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대중영화의 맛
2012-10-02
글 : 이화정
글 : 강병진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이주현
글 : 남민영 (객원기자)
벤 애플렉의 스릴러 <아르고>부터 팡호청의 멜로 <골치 아픈 사랑>까지

이 스릴에 두근두근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다. 올해의 대중영화는 스릴러부터 멜로까지 다양한 곳에 넓게 포진해 관객의 심장을 쉼없이 쥐고 흔든다. 벤 애플렉, 팡호청, 토마스 빈터베르크 등 익숙하고 반가운 이들이 내놓은 신작도 유독 눈에 띈다.

아르고 Argo
감독 벤 애플렉 / 제작국가 미국 / 상영시간 120분 / 섹션 월드시네마

아무래도 신이 연기자 벤 애플렉에게 줄 재능을 따로 숨겨두었다가 연출가로서의 역량에 보태준 게 분명하다. 오해는 마라. 그의 연출작을 보는 순간 당신 역시 이게 비아냥이 아니라 칭찬이란 걸 알게 될 거다. 조지 클루니 역시 그의 연출 능력을 덥석 물어,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 범죄의 온상인 보스턴을 촘촘한 긴박감으로 연출한 <타운>에 이어 그가 주목한 곳은 1979년의 테헤란이다. 이란 혁명이 정점에 이를 무렵으로, 미국 대사관 직원이 이란에 억류당한 시기다. 당시 여섯명의 직원이 미 대사관을 탈출해 캐나다 대사관저에 숨어 지내게 되는데, CIA는 이란 혁명 정부를 따돌리고 이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운다.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는 억류된 이들의 탈출에 도가 튼 인물로, 상부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이란에서 찍는 가짜 SF영화를 유치해 인질을 구출하자는 의견을 낸다. 결국 극장에 상영되지 않을 뿐이지, 이 과정에서 어느 하나 ‘가짜’는 없다. <스타워즈>의 아류작을 만든다는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며, 특수분장계의 권위자와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제작자가 참여하며, 판권료를 내고 시나리오까지 구입해야 한다. 영향력있는 언론의 동원은 물론이다. 먼저 거짓이 판치는 할리우드 영화계를 살살 녹여야 하고, 더 나아가 전세계를 속여야 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란의 삼엄한 보안체계를 허물지 않고는 진행이 불가능한 도전, CIA 역사상 가장 영리한 작전 ‘아르고’(Argo)가 탄생한 계기다.

살벌한 정치적 사안에서 시작한 <아르고>는 작전의 시작부터 탈출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긴장감과 재미를 고스란히 점거한 채 내달린다. 특히 테헤란의 시장에서 영화 스탭으로 변장한 일당이 이란인들에게 내몰릴 위기에 처할 때, 자칫 압사당할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전개되는 스펙터클과 긴장의 강도는 극에 달한다. 존 굿맨과 앨런 아킨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 주는 좋은 연기도 탄탄하게 포진해 있다. 인질의 극적 구출이란 점에서 아카데미가 반길 휴먼스토리를 토대로, 벤 애플렉은 영화적 쾌감의 극대치를 이끌어낸다.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건 미국 가정의 평화를 위해 결국 폭도로 소비된 이란 시민들을 지켜보는 불편함 역시 이 영화에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곡 Distortion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 제작국가 타이 / 상영시간 111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첫 번째 스릴러영화다. 동시에 <잔다라>에서 탐구했던 트라우마의 세계를 더욱 깊게 파고든 작품이다.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범죄 프로파일링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 쿠엔은 이 사건을 수사하던 어느 날, 과거에 만났던 소녀와 재회한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지닌 광이다. 과거 쿠엔은 그녀의 기억을 도와 사건을 해결했지만, 광은 어른이 된 뒤에도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쿠엔이 다시 그녀를 도우려 하는 가운데, 쿠엔의 어린 시절 친구가 나타난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과 연쇄살인사건이 쿠엔에게서 끄집어내는 건, 그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다른 상처다. 타이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중영화감독이자 비주얼리스트인 논지 니미부트르는 극중의 쿠엔이 겪는 착각과 환영을 보는 이들에게도 느끼게 만든다. 얼굴에 떨어지는 물, 코에서 흐르는 피, 귓가 주변을 맴도는 파리 소리 등 인물이 촉각과 청각으로 느끼는 감각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연출이 놀랍다. 여러 사람의 상처가 겹치고 겹치면서 기억을 왜곡시킨다는 영화의 주제를 강조한 충격적인 반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유희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살인장면의 에너지를 주목하자.

더 헌트 The Hunt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 / 제작국가 덴마크 / 상영시간 111분 / 섹션 월드시네마

덴마크의 어느 마을. 한눈에 척 봐도 유하고 다정스러워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루카스, 직업은 유치원 선생이다. 아내와의 이혼 때문에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새로 사귄 여인이 있고 늘 가족같이 지내는 동네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악재가 닥친다. 유아 성추행범으로 몰린 것이다. 그것도 절친한 친구의 대여섯살 먹은 어린 딸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갑자기 그는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된다. 그가 정말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혹은 오해받고 있는 것인지 영화는 한동안 판단을 미룬다. 하지만 중•후반 들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혹독한 싸움을 마다않는 그의 끈질긴 노력을 보여줄 즈음, 우리는 이 영화가 공공의 판단력이라는 그 허술함을 조롱하기 위한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루카스의 외로운 사투이다 보니 당연히 주연을 맡은 배우에게 많은 역할이 맡겨진다. 주연배우 매즈 미켈슨은 외롭게 싸우는 한 남자의 심리적 극단을 훌륭하게 소화해냈으며, 그 결과 칸영화제에서는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한동안 잊혔던 이름인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는 이 영화로 복귀의 신호탄을 날린 것이다. 무서운 스릴러 혹은 역설적인 블랙 코미디로 그가 돌아왔다.

세븐 썸딩 Seven Something
감독 파윈 푸리짓판야, 아디손 트레시리카셈, 지라 말리쿤 / 제작국가 타이 / 상영시간 153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세편의 영화 <14> <21/28> <42.195>를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영화 <세븐 썸딩>은 타이 영화사인 GTH의 창립 7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영화는 인간의 삶이 7년마다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와 형식의 조화가 돋보이는 <14>는 14살 소년소녀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수시로 여자친구의 영상을 올려 그 반응을 살피는 디지털 키드 소년이 결국 페이스북과 유튜브 때문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망쳐버린다는 내용으로, 재기발랄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1/28>은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지금은 남이 된 영화배우 커플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 로맨스와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이야기의 진부함을 털어낸다. 아이돌 그룹 2PM 닉쿤의 영화 데뷔작인 <42.195>는 개인적인 상처를 간직한 42살 여자와 그녀에게 마라톤을 통해 상처를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다. 감동과 여운이 앞선 두 작품보다 오래 남는다.

<세븐 썸딩>은 구색을 잘 갖춘 옴니버스영화다. 세편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세편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다. 지라유 라-옹마니, 시린 호앙 등 타이의 젊은 배우들을 발견하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골치 아픈 사랑 Love in the Buff
감독 팡호청 / 제작국가 홍콩, 중국 / 상영시간 112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골치 아픈 사랑>은 2년 전 팡호청 감독이 내놓은 <담배 연기 속에 피는 사랑>의 속편이다. 애연가들의 풋풋한 로맨스는 그사이 오래된 연인들의 로맨스로 바뀌었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지미,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체리에게도 이별이 찾아온다. 업무차 지미가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관계를 정리한다. 지미는 베이징행 비행기에서 만난 승무원과 금세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뒤 베이징으로 발령받은 체리에게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난다.

각자 새 출발을 하는 것 같았던 두 사람. 하지만 베이징에서 재회한 지미와 체리는 예전 연애 시절의 감정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는 걸 느낀다. 오래된 연인의 사랑 이야기에는 패턴이 있다. 첫 만남의 설렘은 편안함으로 대체되고, 편안함은 무심함으로 발전하고, 무심함은 이별을 부르고, 이별은 새로운 사랑을 예고하고, 새로운 관계의 결핍은 옛사랑에서 채우게 되는 과정. <골치 아픈 사랑> 역시 이 패턴을 따른다. 팡호청 감독은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바꾸어놓는 데 힘쓴다. 특유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연출도 여전하다. 전작들에 비해 다소 힘이 떨어지긴 하지만, 지미와 체리를 연기한 두 배우, 여문락과 양천화의 커플 연기를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인 요양원 Full Circle
감독 장양 / 제작국가 중국 / 상영시간 104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이 요양원에도 찾아왔다. 차세대 스타를 꿈꾸는 그들은 늙고 병들고 제 몸 하나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다. 아들과 사이가 안 좋아 스스로 노인 요양원에 들어간 라오꺼. 서로 마음을 맞대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라오꺼도 서서히 요양원에 적응해간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배변 실수를 할 정도로 쇠약해진 라오꺼는 자살을 결심하고, 목을 매려는 그를 목격한 라오쩌우가 자살을 만류하며 두 사람은 친해진다. 어느 날 톈진에서 열리는 오디션 프로그램 소식을 알게 된 라우쩌우는 요양원의 노인들을 모아 코미디 공연을 준비한다. 라오꺼 역시 공연 준비에 몰두하며 웃음을 되찾아간다. 그러나 몇몇 노인이 공연 준비 중 다치면서 요양원은 그들의 공연을 반대한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었던 노인들은 요양원의 버스를 훔쳐 탈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톈진까지 향하는 길, 목숨을 위협하는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공연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재미 중 하나가 각각의 출연자들이 가진 사연이듯 톈진으로 향하는 노인들의 사연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다. 특히 병세가 악화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라오쩌우를 돌보는 노인들의 우정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의 능청스런 연기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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