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히치콕의 조력자
2013-05-28
글 : 이화정
로버트 F. 보일 Robert F. Boyle, 1909-2010 <새>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프로덕션 디자이너
<새>
<러시안스>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1963)에서 멜라니가 전화 부스에 갇혀 갈매기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의 압도적 공포를 기억하는가. 수백 마리의 새가 등장하는 장면은 기술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였고, 실제 새들과 시각효과들이 스크린 위에서 제대로 합쳐진 성취는 당시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전작 <싸이코>의 흥행으로 모든 관심이 <새>에 몰려 있었던 때였고, 히치콕의 도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실험이었다. 모든 스탭을 불안에 떨게 만든, 이 까다로운 장면의 한가운데 히치콕의 파트너로 알려진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버트 F. 보일이 함께하고 있었다.

로버트 F. 보일은 ‘히치콕의 리얼리즘’을 구현해내는 데 없어서는 안될 일원이었다. 그는 히치콕의 작품 중 <새>를 비롯하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마니>(1964) 등에 참여했는데, 첫 인연은 <파괴 공작원>(1942)이었다. <파괴 공작원>은 히치콕이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작품이라 적은 제작비와 마음에 들지 않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해야만 했다. 히치콕은 그 불리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마음먹고 새로운 팀을 꾸려서 그 난국을 타계하고자 했다. 보일이 갖고 있던 뛰어난 스케치와 디자인 능력은 히치콕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히치콕의 메모대로 구현하다

190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보일은 원래 남부 캘리포니아대학(USC)을 졸업하고 건축가로 일했다. 2차대전 때는 종군사진기자로도 일했는데, 당시 그를 영화계로 이끈 건 장기간 지속되는 경제공황이었다. 건축 일을 잃게 된 그는 그길로 영화계에서 일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엔 연기를 시작했지만 그를 사로잡은 건 영화미술이었다. 1933년 아트디렉터 한스 드라이어의 일원으로 파라마운트사의 미술팀에 고용된 그는 세실 B. 드밀과의 작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스케치, 보조 아트디렉터로 참여한 뒤 1940년대 들어 유니버설 스튜디오로 이적하면서 본 격적으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다. 보일은 앞서 히치콕과의 작업 이후 <러시안스>(1966),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 <시카고 시카고>(1969), <지붕 위의 바이올린>(1971) 등을 통해 노먼 주이슨 감독과도 상당수의 작품을 함께했다. 노먼 주이슨 감독은 그를 ‘이 시대 유일하게 위대한 아트디렉터’라고 평가한다. “꼼꼼한 세팅 덕분에 그의 미술은 무척 디테일하고 사실적이다. 그의 모든 손길은 영화에 사실적인 공기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유머러스한 노먼 주이슨 감독과의 작업을 비교적 평화롭게 기억한 것과 달리, 보일은 히치콕과의 작업은 매일매일이 사투였다고 말한다. 히치콕은 실험 가능한 모든 신기술을 동원해 배우를 곤경에 빠뜨리기로 유명했는데, 배우보다 먼저 스탭들이 감독의 곤혹스러운 요청을 받아내야 했다. 무엇보다 보일은 히치콕의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구현할 책임자였다. <의혹의 그림자>(1943)에서는 벽장처럼 좁은 공간을 시각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까다로운 도전과제가 주어졌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새겨진 위인들의 실물 크기에 해당하는 얼굴 모형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블루 스크린 촬영, 모형 새의 와이어 촬영, 여기에 실제 새의 혼합을 통해 만들어진 <새> 촬영도 히치콕은 몇번이고 꼼꼼한 계획을 들이밀고, 다시 수정하기를 반복했고, 보일은 그 다양한 실험과 요구를 모두 감내해야 했다. “히치콕이 원하는 바로 그것대로”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가 표현하려고 하는 서스펜스, 테러, 그 어떤 것이든 그는 만족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감독이었고 나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그걸 실현시켜야 했다.” 물론 이 관계가 상하 주종 관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평등한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히치콕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걸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려줬다.” 보일은 히치콕이 휘갈겨쓴 메모 한장이 정교한 그림보다도 더 정확하게 영화의 시각적인 방향을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100여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

존 웨인의 <최후의 총잡이>(1976)를 포함하여 지난 2010년 100살로 타계할 때까지 보일이 작업한 작품은 100여편에 이른다. 2008년 98살의 나이로 아카데미시상식에 명예상을 수상하러 나온 그는 수많은 영화인에게 감동을 주었고,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아이콘’ 같은 존재로 살아남았다. 늘 까다로운 작업에 익숙한 그지만, 그는 미술 자체의 공적을 치하하려 들지 않는다. “만약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없다면, 아무리 기술적인 성취를 하더라도 그건 좋은 장면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트디렉터와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그가 내린 정의 역시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해나가는 것으로 “영화가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규정한다. “미술감독은 언제나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숨쉬고 사고하는 자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이용해 감독의 비전을 표현하며 그러한 조력자의 역할을 즐길 줄 아는 자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인의 손, 예술가의 마음, 디자이너의 몸이 필요하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스크린 프로세스의 시작

그의 동료 앨프리드 히치콕(1899~1980), 영화감독

히치콕은 다양한 기술을 통해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데 있어 탁월한 감독이다. 스크린 프로세스 역시 그의 손에 의해 완성된 대표적인 기술이다. <구명선>(1944)에서 그는 스크린 프로세스를 적극 이용함으로써 적은 제작비와 한정된 공간에서의 촬영을 마친다. 카메라 앞에 보이는 것은 구명선에 오른 사람들뿐 모든 바다장면은 사전에 촬영되어 합성된 결과물이다. 스크린 프로세스는 반투명 스크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뒤쪽에서 이미지를 투사한다. 배우는 스크린 앞에서 연기를 하고, 뒤편 스크린에는 미리 촬영한 풍경이나, 영상들이 펼쳐진다. 이후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은 앞다투어 스크린 프로세스 스테이지를 구입했다. 이후 배우들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 장면은 대부분이 스크린 프로세스를 활용해 만들어졌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