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만 콕콕 찍어 말하는 모범생. 고수가 딱 그랬다. 그의 얘기엔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진실되지 않다는 인상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엔 한참 뜸을 들인 뒤 “죄송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생각을 못해봤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대답을 피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싶은 반듯함은 애써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의 연기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없다. 고수는 파격적인 변신을 섣불리 시도한 적이 별로 없는 배우다. <썸>으로 시작해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초능력자> <고지전>을 거치면서 고수는 조금씩 전진해왔다. 그것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결과다.
<반창꼬>의 강일이란 인물도 그렇게 만났다. “지금까지 장르적 성향이 짙은 작품들을 했는데 일상의 모습들을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어요. <반창꼬>를 찍으면서는 크게 연기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카메라 앞에 섰던 것 같아요.” 드라마에선 주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남자를, 영화에선 주로 비현실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을 연기해온 터라, <반창꼬>에서 ‘미친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고수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강일은 소방관이다. 결혼 뒤 아내와는 사별했다. 사별 자체의 아픔도 크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다 정작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슴속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여자 미수(한효주)를 만나면서 삶이 조금씩 흔들리는 인물이다. <반창꼬>는 기본적으로 강일과 미수의 감정 추이를 따라가는 멜로영화다. 큰 틀은 빤하지만 그 속의 디테일이 맛깔나는 영화다. 그럴 때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재미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고수는 정공법으로 캐릭터에 몰입해갔다. 정공법이란 카메라 앞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거였다. 실제로 소방관이 되어 구조현장에 투입될 수 없으니 매 순간 “나는 소방관이다”라고 최면을 거는 식이다. 그리고 바닷가 횟집 장면에서 술에 취한 강일이 저세상으로 먼저 간 아내의 환영을 보고 눈물 짓는 장면은 고수의 진심과 강일의 진심이 맞아떨어져 탄생한 장면이다. “감독님이 한참 뒤에 얘기해주셨어요. 원래 감독님의 생각과 제 연기가 많이 달랐다고 해요. 감독님은 평범하게, 가볍게 연기할 줄 알았나봐요. 그런데 전 그 장면이 너무 슬펐거든요. 그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어요.” 현실에선 너무 튀어 보이는 장면들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게 배우의 몫이라던 고수는 <반창꼬>에서 그 과제를 훌륭히 완수했다.
고수는 일과 일상을 명쾌하게 구분짓는 배우이기도 하다. “현실은 현실이고 연기는 연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수는 올해 2월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시기에 사별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심정은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실의 상황은 연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작품 속 세계도 또 다른 현실이긴 하지만 그걸 현실과 구분 못하면 안되거든요. 카메라 앞에선 최대한 그 캐릭터에 빠져 살지만, 메이크업을 지우고 의상을 갈아입고서까지 그 인물로 사는 건 위험하지 않나 싶어요.” 배우는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는 그는 그래서 더 많은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매번 출발선에 새로 선 심정으로 혹은 “영화 5편이면 아직 신입생”이라는 마음으로 새 작품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다만 스스로가 “좀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아직까지는 시나리오를 볼 때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정말로 저 자신한테 솔직해질 수 있었으면 해요. 좀더 용기가 생겨서 작품을 하는 데 자유로워지는 게 저한테는 목표인 거죠.” 그 용기, 그 자유가 고수를 진정한 고수(高手)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결혼 뒤 첫 멜로영화를 찍으셨는데 결혼 전과 후 (멜로)감정 연기에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_abc1473(트위터)
=크게 다른 점은 없었어요. 시나리오대로 표현했어요. 또 한효주씨가 같은 소속사 식구라 편하게 찍었고요.
-고수씨에게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반창고는 무엇? _poolcho
=주변의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인생은 늘 상처의 연속이지만 주변의 좋은 분들이 있어 위로가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