확장을 시도한 강제규의 영화들은 그때마다 한국영화 전체의 체급을 올렸다. 그리고 <마이웨이>는 강제규와 한국영화가 드디어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하는 프로젝트다. 280억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고의 제작비, 다국적 배우들의 참여와 해외 로케이션, 한국사에서 벗어나 2차대전이란 세계사의 격랑 속으로 뛰어든 이야기. 그의 전작들도 그러했지만 <마이웨이> 또한 한국영화계 전체로 볼 때, 한편의 개봉작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마이웨이>는 전설과 다름없는 실화를 소재로 품는다. 1930년대 후반, 한 조선인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독일로 향한 뒤, 노르망디 해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상상만으로도 고통과 울림으로 가득한 여정이다. 하지만 <마이웨이>는 그의 여정이 간직했을 법한 드라마를 직접적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핵심은 그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었던 또 다른 남자와의 갈등과 화해, 우정이다. 남북 대치 상황에 놓인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한국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진 형제의 비극을 그렸던 강제규 감독의 성정을 보아서는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전설 같은 실화와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
그리하여 <마이웨이>의 출발선 또한 두 남자의 만남이다. 1928년의 경성, 식민지의 고관대작을 할아버지로 둔 타츠오(오다기리 조)는 가족과 함께 경성으로 이주하면서 준식(장동건)을 만난다. 각각 경성과 동경에서 제일 빨리 달리기로 소문난 두 소년은 함께 달리며 성장한다. 그리고 10년 뒤, 두 남자는 올림픽 마라톤 대표를 뽑는 선발전에서 다시 맞붙는다. 준식은 타츠오를 이기고 1등을 거머쥐지만 일본 판정단의 꼼수에 말려 승리를 뺏긴다. 거짓 판정에 흥분한 준식과 그의 친구 종대(김인권), 그리고 여러 조선 남자들은 난동을 일으키고, 일본 법정은 폭동에 가담한 죄를 물어 그들을 전장에 내보낸다. 수많은 전투를 거쳐 몽골의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대치 중이던 준식 일행은 어느 날 군인으로 변신한 타츠오를 지휘관으로 맞이한다. 전장에서의 후퇴를 치욕으로 여기는 타츠오는 병사들을 자폭으로 내몰지만 결국 그의 부대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일본인과 조센진의 지위가 사라진 상황에서 타츠오와 준식의 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전쟁의 격랑은 이들을 서로의 적으로만 두지 않는다. 타츠오는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을 겪게 되면서 준식의 입장에 조금씩 다가간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형제처럼, <마이웨이>의 두 남자 또한 헤어진 연인이 뒤늦게 서로를 바라보는 멜로드라마의 구조에 놓여 있다. 타츠오는 준식을 증오하고, 그의 본심을 외면하지만 그럼에도 준식은 언제나 그를 품어안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증오보다는 연민이 앞서고, 적이든 내 편이든 일단 존중받아야 할 생명으로 대하며 맡은 자리를 성실히 지키는 그는 매우 건실한 영웅이다. 그리고 그런 준식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타츠오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고 그에게 감화된다. 거치디거친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피어난 기적의 만남으로 봐야 할 것이나, 사실 <마이웨이> 속 두 남자의 관계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형제에 비해 그리 큰 울림을 갖지 않는다. 단지 뜨거운 피를 나눈 형제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의 차이는 아닌 듯 보인다. 영화는 타츠오와 준식을 붙여놓을 뿐, 그들의 온도를 높일 만한 뚜렷한 계기를 마련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준식의 성격이 타츠오와의 관계를 형성해가기에는 너무나 수줍다. 올바르고 건실한 영웅인 그는 바꿔 말하면 별다른 의지를 갖지 않는 인물이다.
오히려 <마이웨이>의 드라마는 두 남자로 향하는 시선을 그들의 주변 인물로 확장할 때, 더 흥미롭다. 일본군과 조센진의 지배관계는 이들이 함께 소련의 포로가 되면서 무용지물이 돼버린다. 타츠오마저 소련군으로부터 사상교화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준식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뜻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된다, 심지어 준식의 친구인 종대가 포로들을 통제하는 완장을 차면서 권력관계마저 역전된다. 이때부터 펼쳐지는 갈등은 <마이웨이>에서 가장 응집력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김인권이 연기한 종대는 <마이웨이>에서 누구보다 강렬한 캐릭터일 것이다. 지독한 생존본능과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을 냉소적으로 드러내는 그는 아마도 실화 속 노르망디의 코리안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기구한 여정에서는 생존욕망으로 똘똘 뭉친 종대가 더욱 생생하고 눈길이 머무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진짜 목표
물론 <마이웨이>가 인물들의 갈등과 번민을 앞세워 부족한 스펙터클을 메우는 영화인 건 아니다. 영화 속의 2차대전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돌아갈 수 없게 만들고, 점점 노르망디를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거대한 바람이다. 준식과 타츠오를 전진시키는 전쟁의 스펙터클은 크기로만 보자면 확실히 <태극기 휘날리며>를 넘어섰다. 4번의 전쟁장면에서 자주 활용되는 건 무인헬기와 고공 크레인으로 촬영한 숏이다. 전장의 폭풍을 훑는 동시에 전장의 규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이 장면들은 영화의 스펙터클을 증폭시킨다. 전쟁터의 한복판에서도 기운은 뜨겁다. 인간과 탱크의 대결을 묘사하는 노몬한 전투는 탱크에 몸이 깔리고, 폭탄에 몸이 터지는 순간의 고통을 촉감으로 전한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마이웨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또한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시야로 규모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하는 체감도는 그리 높지 않다. 영화는 준식과 타츠오가 소련군에서 독일군으로 전향하는 과정을 ‘3년 후’라는 자막으로 대체한다. 그리고는 노르망디에서 그들의 군생활 중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한다. 영화의 흐름상 다소 붕 떠 있는 터라, 마지막 전투마저 구체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나 분위기상 준식과 타츠오의 마지막 챕터가 누군가의 상상, 혹은 꿈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이웨이>는 성취와 한계가 뚜렷한 영화다. 몸집은 헤비급일지 몰라도 펀치의 파워는 아직 미들급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마이웨이>가 지금의 한국영화가 끌어올린 최대의 체급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도전이 결국 또다시 강제규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의미심장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진짜 목표인 <마이웨이>는 이제 더 큰 게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과연 <마이웨이>는 한국영화의 차원이동에 기폭제가 될 것인가. 아직은 섣부른 도전으로 기록될 것인가. 혹은 다시 체급을 낮추는 반환점이 될 것인가. 마음 놓고 응원하기보다는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게 사실이다. 일단 공은 울렸다. 강제규와 한국영화가 다시 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