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마릴린 먼로가 우상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녀 스스로 마릴린 먼로와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두명의 삶을 풀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엮어놓았다는 점에서 오는 신비감이 클 것이다. 1946년 처음 그녀를 고용한 스튜디오 이십세기 폭스사는 먼로를 당시 최고의 섹스 심벌이었던 진 할로를 능가할 재목 이라 판단했고, 노마 진보다는 좀더 고상해 보이는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급조해 사용하게 했다. 두 이름이 충돌한 시기이자, 이후 그녀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 바로 두개의 삶이 시작된 시작점이기도 하다. 먼로에 관한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을 연출한 사이먼 커티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의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마릴린 먼로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노마 진의 삶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녀의 결혼, 사적인 일화들, 불행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마릴린 먼로라는 신화에 기여하고 있다.”
1942년 첫 번째 남편 짐 도허티와의 결혼. 노마 진이 마릴린 먼로로 본격적인 배우생활을 시작하면서 파경을 맞았다.
태어나는 순간 은수저 대신 불행을 물고 태어난 여자에 대해서 대중이 보여준 관용의 한도는 컸다. 정신분열로 입원한 어머니,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 남의 손에 키워진 아이에 관해서라면 누구라도 짠한 마음이 기본적으로 장착되는지도 모른다. 일례로 먼로가 대표작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를 찍기 직전이자, 막 성공가도에 오르려고 했던 때에 모델 활동을 하던 1949년 50달러를 받고 찍은 달력용 누드사진 스캔들이 불거져 나왔을 때, 그녀는 미리 잡혀 있던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취소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인터뷰를 감행했고 기자에게 ‘방세’ 운운하며 단돈 50달러의 절실함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노발대발했던 스튜디오와 반대로 대중은 누드 촬영이 그녀의 가난함과 불행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이 모든 걸 용인해주는 경지에 이른다. 누드사진 파문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경력을 망치기는커녕 지명도를 높였고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효과를 창출했다. 노마 진의 삶이 더 비극적일수록, 더 드라마틱할수록 그녀에게 관심이 더 쏠리게 될 거란 걸 안 건 누구보다도 먼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동정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조작해냈고, 그녀의 과도한 상상력이 불러온 이야기들은 결국 나중에 무엇이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 구별해내기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많은 전기 작가들이 반복해온 문제들. 그녀가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던 에피소드, 혹은 자신을 키워준 엄마의 친구가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라며 사뭇 냉담함을 보였다는 점에 대해선 모두가 거짓이라는 증언도 속속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왕자와 무희>(1957)를 연출한 로렌스 올리비에는 “마릴린 먼로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건 너무 달라서 더이상 달라지려야 달라질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마릴린 먼로와 노마 진을 오가는 이중적 생활이 불러온 갭은 결국 그녀의 삶을 초토화한다. 그녀가 대중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만큼 대중 역시 그녀에게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그걸 쏙쏙 체로 걸러내어 자기의 비극적 인생을 치장하는 재료로 사용했다. 스스로에게 감옥을 지어놓고는, 그게 먼로인지 노마 진인지 헷갈리게 만들었고 그걸 인기와 명성을 쌓는 데만 적극적으로 활용한 거다.
멍청한 금발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들
그녀는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도 비슷한 맥락에서의 이중성을 보여왔다. 금발 머리와 입가의 점, 빨간 입술, 반쯤 감은 눈,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서 잘록한 허리에 이르기까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한치 틈도 없이 재단된 옷, 그리고 (일부러 한쪽을 깎아서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드는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그녀의 하이힐이다. 먼로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같은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반대로 먼로는 끊임없이 이렇게 형성된 ‘금발의 멍청한 섹시녀’라는 이미지에서 도망치려고 노력했던 여자다.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에 대해 “만약 내가 멍청한 금발일 뿐이었다면, 그가 나와 결혼했겠냐”고 주장했고, 이미 그 결혼 자체가 자신이 가진 기존 이미지를 향한 시위와도 같아 보였다.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생애 마지막으로 가진 <라이프>와의 인터뷰에서 먼로는 “섹스 심벌이라고? 그런 생각이야말로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기자를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섹스 심벌이 된다는 건 그냥 물건이 된다는 말인데, 난 그게 싫다”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이들은 그녀가 멍청하게, 섹시하게 혹은 늘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고, 게다가 그걸 즐기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1954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자연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그녀의 커리어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보여지는 모습과 원하는 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그녀의 연기 경력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나이아가라>(1953)에서 섹시한 팜므파탈로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7년 만의 외출>(1955)에서 남성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대상’으로 자리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는 똑똑하고 아름다운 제인 러셀과는 정반대로 돈만 좋아하는 머릿속이 텅 빈 여성으로 그려졌다. 그녀의 작품을 관통해온 ‘모두 똑같으며, 성적 매력을 나타내는 금발 유형’에서, 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여성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먼로는 책을 사들이고 메소드 연기를 배우는 등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녀와 일한 많은 사람들은 먼로가 잦은 지각과 한줄의 대사를 47번이나 할 정도로 연기를 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으며,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비난도 가한다. 어쨌든 메소드의 옹호자 조수아 로건이 감독한 <버스 정류장>(1956)이나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강>(1954)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먼로가 기존 이미지를 뛰어넘어 내면을 보여준다는 연기평을 받은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어쩌면 연기적인 유일한 평가를 받은 작품은 그녀가 혐오했던 금발의 섹시 가수로 분한 <뜨거운 것이 좋아>(1959)였다. 빌리 와일더 감독은 먼로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의 초반, 그녀가 엉덩이를 흔들며 기차를 타기 위해 종종걸음치던 모습이나, 기차 안 여성 악단 사이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먼로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혹적인 섹시함을 연출하는 데 성공한다. 오늘날에도 그녀를 평가하는 가장 핫한 부분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마릴린 먼로라는 여배우가 보여준 연기력일 것이다. 본인의 태도를 떠나 그녀의 출연작들이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본능적인 연기로 스크린을 장악할 때나 혹은 메소드 연기를 시도할 때나 그녀의 연기를 종합해보면 분명 먼로는 꽤 연기를 잘하는 배우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