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새로운 재능의 발견
2012-10-02
글 : 이화정
글 : 강병진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이주현
글 : 남민영 (객원기자)
멕시코의 신인 미셸 프랑코부터 독일의 촐탄 파울, 얀 슈페켄바흐까지

뜨거운 만남

십대의 왕따문제부터 레즈비언 커플, 만년 조연배우의 삶까지 신진 감독들의 촉수는 다양하게 뻗어 있다. 대신 이들은 모두 영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을 창조하는 데 주력한다. 자기만의 영화적 화법을 확립해가고 있는 신진 감독들의 영화 6편을 소개한다.

애프터 루시아 After Lucia
감독 미셸 프랑코 / 제작국가 멕시코 / 상영시간 93분 / 섹션 월드시네마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다. <애프터 루시아>가 전개하는 ‘왕따’의 문제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로베르토와 그의 딸 알레한드라. 멕시코시티로 이사 온 뒤, 로베르토는 레스토랑의 셰프로, 알레한드라는 새 학교에서의 적응으로 각자 바쁜 듯 보인다. 그러나 알레한드라가 파티에서 남학생과 찍은 섹스 동영상이 휴대폰으로 전송되면서 그녀의 일상은 생지옥이 된다. 비난과 가학의 대상을 상정하고 난 뒤, 십대들이 가하는 잔혹함의 수위는 상상을 넘나든다. 적어도 학교 안에서 그녀에게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장실까지 알레한드라를 따라와 그녀의 벗은 모습을 강제로 찍어가는 남학생들이나, 그녀에게 ‘창녀’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쓰며 집단 폭행을 가하는 여학생들이나 폭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특히 생일축하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자행된 폭력적 언사와 행동은 흡사 공포영화를 볼 때의 충격에 버금갈 지경이다.

알레한드라는 거친 학교생활과 엄마를 잃고 아버지와 헤쳐나가야 할 집안문제를 동시에 떠안고 있는 가여운 소녀다. 아내가 남긴 세간을 보며 눈물 훔치는 로베르토와 달리 소녀는 시종일관 무표정함으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감내해나간다. 사건의 파고가 이토록 높은 데 반해 좀처럼 법석을 떨거나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셸 프랑코 감독의 화법은 도드라진다. 알레한드라를 좇는 카메라는 놀랍도록 절제되어 있으며, 아버지와 딸은 침묵에 가까운 대화를 나눌 뿐이다. 이사 온 집의 휑한 가구는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이 부녀의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다. 영화가 이렇게 침묵할수록, 냉정한 시선을 유지할수록, 관객에게 전달되는 반향은 되레 커진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끔찍한 그물망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 어쩌면 알레한드라의 유일한 지킴이인 아버지뿐일 것이다. 딸을 위한 그의 마지막 행동은 선택이 아니라 어쩌면 이 지독한 악행의 고리를 끊어줄 유일한 해결책일지 모른다. 두 번째 장편 만에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수상한 미셸 프랑코 감독의 재능을 유감없이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릴리아 쿤타파이의 6단계 법칙 Six Degrees of Separation from Lilia Cuntapay
감독 앙트와넷 자다온 / 제작국가 필리핀 / 상영시간 93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필리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알지만, 대부분 그녀를 모른다. 릴리아 쿤타파이는 30여년간 공포영화의 귀신이나 마녀를 연기했던 조연배우다. 필리핀 영화계의 케빈 베이컨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릴리아 쿤타파이의 6단계 법칙>은 생애 처음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그녀가 시상식을 기다리는 상황을 담은 모큐멘터리다. 신문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읽고 눈물을 흘린 그녀는 수상 소감을 준비한다. 그녀의 소망은 이번 시상식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인간극장> 같은 작품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앙트와넷 자다온 감독은 스스로 다져온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녀는 “만약 그 역할에 내가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해올 것”이기 때문에 휴대폰을 만들지 않는다.

출연작 포스터에 자신의 얼굴이 나오지 않으면 직접 포스터를 그려서 벽에 붙여놓는다. 자신을 보고도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마녀 연기를 보여준다. 필리핀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자, 남들의 시선에 굴하지 않았던 뜨거운 인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제5계절 The Fifth Season
감독 피터 브로슨스, 예시카 우드워스 / 제작국가 벨기에 / 상영시간 94분 / 섹션 월드시네마

전작 <카닥>과 <알티플라노>로 주목을 모으게 된 벨기에 감독들인 피터 브로슨스와 예시카 우드워스의 신작. 두편의 전작에서 몽골과 남미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벨기에로 돌아와 조그만 마을의 이상한 계절에 관하여, 아니 실은 조그만 마을의 오지 않는 계절에 관하여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겨울 무렵 마을 축제에서 사람들이 군무를 출 때 이미 영화에서는 이상한 전조가 느껴진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올 무렵 봄은 오지 않고 마을에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벌이 사라지고 곡식이 자라지 않는다. 흉흉해진 사람들은 이 마을에 얼마 전 들어온 자칭 철학자 그러나 떠돌이 양봉업자를 원인제공자로 지목하고 그를 해치려 든다. 종종 몇몇 장면만으로 영화 전체를 살려내는 영화들이 있는데 <제5계절>이 이에 속한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장면을 놓치면 손해다. 어린 두 소녀가 마을 축제에서 출 춤연습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앞으로 저 멀리 커다란 마을의 전통 인형이 조용히 지나가는 그 순간의 불길함, 혹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언덕을 오르는 그 순간 전해지는 음산함. <제5계절>은 특별히 판타지 효과를 덧칠한 장면이 없는데도 강력한 환상을 전하고 있으며 동시에 파시즘은 어떻게 조성되는가에 관한 무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실종신고 Reported Missing
감독 얀 슈페켄바흐 / 제작국가 독일 / 상영시간 86분 / 섹션 월드시네마

딸이 사라진다. 아내와 이혼한 뒤, 몇년 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 로타는 이 일을 계기로 딸의 생활을 추적한다. 딸의 페이스북을 뒤지고, 딸이 가입했다는 클럽의 정체를 알아보던 도중, TV뉴스는 최근 들어 10대 청소년의 실종 사고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도심과 숲속을 헤매며 딸의 흔적을 찾던 로타는 딸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 루를 만난다. 뜻밖의 동행길에 오른 두 사람은 경찰에 쫓기며 노숙을 하는 등의 고충을 함께 겪게 되고, 로타는 자신이 몰랐던 세계에 대해 인식 하기 시작한다.

10대 청소년의 문제를 다룬 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감독인 얀 슈페켄바흐가 <실종신 고>를 착안한 계기는 지구적인 경제 붕괴, 그리고 월 스트리트가를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전세계적으로 촉발시킨 저항의 물결이었다. 영화 속 아이들은 납치를 당하거나,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어른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묻고 있다. 딸을 찾는 로타의 여정은 곧 자극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대중적인 미스터리 화법으로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 감독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자의 호수 Woman’s Lake
감독 촐탄 파울 / 제작국가 독일 / 상영시간 89분 / 섹션 월드시네마

로사는 호수에서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연인 키어스틴은 호숫가에 근사한 집을 한채 갖고 있다. 어느 날, 젊은 레즈비언 커플 에비와 올리비아가 이곳으로 캠핑을 와 이들 커플 사이에 불쑥 끼어든다. 두쌍의 레즈비언 커플의 미묘한 심리전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잔잔한 호수에 제일 먼저 파문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에비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에비는 로사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퍼붓는다. 키어스틴의 사랑에 의심을 품고 있던 로사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에비를 밀쳐내진 않는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사랑을 로사에게 빼앗긴 것 같아 속상하고, 키어스틴은 로사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여자의 호수>는 네 여인의 흔들리는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건 네 여인의 어지러운 시선 교환이다.

카메라는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고 밥먹고 키스하고 춤추고 사랑하는 이들의 불똥 튀는 시선 교환을 매력적으로 담아내는데, 그 순간 관객은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마냥 두쌍의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에 꼼짝없이 집중하게 되고 만다. 시나리오작가로, 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촐탄 파울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진실된 거짓 The Good Lie
감독 션 린든 / 제작국가 캐나다 / 상영시간 93분 / 섹션 월드시네마

진실은 종종 그 단어가 가진 뜻과는 다르게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진실된 거짓>은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파헤치는 한 소년과 진실로부터 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얘기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컬른은 엄마의 유품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발견한다. 호기심에 재생시킨 비디오테이프에는 컬른의 어머니가 결혼 전 강간당했으며 컬른은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고백이 담겨 있다. 현재의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이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데 엄청난 충격을 받은 컬른은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한 남자 로즈를 찾아나서기에 이른다. 컬른의 아버지는 앞으로 컬른이 찾아나설 진실이 컬른에게 엄청난 위험이 될 것을 직감하고 연락이 두절된 컬른과 로즈를 동시에 쫓는다.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한 범인이자 동시에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를 찾아나선 소년의 이야기는 짐짓 무거워 보이지만 <진실된 거짓>은 감동, 서스펜스, 유머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종합선물세트다. 너무 많은 것을 한 작품에 담았다는 점에서 다소 산만해 보일 수 있지만 이보다는 다양한 장르를 한데 녹이는 감독의 조화로운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했던 감독의 이력이 훌륭한 장기로 발전됐음을 보여주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