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인물을 끄집어내는 게 유행이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위대한 유산’의 이름을 동물영화 목록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래시 어디 갔어? 벤지 어디 갔어? 하고 부르면 눈썹을 휘날리며 그들이 달려올 것 같지 않은가.
동물배우, 그중에서도 연기견 하면 역시 래시와 벤지의 이름이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래시 컴 홈>(1943)으로 처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콜리종의 래시는 이후 영특하고 용감한 개의 표본이 되었다. 래시를 연기한 강아지의 이름은 팔이었는데, 팔은 <선 오브 래시>(1945), <용감한 래시>(1946) 등 1951년까지 MGM사가 제작한 6편의 래시 시리즈에 출연했다. 당시 래시의 인기는 <래시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제작될 정도로 대단했는데, 공연을 위해 출장을 갈 때면 호텔 특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다고 한다. 팔은 1958년에 사망했지만 이후 팔의 후손과 다른 콜리종의 개들이 영화와 TV시리즈에서 래시를 연기했다. <벤지>(1974)의 벤지는 래시와는 다른 매력으로 사랑받았다.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떠돌이개 벤지에게선 어딘가 인간적인 냄새가 났다. 벤지를 연기한 건 히긴스였는데, <벤지>를 찍을 당시 나이가 이미 사람 나이로 열여섯이었다. 히긴스는 <벤지>를 찍은 다음 해에 하늘나라로 떠났고, 히긴스의 딸인 벤진(훗날 아예 ‘벤지’로 개명)이 이후 시리즈에 출연하며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갔다. 조 캠프 감독은 2004년에 <벤지4: 돌아온 벤지>를 내놓으며 젊은 세대에 벤지의 존재를 다시금 알렸다. 그외에 관객의 눈물, 콧물을 쏙 빼놓은 <하치 이야기>(1987)의 충직한 하치, 산만 한 덩치를 하고선 하루종일 침을 질질 흘리던 <베토벤>(1992)의 베토벤도 잊지 못할 연기견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80년대와 90년대에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한 동물영화가 많이 만들어진 건 다 래시와 벤지 덕분이다.
강아지만큼 친숙하진 않지만 곰, 늑대개, 돌고래, 돼지도 연기가 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준 영화들이 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베어>(1988)는 엄마를 잃은 아기곰 두스와 상처 입은 수곰 바트의 진한 우정을 곰의 시선으로 그린 수작이다. 8년이라는 긴 제작기간에서 알 수 있듯 <베어>의 곰들은 연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그저 보여주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선보인다. 바트는 <가을의 전설>(1994), <디 엣지>(1997) 등에도 출연한 베테랑 곰 배우다. 잭 런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랜달 클레이저 감독의 <늑대 개>(1991)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늑대개 제드를 만날 수 있다. 알래스카 맬러뮤트와 늑대간의 이종교배로, 날 때부터 야성미를 몸에 두르고 태어난 제드는 <괴물>(1982), <머나먼 시애틀>(1985)에도 출연했다. 고래와 소년의 우정을 그린 <프리 윌리>(1993)의 범고래 ‘케이코’는 이슈를 몰고 다닌 스타였다. 영화의 감동을 현실에서도 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리 윌리> 개봉 뒤 동물보호단체들은 케이코를 영화에서처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케이코는 오랜 시간 바다를 떠나 있어 야생에서의 적응력을 상실했고, 훈련을 통해 야생 적응 능력을 회복한 뒤에야 고향 바다인 아이슬란드 인근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꼬마 돼지 베이브>(1995)는 돼지도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다. 양치기 돼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이 영화에서 베이브를 연기한 건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제작진은 돼지들의 성장속도를 감당할 수 없어 3주마다 새로운 돼지들로 바꿔 찍었다. 그리하여 총 47마리의 돼지가 베이브를 연기했고, 이들은 돼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밖에 동물배우들의 연기가 눈부셨던 국내 영화로는 국내 최초의 말 주연 영화 <각설탕>, 소 연기의 새로운 장을 연 <워낭소리>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개와 고양이를 내세운 옴니버스영화 <미안해, 고마워>, 속편까지 제작된 <마음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