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옆에서 찍어줘.” 3월27일 언론시사 이후, 거의 매일 술과 문자 메시지의 나날을 보냈다는 강우석 감독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입 주위에 두드러기가 났다며 애써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강우석이 돌아왔다’, ‘강우석의 힘을 느꼈다’는 문자가 가득 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멈출 줄 몰랐다.
-원작 웹툰 <전설의 주먹>을 어떻게 바꾸고자 했나.
=케이블TV의 ‘전설대전’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설정을 두고 장민석 작가와 얘기를 나누길, 전면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원작은 전반적으로 표현이나 전개가 좋은데 너무 무겁고, 그들이 너무 ‘루저’처럼 묘사된다. 관객이 즐길 만한 대중영화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덕규가 일하는 곳도 소박한 동네 국숫집으로 하고, 과거 돈 많던 내 짝꿍이 이제는 중년의 재벌이 되어 있다는 설정도 현실감있게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나 어디서나 접할 법한 평범한 가장들의 이야기로 그리고 싶었다.
-153분이라는 상영시간이 길다는 지적이 있다.
=그들이 왜 전설인지 보여주는 게 필요했다. 여성관객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남성관객은 그들 각자에 스스로를 대입해서 영화에 빠져들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홍보와 입막음을 위해 폭탄주로 낮술을 마시며 휘청거리는 상훈(유준상)을 보면서 ‘홍보맨’들이 어마어마하게 울더라. 기러기 아빠인 그가 밤에 편의점 앞에서 멀리 있는 딸에게 전화하는 장면은 내 상황하고도 겹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문자를 받을 때 뿌듯하기도 하고 괜히 ‘짠’하기도 하고 그렇다.
-영화에는 직장인들의 비애가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40, 50대 남성들의 고단함이다. 사실 내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개털’이다. (웃음) 여전히 대기업에 어마어마한 빚이 있고 그걸 해결해야 하는 게 지상과제다. 그래서 그 남자들의 고단함에 흉기처럼 돌아다니는 ‘돈’을 스며들게 하고 싶었다. ‘돈돈돈’거리는 세상에서 그 돈이 우리를 얼마나 옥죄어오는지 그 위험수위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전설의 주먹>은 강우석이 다시 현실의 시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물론 <이끼>나 <글러브>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영화들이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현장을 즐기지는 못했다. 두 영화는 내게 사실상 판타지의 세계다. 분명 내 영화지만 내 영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종종 있었고, 스탭들에게 은근히 짜증을 내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꾸준히 거의 매해 영화를 만들면서도 어딘가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을 때가 있었다. 나로서는 심각한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요소, 환경 다 필요없고 무엇보다 ‘사람’을 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전설의 주먹>을 만들면서는 진짜 내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내내 신났고 뭔가 혼연일체가 되어 영화를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절대 부상당하면 안된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윤제문은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어금니가 나가서는 나중에 ‘저 임플란트 하고 왔어요’ 그러더라. (웃음) 성지루도 거의 허리가 나갔고 유준상도 십자인대가 나갔다. 링의 최고수 ‘거북이’로 나오는 배우는 골병들 정도로 실제로 거의 매일 맞았는데 “이 정도로 맞아야 쓰러지는 거 아닙니까”라더라. 다들 너무 몰입한 나머지 거의 미쳐서 찍은 것 같다.
-임덕규(황정민)는 당신의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설경구)의 또 다른 변형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더 고단하게 느껴지고 철든 모습이다.
=황정민에게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은 ‘딸바보’였다. 딸이 뭘 해도 아버지는 그냥 웃는다. 그 어떤 말썽을 피워도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과거 자신이 어두운 폭력 세계에 살짝 발을 디딘 경험이 있기에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덕규가 딸을 괴롭힌 학생 패거리를 제압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가장 고민됐다. 강철중이라면 마치 장난하듯 통쾌하게 제압하는 장면이 어울리는데, 그는 그러면 안됐다. 내내 고민하다가 최근 어린 학생들이 편의점 앞에서 충고하는 어른을 떼로 몰려가 죽이는 일 등이 일어나는 걸 보고, 어떤 경고 같은 느낌의 신으로 넣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덕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제압한다. 억지로 싸우는 느낌으로 그들을 대한다. <신세계>의 황정민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다르다.
-최근 한국영화의 화두가 ‘15세 이상 관람가’ 강박이라면 <전설의 주먹>은 긴 상영시간은 물론 호기롭게 ‘청소년 관람불가’를 택했다.
=등급에 대한 생각도 지우고 내 이전 영화들도 다 지운다는 생각이었다. 무조건 <전설의 주먹>과 그 정서만 믿고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는데, 미리 본 박평식 평론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형이 원래 좀 입이 ‘걸다’. (웃음) 평소에 그 형 만나면 “<씨네21_> 별점 매길 때 별 좀 많이 줘” 그러는 사이인데, 19세로 치고 나가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최근 내 영화 중에서 제일 좋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또 어떤 분은 15세도 아니고 19세도 애매하고 ‘17세 관람가’가 있었으면 그렇게 됐을 거라고 했다. (웃음) 나로서는 성인 관람가가 된 것이 좀 안타깝긴 하지만 학생들이 조폭과 싸우고, 생맥주도 마시니까 처음부터 포기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15세에 맞추려고 고등학생 시절의 나이트클럽 액션 신을 다 들어낼 순 없었다. 과거 전설들이 겪었던 더러운 세상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면이기에 그것만은 절대 반대했다.
-이사들을 ‘엎드려뻗쳐’시켜서 야구배트로 체벌하는 진호(정웅인)의 모습은 뉴스에서 실제로 접했던 ‘맷값 폭행’ 사건을 연상시킨다. 역시 그런 장면에서 강우석의 영화라는 걸 느끼게도 된다.
=다들 그렇게 해도 되냐고 하더라. 나중에 영화 개봉하면 특정 기업에서 분명히 연락이 올 거라고. 또 언론사 편집국장을 만나 대놓고 기사 내보내지 말라고 요구하는 장면도 있다. 공개되면 분명히 이런저런 말들이 있겠지만 그런 거 다 피해가면 진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릴 수 없다. 영화계를 ‘딴따라’라 얘기하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뭐 몰라서 그런 묘사를 안 하는 건가? 알지만 그냥 참기도 하고, 돈이 더러워서 그냥 넘어가기도 하는 거다. 우리도 알고 세상 사람도 다 안다 그러니까 까불지 마! 그런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 중 하나는 상훈이 진호에게 넌 왜 아직도 성장하질 못했냐며 노려보는 장면이다. 너 왜 그러냐, 응? 다들 너 같은 놈들을 한심하게 본다 이거지.
-아역과 성인 연기자의 분량 비중이 거의 일대일에 가깝다. 촬영순서와 현장진행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먼저 아이들 장면을 다 찍었고, 크랭크인 고사를 지내는 날 그 장면들을 성인 연기자들에게 보여줬다. 일종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나이트클럽 액션 신을 빼고는 아이들 분량을 다 찍었다. 윤제문은 박두식을 보고 “나보다 훨씬 더 잘하네” 그랬고 황정민도 박정민을 보고는 “얘들 잡으려면 장난 아니겠다” 그러며 신나했다. 사실 아이들의 감정이 어떻게 점프하는지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성인 연기자들도 함께 갈 수 있는데, 나는 오히려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봤다. 이런 촬영순서로 가는 걸 마지막까지 프로듀서가 반대했지만 내가 우겼다.
-어린 배우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나. <파수꾼>에 나온 박정민을 제외하고는 전부 새로운 얼굴이다. 따지고 보면 성인 연기자들 역시 기존의 설경구, 정재영이 아닌 황정민의 경우는 새로운 선택이랄 수 있다.
=제작 소식을 듣고는, 이름 대면 알 만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출연 제의도 있었다. 나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모르는 얼굴들이 나와서 처음부터 정서를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다고 봤다. 고르는 기준은 첫 번째가 눈빛이었고 두 번째는 싱크로율이었다. 박정민의 경우는 “거 왜 <파수꾼>에서 이제훈 말고 다른 애 있잖아?” 그러면서 내가 직접 선택했고 나머지 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황정민도 그렇다. 이전 내 영화들을 지우고 전혀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해서 만났다. 유준상을 제외하면 이전 내 영화에서 익숙한 주조연급 배우들이 없다. 설경구, 정재영에게는 ‘우리 한동안 만나지 말자’고 미리 못박아둔 상태였다. (웃음) 이요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을 해보고 싶다’며 매달렸던 경우다.
-‘<써니>의 아저씨 버전’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써니>에 등장하는 여고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지만 <써니>는 판타지고 <전설의 주먹>은 철저히 현실에 발딛고 있다. 가령 <써니>의 시위장면과 <전설의 주먹>의 격투기 장면의 정서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물론 영화 속 성지루가 이마에 ‘국가정보원’, ‘안기부’, ‘중앙정보부’ 그렇게 서로 다르게 써붙여오는 장면의 판타지적인 풍자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전설의 주먹>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건 휴 잭맨이 아버지로 나오는 <리얼 스틸>(2011)이다. 처음에 포스터만 보고는 ‘<트랜스포머> 짝퉁인가?’ 했는데(웃음) 막상 영화를 보고는 넋이 나갔다. 직원들에게 전부 가서 보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던 영화다.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함께 갈등을 해소해가는 장면은 그 옛날 감동적으로 봤던 프랑코 제피렐리의 <챔프>(1979)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승리로 나아가되, 굉장히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사실 그들이 격투기 선수가 되어 멋진 액션을 펼치는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우정을 회복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변해가야 한다. 다음 토너먼트에 싸우게 될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시간을 끌어 지금 상대를 지치게 만들고,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불법 스포츠도박으로 받은 돈을 되돌려주고, 그런 게 진짜 승리의 묘미다. 그렇기 때문에 재석이 경기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떠나가는 거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덕규와 상훈의 최후대결 장면 처리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 원작 웹툰이나 각색한 시나리오에 없는 강우석만의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런 점들이라 말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과 별개로 <7번방의 선물>의 흥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개봉 초기에 봤는데 ‘좀 울리네’ 하는 생각 정도만 했지 ‘대박’이 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저거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 하는데, 쑥 들어와서는 울리더라. 나보다 옆사람들이 너무 울어서 사실 집중을 못했다. (웃음) 오랜만에 만난 따뜻하고 착한 영화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지는 정말 몰랐다. 세상이 답답해지고 각박해지니 다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인간다움을 갈망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로, 그와 비슷한 영화들이 또 줄줄이 기획된다고 하니 그런 게 가장 우려스럽다. 이미 검증된 걸 쫓아가면서 그의 반의 반만 들어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시선은 위험하다. 그럴수록 계속 더 새로운 걸 추구하고 다른 취향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전설의 주먹>을 끝낸 감회는 어떤가? 그리고 혹시 다음 작품 계획은 있나.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일 거고(웃음) 일단 내가 좋아서 스탭들과 신나게 만든 영화를 이런저런 눈치 안 보고 평가받고 싶은 느낌이 먼저다. 개인적으로는 자신감을 찾았다는 점,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이 생긴 게 중요하다. 영화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뭔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VIP 시사회날 뒤풀이 때, 이창동 감독이 ‘강우석 감독의 힘을 보여줬다’고 하고 안성기 선배가 ‘강우석이 돌아왔다!’고 해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안성기 선배는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서는 새벽 4시까지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더라. (웃음) 그런 모습들을 보며 다들 쌓인 게 많구나, 그냥 이런 즐겁고 신나는 영화를 다들 기다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아직 구체적으로 다음 작품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건 코미디영화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