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기대해왔다. 그가 성우로서 활약해주기를. 오늘에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종혁의 목소리엔 언제나 묘하게 로맨틱한 기운이 있었다고.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서인지 이종혁의 발성은 무척 안정적이고 그 울림엔 독특하고 무거운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최근 이종혁은 말 그대로 ‘포텐’이 터졌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맞춘 듯 어울렸던 쾌남 이정록을 연기한 덕분이다. 그전엔 아무리 이종혁이 코믹하거나 부드러운 역할을 맡았어도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늘 약간의 차가움을 느꼈었다고 기억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추노>에서 익히 보았던 그 어두운 얼굴을 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에 와서 이종혁은 비로소 또 하나의 새로운 얼굴을 찾은 듯했다. 한동안은 드라마에서 그를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종혁의 다음 작품들은 장르가 모두 제각각이다. 목소리 출연을 한 드림웍스의 3D애니메이션 <가디언즈>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11월 말에는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로 대중 앞에 설 예정이며, 그 이후의 행보는 지금 촬영 중인 영화 <돼지 같은 여자>다.
<가디언즈>에서 이종혁이 연기한 배역은 ‘피치’라는 이름의 ‘악몽의 화신’이다. 피치는 세상의 모든 밝고 순수한 것들을 증오하며 두려움과 어둠으로 동심의 세계를 뒤덮으려는 악령이다. 이정록의 가볍고 유쾌한 이미지가 너무 진하게 남은 나머지 어두운 피치 역이 쉬이 연상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기대 이상으로 그는 음산하고 퇴폐적인 피치의 목소리를 120% 소화해낸다. 목소리를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이종혁이 연기한 피치는 많은 산등성이를 그려냈을 것 같다. 목소리에 리듬과 강약이 선명했다는 뜻이다. “처음엔 감을 잡기가 좀 힘들었다. 평상시 말하듯이 톤을 잡으면 악역의 에너지가 잘 안 나타나더라. 그래서 목소리도 깔고, 억양도 세게 들어갔다. 목소리를 만들어서 하다 보니 오늘 했던 목소리가 내일 하면 다시 안 나오더라. 그러면 그전에 녹음한 걸 듣고 수위를 맞춰가면서 했다. 중요한 단어에 포인트를 탁 줘서 강조하지 않으면 대충한 것처럼 밋밋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요사이 그에게서는 ‘피나게 노력한다’는 인상보다는 ‘즐겁고 유쾌하게 두루 어울려가며’ 연기한다는 느낌이 풍긴다. 그런 그에게도 남모르게 염두에 둔 각오가 있을까. “일단 이 작업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이종혁이 오면 촬영이 편해’라고 누군가 말하는 게 힘이 된다. 그러다 좋은 연기가 나오면 서로 신나서 시너지가 생기는 거다.” 대배우 혹은 중견배우라고 칭하기엔 어쩐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올라가야 할 계단이 많은 배우도 아니다. 이미 배우로서 상당히 안정적으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많은 방향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좋은 작품에서 관객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게 좋은 연기자의 자세인 것 같고 그렇게 되려고 하고 있다”는 그의 바람은 의외로 소박하고 기본적인 데 있었다. “어차피 나는 누군가에게 ‘보기’를 당하는 입장이니까 제의가 들어오면 그대로 같이 힘내는” 것이 전부라고 이종혁은 말한다. 같이 있는 사람을 절로 편안하게 만드는 이종혁의 기운과 목소리라면 두고두고 오래 보고 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자리를 떴지만, 그의 목소리가 남긴 여운은 오래도록 빈 의자에 머물렀다.
악몽의 화신 피치
꿈의 요정 샌드맨과 반대로 피치는 아이들에게 악몽과 두려움을 심어주는 존재다. 아이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는 가디언들에게 몹시 질투를 느끼며, 가디언들과 아이들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만큼 외롭고 소외된 영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