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여전히 힘이 세군, 액션과 스릴러의 엔터테인먼트
2012-09-06
글 : 안현진 (LA 통신원)
토니 길로이 감독 제레미 레너 주연의 새로운 ‘본’ 시리즈 <본 레거시> 미리 보기

제이슨 본이 없는 ‘본’ 시리즈라니,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입장에서 4편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더그 라이먼 감독이 연출한 <본 아이덴티티>로부터 폴 그린그래스의 손을 거친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까지, 이 시리즈가 전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무려 9억4400만달러였다. 게다가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편들의 DVD 판매량까지 늘어나는 효자였으니, 감독과 주연배우가 떠났다는 이유로 손을 떼기에는 ‘본’ 프랜차이즈가 가진 수익성이 아까웠을 것이다. 한데, <본 얼티메이텀>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에서 떠난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은 서로 상대방 없이는 ‘본’ 시리즈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둘이서 <그린존>을 촬영했다(흥행은 참패였다). 데이먼과 그린그래스가 떠난 ‘본’ 시리즈는 한동안 할리우드 작가들의 손을 전전했다. 처음에는 맷 데이먼과 <컨트롤러>를 만든 조지 놀피 감독에게 펜이 주어졌고, 그다음은 리메이크 <로보캅>의 각본가인 조슈아 제투머였다. 스튜디오는 2010년을 잠정적인 4편의 개봉 시기로 정해놓았지만, 각본은 엎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돌아간 곳이 바로 시리즈 전체의 각본가이자 <마이클 클레이튼> <더블 스파이>를 연출한 토니 길로이의 손이었다. 토니 길로이는 제이슨 본이 떠난 ‘본’ 시리즈를 프리퀄이나 시퀄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시리즈를 이어갈 새로운 이야기를 고안해냈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지도, 새 얼굴을 데려와 제이슨 본이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본 레거시>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본’ 시리즈의 프리퀄도 아니고, 시퀄도 아니다. 시리즈와 시대를 같이하지만 섣불리 스핀오프라고 말하기도 주저된다. 등장인물이나 이야기가 ‘본’ 시리즈와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레거시>는 분명 ‘본’ 시리즈의 유산(레거시)이다.

<본 레거시>와 가장 긴밀하게 관련을 맺는 건 <본 얼티메이텀>이다. 영화는 <본 얼티메이텀>이 남겨놓은 파문에서 시작한다. 제이슨 본에 의해 블랙 브라이어와 트레드스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CIA는 곤경에 처하고, 이를 지켜보던 국방부는 은밀하게 수뇌부를 본부로 불러모은다. CIA의 트레드스톤과 유사한, ‘아웃컴’이라는 슈퍼솔저 프로그램이 국방부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웃컴은 약물을 통해 군인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은 억제하고, 체력은 최대화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실험이다. 미디어를 달구는 음모론에 덩달아 발등이 뜨거워진 아웃컴의 책임자 에릭 바이어(에드워드 노튼)는 작전을 은폐하기 위해서 아웃컴의 실험대상과 관련자를 모두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정기적으로 담당자를 만나오던 실험대상들은 투약물이 바뀐 걸 모른 채 약을 복용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예고편에서 소개됐던 서울 장면은 이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알래스카로 생존훈련을 떠났던 아웃컴 실험대상 5번 애론 크로스(제레미 레너)는 바이어가 쳐놓은 죽음의 덫을 처음에는 운 좋게, 나중에는 필사적으로 피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애론은 자신을 정기적으로 검진했던 과학자 마르타 셔링(레이첼 바이스)을 찾아가고, 마찬가지로 아웃컴의 관련자로서 목숨에 위협을 받은 셔링은 크로스와 동행하게 된다.

알래스카의 설산으로 둘러싸인 차가운 호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 뒤 마르타의 집이 있는 메릴랜드를 거쳐, 비밀리에 아웃컴을 위한 약품을 만들어온 제약회사의 공장이 있는 필리핀의 마닐라로 이동하며 액션을 펼친다. 2편과 3편의 인장이나 다름없었던 핸드헬드 촬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지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추격 신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본’ 시리즈에서 제이슨 본의 매력은,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병기로서의 기술을 몸으로 구현할 때의 아이러니와 자신에 대해 무지한 유약한 면 때문에 최대화되었다면, <본 레거시>의 애론은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냉철한 스파이지만, 조직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모른 채 도망치면서도 살고자 하기에 연민을 자아낸다. <본 레거시>에서 <본 얼티메이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플롯이 주었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면 실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본 아이덴티티>나 <본 슈프리머시>와 비교해서 그렇게 부족한 영화도 아니다. 음모론의 팬이거나, 지난 시리즈의 빈구석이 4편에서 어떻게 채워지는지 확인하고 싶은 관객에게 <본 레거시>는 2012년 여름의 문을 닫을 액션과 스릴러의 엔터테인먼트로 손색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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