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의 영화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한다. 종종 일차원적이다, 단순과격하다는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영화 자체로 그렇다기보다 그의 언어나 문법이 그야말로 ‘직접적’이기 때문에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시작부터 거추장한 수사를 달지 않는다. 그저 관망하는 것 같은 매끄러운 설정숏 하나 없이 경찰서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나이트클럽을 휘젓는 식이다. 그렇게 강우석의 영화는 ‘사건’과 ‘세태’를 다룰 때 투박하지만 절묘한 기승전결을 이룬다.
<전설의 주먹>은 그가 <이끼>(2010)와 <글러브>(2011) 등 그동안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음에도(예정대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전신인 <나는 조선의 왕이다>를 연출했다면 그 1년의 공백도 없었을) 그가 마치 굉장히 오랜만에 귀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강우석이 돌아왔다!’는 문구가 굉장히 자연스레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뭘까. 말하자면 암묵적으로 그가 만들어주길 바랐던 형태와 이야기의 영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의 주먹>은 바로 거기에 꼭 들어맞는 영화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은근한 심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고, 마치 뉴스에서 본 듯한 장면들이 장르라는 이름으로 녹아 있으며, 의도적이고 가식적인 멋과는 최대한 거리를 둔 그야말로 진짜 ‘아저씨의 영화’랄까.
예나 지금이나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설의 주먹>의 핵심적인 정서는 바로 아저씨들의 고단함이다. 한때 ‘전설’이라 불렸던 왕년의 ‘주먹’들이 이제는 각자의 생업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다. 과거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복싱 대표선수의 꿈이 눈앞에서 좌절된 임덕규(황정민)는 이제 혼자서 딸(지우)을 키우고 있지만, 딸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다. 말썽을 피워 친구에게 상처를 입힌 딸을 위해, 딸의 친구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한다. 더럽고 아니꼽지만 그래야 딸을 지킬 수 있다. 그런 그는 자기만의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적자’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상금의 유혹은 떨치기 힘들다. 그 정도 돈이면 딸에게 태블릿PC보다 더한 것도 사줄 수 있고, 장모님(김영옥)에게 제대로 된 선물도 드릴 수 있다. 알다시피 그건 돈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삶에 찌들어 잊고 지냈던 최소한의 품위 유지비다.
과거 학교의 ‘짱’이었던 또 다른 친구 이상훈(유준상)은 ‘기러기 아빠’의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친구이자 재벌인 손진호(정웅인)의 회사에 홍보 부장으로 있다. 성격도 생활도 ‘개’인 진호의 뒤치다꺼리가 그의 주된 임무다. 언론사 국장을 만나 대낮부터 ‘폭탄주’를 연거푸 마신다. 153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감안해 ‘한두잔 마시는 것 정도는 편집으로 덜어내도 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무조건 상대가 주는 대로 다 마셔야 한다”는 강우석 감독의 답변은 확고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데도, 다리가 풀어진 채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는 그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모든 직원들이 공채로 뽑혔을 텐데, 분명 친구 덕에 ‘낙하산’으로 부장이 되어 험한 일이나 하고 있는 그는 분명 회사에서 ‘왕따’일 것이다. 그런 그가 딸과 가족을 외국으로 떠나보낸 건 ‘부잣집 친구 녀석의 운전기사 일’을 했던 아버지 때문이다. 과거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아팠던 그가, 그와 별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가족에게 보여주기 싫어 기러기 아빠 생활을 자처한 것이다.
학교는 다르지만 그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던 신재석(윤제문)은 삼류 건달이다. “너희들은 <영웅본색>도 안 봤냐!”며 다그치던 그 역시 세상의 때가 묻을 대로 묻었다. 돌이켜보면, ‘옛날에 학교 다닐 때 꼭 그런 놈 하나 있었어’라는 모두의 회상에 딱 들어맞는, 마치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에서 중호(정운택)를 떠올리게 하는 장르적 인물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각기 다른 자리에 놓인 것 같지만, 과거 깡패 조직 내에서 철없는 ‘총알받이’로 있던 시절이나 대기업 혹은 성인오락실에서 뒤치다꺼리나 하는 현재나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음지’에 있다. 강우석이 축조한 그런 폭력적 노스탤지어와 자본의 세계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자유지만, 어쨌건 그가 보기에 올림픽 개최한다고 사당동의 판자촌을 밀어버리던 1988년이나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이나 그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이다. 그런 그들이 우승상금 2억원을 노리고 토너먼트로 겨루는 TV 리얼 파이트 쇼 ‘전설대전’에 뛰어든다.
40~50대 남자들의 ‘힐링’
임덕규는 <공공의 적>(2002) 시리즈의 강철중(설경구)과 닮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까지 따내는 등 사격선수로서 전도유망하였으나 타고난 게으름으로 대표선수는 되지 못하고 특채로 형사가 된 강철중처럼, 비록 종목은 다르지만 임덕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출전이 유력시되던 복싱선수였다. 하지만 <공공의 적>으로부터 10년, 임덕규로 변신한 강철중은 더 세상에 달관한 표정을 갖게 됐고 말수가 줄었다. 강철중이 잔소리하는 어머니에게 철부지 같은 투정을 부리고 동네 깡패들을 완력으로 제압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임덕규는 철저히 몸을 사린다. 강철중처럼 ‘겁 없는 강력계 형사’가 아닌 평범한 식당 주인이어서 그런 것일 테지만, 오래도록 험한 꼴 보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강우석의 <전설의 주먹>이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바로 그런 ‘팍팍한 세상살이’에 대한 묘사다. 원작이 보다 장르적이고 폭력으로 인한 원죄의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면, 영화는 철저히 ‘가족’과 ‘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흥행사’ 혹은 ‘승부사’로 불려왔던 강우석 감독이 보기에 <전설의 주먹>이 표방하는 지점은 바로 40~50대 남성관객을 위한 ‘힐링’영화다.
그런 점에서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이전 두 영화 <이끼>와 <글러브>가 판타지의 세계를 그렸다고 말한다. <이끼>의 은밀한 마을, <글러브>의 특수학교라는 공간은 그가 볼 때 답답한 세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은유법보다는 직유법을 구사할 때 박진감 넘치는 전개에 몸을 실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소 단순하고 유치한 장면이라도 차라리 작위적인 장면보다는 낫다고 느끼는 사람이 바로 강우석이다. 가령 상훈이 진호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나오는 장면에서,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먹을 내지르고는 계속 부들부들 떤다. 그동안의 회한과 고통이 일시에 폭발한 것일 테다. 회사의 중역들이 그 주먹을 피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상훈은 주먹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강우석은 그냥 인물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다. 자신을 왕따로 만들었던 동료 직원이나 중역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도 있고, 보다 멋지게 회사를 떠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이 안되고 웃겨 보여도 그냥 그렇게 끝낸다. 원래 세상살이가 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것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다 참고 사는 거니까. 그게 바로 <전설의 주먹>의 상훈에게 딱 맞는 제스처니까.
상금, 천만 관객 그리고 맷값
강우석 감독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촬영 순서에 있다. 그는 어린 배우들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과거를 먼저 촬영하고 성인 연기자들의 촬영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 역시 영화 속 ‘전설대전’을 치르듯 배우들을 조련하며 영화를 촬영한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영화 속 링 위에서 상대 배우와 싸우는 것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역 배우들과도 대결했다. 과거와 현재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계속 대화하듯 전개되는 영화에서 그것은 밸런스 유지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모험적이며 위험한 시도다. 하지만 그는 그게 맞다고 본 것이다. ‘강우석 영화’의 투박한 ‘요체’가 바로 거기 있다고 느낀다.
그런 가운데 <전설의 주먹>은 두번의 변곡점을 지난다. 마냥 친구들의 우정과 훈훈한 가족 미담으로 흘러갈 것처럼 예상되는 이야기에 스포츠도박 에피소드와 동창회 장면이 끼어든다. 개봉에 있어 보다 시간차가 있었다면, 분명 최근 프로농구 스포츠도박을 연상시킨다고 입을 모았을 그 에피소드는 왕년의 전설들이 스포츠도박의 유혹에 빠져들면서 ‘찌질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결국 링 위에서도 ‘쇼’고 링 밖에서도 ‘쇼’다. 세상 사람들 모두 ‘배우’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두 번째 동창회 장면은 ‘전설’이라는 그 단어의 허상을 까발린다. 관중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건 싸움을 멋지게 잘해서가 아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프로 격투기 선수들의 경기를 볼 것이다. 영화 속 해설자(위양호)가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프로와 아마추어를 비교하며 소격효과를 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전설대전을 보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한주먹’ 한다며 인생의 한시절 자신을 억눌렀던 과거의 존재들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걸 즐기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인 선수들의 이름을 반말하듯 부르고, 대중은 그저 싸움을 붙이면서 즐긴다. 상금은 바로 앞서 얘기했듯 ‘맷값’이다(손진호가 회사 중역을 엎드려뻗쳐시켜서 야구배트로 체벌하는 장면은 수년 전 모기업 재벌의 ‘맷값 폭행’으로 화제가 됐었다). 어쩌면 ‘천만 관객’이라는 것도 바로 그 맷값의 대가다. 바로 거기에 ‘대중’의 실체가 있고 흥행사라 불리며 늘 자본에 시달려왔던, 동시에 <나는 조선의 왕이다>에서 하차하며 느꼈을 법한 강우석 감독의 진짜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전설의 주먹>이 전하는 감동의 실체는 바로 그 맷값의 허무함이다.
무거움을 털어냈다
<전설의 주먹>은 원작 웹툰과 어떻게 다른가
‘미디어다음’에 연재된 이종규 작가의 <전설의 주먹>(글 이종규/그림 이윤균)과 강우석의 <전설의 주먹>은 기본적인 얼개 외에는 상당히 다르다. 현재 시점에 ‘전설대전’이 펼쳐지고 과거의 주먹들을 찾아다니고 그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설정은 같지만, 임덕규가 과거에 복싱 유망주였다는 새로운 설정 등 많은 변형을 가했다. 일단 임덕규가 국숫집 주인이 아닌 ‘노가다’로 나오는 원작의 시제는 1982년이지만, 영화는 88올림픽 직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원작에서는 프로그램의 FD인(영화에서는 권현상이 연기한 것으로 보이는) 한진석이 왕년의 전설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돼 있기에, 이요원이 프로그램의 PD로 투입되면서 그 분량이 대폭 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측면이다. 원작은 ‘칙칙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무겁고 음울하다. 그들이 겪었던 왕년의 사건 역시 영화와 달리 ‘살인’ 사건이다. 게다가 임덕규의 딸은 당하고 사는 학생이 아니라 친구의 팔에 담뱃불을 지지는 불량 청소년의 전형이고, 사과하러 온 아버지에게 “니가 허구한 날 엄마랑 나랑 패니까 보고 배웠다 어쩔래!”라며 따진다. 끝까지 ‘국정원 출신으로 부당해고를 당했다’며 우기는, 대회 참가자이자 나중에 임덕규의 매니저가 되는, 성지루가 연기하는 코믹 캐릭터 역시 원작의 무거움을 상쇄하기 위한 새로운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