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칸영화제의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하면 좋을까. 이렇게 시작해보자. 칸에 오기 위해서는 파리를 거쳐야만 한다. 그날, 조종사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으로의 착륙을 알리고 비행기가 하강을 시도하던 순간에 기이한 우연 하나가 불쑥 찾아왔다. “When I was seventeen/ it was a very good year….” 그렇게 시작하는 어떤 노래가 비행기의 하강에 맞춰 기내 라디오 방송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칸으로 가기 위해 육지에 착지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하고많은 노래 중에서도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는 것이 내겐 감격적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꿈결 같은 회상에 젖어 부르는 <It Was A Very Good Year>. 지난해 이맘때 칸의 어느 극장에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던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결국 2012년 칸에서 본 나의 최고의 걸작 두편 중 한편으로 남았다(또 한편은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지난해 나의 최고의 국내 영화 <다른나라에서>와 더불어 나의 최고의 외국영화로까지 마침내 남았다. 나뿐만 아니라 <씨네21> 연말 결산 설문에서 몇몇 동료들, 남다은, 장영엽, 허문영도 외국영화 최고작으로 이 영화를 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울리던 노래를 칸으로 다시 가는 올해의 시작부에 운명처럼 마주쳤으니 나의 진술이 다소 호들갑처럼 보인다 해도 나로선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음악과의 우연을 지나 칸에 다시 왔고 영화제는 중반이 지나고 있으며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상영됐다. 처음에는 그 우연이 무언가 특별한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미신에 휩싸였다. 예컨대 올해는 여러 편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떼를 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돌아보니 진위와 무관하게 그 우연은 특별한 계시 가 아니라 특별한 자극이 된 것 같다. 무언가 완성된 것들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든지 나의 감각을 열어 기민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이 특별해질 것이라는 자극. 지금은 영화라는 세계란 어떻게든 어디에서든 수시로 변장하여 내게 출몰하며 예감될 것이므로 그 출현의 낌새와 활동을 놓치지 말고 느끼라며 나를 자극한 신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저 음악과의 우연 때문에 개인적인 평론이 아니라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민망함을 견디며 이 글을 일인칭으로 작성하고자 한다.
일단 문제작으로: 아마트 에스칼란테 <헬리>, 소피아 코폴라 <더 블링 링>
국내에서도 개봉한 개막작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 영화는 조금도 위대하지 않다. 차라리 당차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문제작 한편과 언젠가는 성장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여전히 철들지 않은 미완의 작품 한편에서 시작하는 게 더 흥미롭겠다.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헬리>, 소피아 코폴라의 <더 블링 링>이다.
8년 전 2005년의 칸에서는 멕시코에서 온 무명 감독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데뷔작 <상그레>가 예상 밖의 선풍적인 언론 몰이를 했었다. 당시에 이 영화에 관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 <르몽드> 등이 일제히 격찬을 쏟아냈을 때 인터뷰를 위해 내가 만났던 <포지티프>의 한 평론가는 “저런 태도가 바로 지적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라며 그 언론들의 지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언론에 대한 그의 비난에는 영화에 대한 비난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평론가의 의견과 무관하게 내게도 <상그레>는 강렬하지만 어딘지 의심스러운 작품이었다. 그 뒤에 그의 두 번째 영화 <나쁜 놈들>을 보았는데 에스칼란테의 영화는 좀더 노골적이고 노련해져 있었고 더 나빠져 있었다. 그리고 올해 개막작을 제외하고 내가 마주친 첫 번째 영화가 에스칼란테의 세 번째 장편 <헬리>다. 영화는 더 강력해진 동시에 더 교활해져 있다.
멕시코의 젊은 공장 노동자 헬리는 어쨌든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하지만 열두살짜리 여동생 에스텔라, 아니 그녀가 사랑한 애인 열여덟살짜리 군인 베토가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군대가 마약상들로부터 압수한 마약을 베토가 다시 훔치고 그걸 에스텔라와 헬리 집에 몰래 숨겨놓은 게 발각된다. 헬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부의 누군가, 아마도 불법의 무리와 결탁해 있는 것이 분명한 그들이 전모를 알게 되고 베토와 헬리를 처벌하라며 불한당들에게 넘겨버린다. 그사이에 여동생 에스텔라도 실종된다. 이제 고문이 시작된다. 불한당들이 베토를 천장에 매달고 하의를 벗기고 갑작스럽게 독주를 그의 성기에 뿌린 다음 불을 붙여 성기를 태우는 장면에서 영화 내내 조금씩 신음소리를 내던 내 옆자리의 중년의 프랑스 여기자는 결국 극장을 나갔다. 영화의 중반 이후 베토는 죽고 만신창이가 된 헬리는 하염없이 여동생 에스텔라를 찾는다. 그리고 오지 못할 것 같은 여동생 에스텔라가 기적처럼 돌아온다. <헬리>는 정확히 중반까지는 끔찍함이라는 감정으로, 중반 이후는 고요함이라는 감정으로 설계되어 있다. 관객을 감정적으로 호되게 몰아친 다음 저 일어난 사건에 대한 동의와 동감을 끌어내기 위해 나머지 시간은 한없이 처연하고 고요하게 연출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래서 더 교활하다. 감독은 “그것이 지금 멕시코의 현실이며 이미지”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가 자신의 영화적 강도(强度)를 충족시키기 위해 멕시코의 현실을 도용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난해 칸의 최대 문제작 감독은 멕시코의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였고 에스칼란테는 레이가다스의 가까운 영화적 후배이자 혈족이며 레이가다스에게서 영화의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현재로선 미학적 형식을 과장하는 레이가다스보다 사회적 의의를 과장한 에스칼란테가 훨씬 더 위험해 보인다.
에스칼란테가 지나치게 노련하다면 소피아 코폴라는 여전히 너무 천진난만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즐겨본 편이지만(빌 머레이가 주연으로 나오면 나는 작품의 수준과 무관하게 대개 그 영화가 그냥 다 좋아 보이는 최면에 빠진다) <섬웨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도 민망할 정도였다. 신작 <더 블링 링>은 전작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이 영화는 믿기지 않지만 실화에 바탕한다. LA의 비교적 부유층 자녀들이 일명 유명 인사들의 집을 터는 이야기다.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주 간단하기까지 하다. 일단 인터넷을 켜고 멀리 여행이나 일 때문에 집을 비워둔 유명 인사가 누구인지 확인한다. 그게 패리스 힐튼이라고 하자. 그리면 인터넷에 “패리스 힐튼 주소”라고 친다. 인터넷에는 3D 동영상으로 집의 위치와 구조가 상세히 나오고 그럼 그대로 패리스 힐튼의 집을 찾아간다. 의외로 담은 높지 않아 넘기 쉽다. 게다가 현관 앞에 깔린 값비싸 보이는 깔개를 들추면 거기에는 떡하니 키가 놓여 있다. 이제 들어가서 옷 방과 액세서리 방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갖고 싶은 만큼 가져오면 된다. 그래도 쉽게 발각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패리스 힐튼은 셀 수 없이 많은 옷과 보석을 갖고 있으니까 잘 모른다. 이 아이들은 옷과 보석을 판 돈으로 술과 약을 사마시며 논다. 실제로 패리스 힐튼, 올랜도 블룸, 린제이 로한 등의 유명 인사들이 이 어린 도둑들에게 집을 털렸고 이렇게 범죄행각을 일삼은 십대들을 두고 미국의 언론들이 붙인 별명이 ‘더 블링 링’이다.
그들이 경찰에 잡혀갈 때의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소녀는 엄마에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 마 변호사를 불러주세요”라고 외친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을 혼내는 부모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든 유명해진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소피아 코폴라가 짚으려 했던 영화적 호소였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범죄, 사회적 노출증, 무뎌진 도덕. 그런데 사실은 저 아이들이 옷 방을 헤집고 다니며 재미있어할 때 소피아 코폴라도 좀 재미있어 한 건 아닐까 하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거니와 이상하게도 가장 신나는 템포로 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흔을 넘은 소피아 코폴라는 아직도 패리스 힐튼의 옷 방을 터는 소녀들의 신나는 범죄 행각에 은밀히 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소피아 코폴라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했다. <더 블링 링>은 <더 야드> <조디악> <제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등을 통해 더없이 아름답고 진귀한 영상을 선보인,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촬영감독 중 한 사람이었던 해리스 사비데즈의 유작이다.
두개의 가족, 두개의 방법론: 아쉬가르 파라디 <과거>,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두편의 신중한 가족영화가 동시에 등장한 건 문제적이거나 미완인 몇편의 영화들 혹은 평범한 영화들을 막 지날 즈음이었다. 두편의 영화는 그저 가족영화일 뿐 아니라 유사하게도 ‘두 가족이 얽힌 가족영화’다.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베를린영화제 대상을 차지하며 단숨에 세계 영화제 핵심 인물로 떠오른 이란 출신의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과거>는 이혼 수속을 마저 밟기 위해 전남편 아마드가 전 부인 마리의 집으로 찾아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아마드가 돌아와 보니 마리는 이미 그녀의 딸들(아마드도 실은 마리의 두 번째 남편이며 마리의 딸들은 첫 번째 남편의 아이들이다)과 새 남자 사미르와 사미르의 어린 아들과 살고 있다. 하지만 마리의 큰딸은 사미르를 싫어하고, 유독 돌아온 아마드만을 따른다. 아내 마리를 공유한 채로 며칠간 함께 지내게 된 이 복잡한 두 가족에게 문제의 보다 핵심은 사미르의 전 부인이 자살을 시도하여 지금 코마상태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문제는 누구의 어떤 행위가 사미르의 전 부인을 자살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는 죄책감의 게임으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원래 지닌 우울증 때문인가, 사미르와 마리의 불륜을 알았기 때문인가, 마리의 큰딸이 사미르와 마리의 러브레터를 그녀에게 보냈기 때문인가 혹은 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인가. 사태는 간단치가 않다.
또 하나의 두 가족의 문제는 보다 확실하지만 너무 거대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나오는 가족들의 문제다. 주인공 나나미야는 일에 매달려 사는 부유한 직장인이다. 그는 여섯살 된 남자아이 케이타를 예뻐하지만 좀 엄격하게 키우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아이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고 친아들은 6년 전 병원에서 바뀌어 지금 남의 집에서 류세이라는 이름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가족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 집안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나나미야와는 다르게 상대편 아버지는 돈은 잘 벌지 못해도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장난감도 잘 고쳐주며 자애롭다. 어쨌든 서로 아이가 바뀐 그 두 집안의 가족이 서로의 아이들을 데리고 완만한 과정 속에서 다시 아이들을 되바꿔 기르는 공동 프로젝트에 돌입하게 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얼굴을 익히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쉬울 리가 없다.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자면 <과거>의 두 가족이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두 가족이나 갑작스럽게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늘 어느 한 가족의 해석에 따라 주도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두 영화 모두 자기 방식대로의 팽팽한 드라마적 긴장감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어 보인다. 파라디는 전작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도덕의 추’의 게임을 이어나간다. 말하자면 파라디는 하나씩 비밀을 꺼내어 이야기를 셈하고 더하는 식으로 서사의 층위를 덧붙이는 영화, 즉 눈덩이처럼 부풀리는 ‘사건들의 영화’를 만든다. 고레에다는 그와 다른데, 부정할 수 없는 딱 하나의 사건을 등장시킨 다음 그 이후의 과정의 시간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하는 ‘사건 이후의 영화’를 만든다. 그렇게 하여 파라디는 누구의 도덕적 죄라도 함부로 묻는 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고 고레에다는 누구의 삶이라도 함께 사는 것을 부정하는 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두 영화 모두 어느 두 가족의 이야기이기는 하되 파라디는 도덕 심판의 무용론을, 고레에다는 삶의 필연론을 향해 서로 다르게 나아간다.
두 영화 전부 드라마적 힘이 대단한 데다 여기엔 취향의 문제까지 작동할 만한 소지가 있어서 함부로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한마디 하고는 싶다. 어떤 영화를 보면 영화적으로는 출중하지만 그걸 만든 창작자의 삶까지 존중하게 만들진 않는다. 파라디의 영화는 영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의 사람으로서의 삶은 잘 느껴지지 않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더 좋은 감독이 될지 기약할 순 없다 해도 지금 이 창작자가 사람으로서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나의 착각이라 해도 그렇다. 전과 다르게 “나는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고레에다가 말하는 것에 대해 우린 그냥 너그럽게 이해해주어야 한다(72쪽 인터뷰 참조).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다른 위대한 선배 창작자의 이름 아래 마냥 묶여 있기를 바라는 창작자는 많지 않다. 그래도 고레에다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나면 적어도 그가 오즈의 영화를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니, 그가 오즈의 영향력을 외양적으로 거부하건 그렇지 않건 그의 영화가 삶을 비추며 그렇게 잘하고 있으면 그럼 된 거라고 우리는 여겨야 한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는데, <과거>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중 한편을 꼭 고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꼽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자상한 아버지 밑에서 큰 아이 류세이가 장난감을 떨어뜨리거나 뭔가 놀랄 때마다 서툰 영어로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하고 소리치는 것이 다들 귀여워 보였던지 극장을 나오는 기자들은 둘, 셋씩 모여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하며 각자들 숙소로 돌아갔다.
실존했던 인물들로부터: 아르노 데스플레생 <지미 P>, 스티븐 소더버그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 코언 형제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중반까지의 작품들만 놓고 볼 때 이상하게도 아직까지는 부각되는 여우주연상 후보가 없다. 어쩌면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가 상영되고 나면 마리온 코티아르가 강력한 후보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남우주연상 후보 경쟁자들은 벌써부터 치열한 것 같다. 특히 실존 인물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프랑스영화의 동시대를 이끌어온 아르노 데스플레생이 처음으로 만든 영어권 영화 <지미 P>는 2차대전 참전 직후 원인 모를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된 어느 인디언 남자가 주인공이다. 주연배우는 베니치오 델 토로이며 그 인디언의 미국식 이름이 지미 피카르드이다. 마티외 아말릭이 지미의 말을 들어주는 영화 속 상담 의사 데보르 역을 맡고 있는데, 영화는 실제로 의사 데보르가 남긴 <현실과 꿈>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는 전체가 지미의 정신상담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지미의 진술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 말들이 무수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의 과거 가족사와 연애사와 그리고 억압된 환상의 내용들이 서서히 풀려나온다. 데스플레생 특유의 기억과 환상에 관한 관심 그리고 진술의 리듬감이 영화 전체를 아우른 다음 그 진술을 통해 다시 ‘대화 치료’(talking cure)를 통해 실존 인물 지미의 실존했던 상태를 우리 앞에 재현하려 한다. 재미있는 건 지미의 인디언식 이름은 ‘모두가 다 그에 대해 말한다’이지만 이 영화는 결국 거의 지미 혼자 말한다는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는 산뜻하고 자극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은퇴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매번 자주 신작을 내놓고 있는 이 이상한 감독(<사이드 이펙트>가 은퇴작이라고 한 것 같은데 올해 이 영화를 들고 또 왔다)은 <오션스 일레븐> 이후에 산뜻한 ‘단막극 또는 쇼’의 느낌으로 매번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더버그는 <매직 마이크>라는 남성 스트리퍼들의 영화를 만들 때에도 <헤이와이어>라는 여성주인공 액션영화를 만들 때에도 그리고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라는 라스베이거스의 유명 피아니스트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에도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호흡에 휙 하고 지나가는 유사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최근 영화에 대해 받는 느낌은 언제나, ‘깊은 울림을 주진 못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날씬하고 산뜻한 시작과 종결’이다.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도 거기에 속한다. 라스베이거스를 지배한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게이인 리버라치와 그의 애인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양 성애자 스캇의 사랑과 애증을 다룬 영화다.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의 분위기가 의상과 머리 스타일 등으로 전해지고 인간사 사랑의 처음과 끝을 간결하고도 허무하게 짚어낼 줄도 알지만 정작 이 영화가 주목을 모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맷 데이먼이 스캇을 연기하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것은 리버라치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리버라치를 연기하는 이 배우를 처음에 보았을 때 그만 조 페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마이클 더글러스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부주의 때문이라고는 해도 조 페치와 마이클 더글러스를 착각하게 된 것이라면 그건 분장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주연배우의 육체의 쇠락함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자 마이클 더글러스가 이렇게 발가벗겨진 나약한 육체로 영화에 출연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노년의 그는 오랫동안 암과 싸워왔고 한때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가 살아 돌아와 훌렁 벗겨진 대머리에 너덜너덜한 살집을 달고 거울 앞에 서서 자기의 젊은 애인을 쳐다볼 때 우린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그의 실존하는 육체의 쇠약 아니 더 분명히 표현하자면 저 육체의 쪼그라짐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고 만다. 어쩌면 그걸 감추려 들지 않은 용감한 마이클 더글러스가 남우주연상을 가져갈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실존 인물 그것도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상정해놓고도 그를 생전 처음 보는 듣보잡처럼 다루는 데에는 역시 코언 형제가 제격이다. 코언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는 데이브 밴 론크라는, 밥 딜런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1960년대 뉴욕의 포크 뮤지션을 모델로 했다. 밥 딜런은 언젠가 그의 자서전에 밴 론크에 대한 강한 인상을 이렇게 전한 적이 있다. “나는 미드웨스트에 있을 때 밴 론크의 음반을 듣고 그를 훌륭한 가수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악구를 모방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날카로웠다. 돈과 모험을 위해 일하는 용병처럼 노래했고, 그의 노래는 받은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들렸다. 울부짖었다가 속삭이듯 노래할 수도 있고, 블루스에서 발라드로, 발라드에서 블루스로 오고갈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스타일을 사랑했다. 그는 그 도시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밴 론크는 거리의 왕이었고 최고의 지배자였다”(<바람만이 아는 대답> 중에서)라고.
하지만 밴 론크로부터 나온 르윈 데이비스라는 인물은 밥 딜런의 설명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거리의 왕이나 최고의 지배자이기는커녕 영화 속 르윈 데이비스는 지금 뉴욕 음악계의 찬밥 신세이며 애인과는 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쫓겨난 신세고 돈도 없이 일만 꼬여가는 실패자에 불과하다. 어쩌다 보니 이름도 모르는 남의 집 고양이를 안고 뉴욕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렇게 작은 여행을 한번 거치더니 그는 이내 시카고로 더 큰 여행의 동선을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그의 왁자지껄한 여행이 끝나게 된다.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는 평전이 아니라 로드무비다. 그리고 이 로드무비는 르윈 데이비스가 기괴한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적어도 기괴한 인물들, 아니 정확히 묘사하자면 ‘진상’의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서는 코언 형제가 거의 최고봉일 것이다. 르윈 데이비스의 여정은 그 진상들의 도미노이기도 하다. 그러고 나서 이제 영화가 시작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올 때 혹은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될 때 우린 코언 형제가 여전히 자기들의 놀라운 방식으로 인생을 가볍게 또 한번 터치했음을 느끼게 된다. 여행하는 도중에도 일단 기타를 잡고 노래를 시작하면 주인공에게 한곡을 거의 다 부르게 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로드무비 중에서도 음악적 로드무비일 것이다. 그것이 기타를 멘 오디세이의 여정과 같아 보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내 생각에 이 영화와 가장 가까이 있는 코언 형제의 또 다른 영화는, 마찬가지로 로드무비이자 음악영화였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가 아닐까 싶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그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미이케 다카시 <짚의 방패>, 두기봉 <블라인드 디텍티브>
칸 경쟁부문의 영화로 대하기에는 상당히 민망하지만 그래도 스트레이트한 대중영화로서는 대략 가치가 있는 미이케 다카시의 <짚의 방패>를 보고 난 뒤 달려가듯 가서 맨 앞 두 번째로 줄을 선 다 음 기대에 부풀어 보았던 미드나이트 초청작 두기봉의 <블라인드 디텍티브>에 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는 종종 구스 반 산트가 신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두기봉도 신기하다. 저렇게 영화를 잘 만들 줄 아는 창작자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저런 평범한 대중물도 함께 만들어내는지가 신기한 것이다. 그들이 속한 산업적 룰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작품은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의 작품 수준을 인정하는 그 마음 상태가 궁금하다. 말하자면 한국에 알려진 두기봉의 영화는 <흑사회> 시리즈와 <미션> <익사일> <복수> 같은 거의 천의무봉의 수준에 이른 액션영화들 아니 속도와 움직임에 관한 예술영화들이지만 실은 홍콩 관객에게 두기봉은 시간 때우기에 적절한 가벼운 로맨스 또는 코미디의 장르 감독이기도 하다. 유덕화가 맹인 형사로 등장하는 <블라인드 디텍티브>는 <매드 디텍티브>와 몇몇 영화적 장치에서는 관련을 맺지만 실은 전적으로 홍콩식 마구잡이 유머 액션물에 가깝다. 그다지 웃기지 않는 유머가 자주 나오고 유덕화는 내내 입안에 음식을 쑤셔넣거나 토한다. 이런 장르를 만들 때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하지만(그래서 인터뷰를 했다. 81쪽 참조), 이 경우에 두기봉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좀 엉뚱한 샛길로 새려 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덩치 좋은 서양 노인 한 사람이 우리 두 사람 앞으로 당당하게 끼어들었다. 말한 그대로 나는 달려서 맨 앞줄의 두 번째를 차지한 것이니 그를 보고 일단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으로는 ‘저 노인, 미국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를 참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던 차였는데, 그때 내 앞에 있던 중년의 미국 여기자가 그에게 “브라이언”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두기봉의 <블라인드 디텍티브>를 그 브라이언 드 팔마와 같은 극장에서 보았다. 올해도 클레어 드니의 영화가 상영할 때는 코스타 가브라스와 제인 캠피온과 레오스 카락스가 왔고 클로드 란츠만의 영화가 상영할 때는 파스칼 토마가 왔으니 칸에서 감독이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마냥 희귀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또 다른 대명사 브라이언 드 팔마가 자신의 세대이자 무리이자 경쟁자였던 스필버그가 심사위원장으로 온 해에 슬그머니 나타나서는 경쟁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참석자로 특별하게 호명되는 초청 시사도 아닌 자리까지 와서 열심히 영화를 본다는 게 좀 특별해 보인 건 사실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두 가지 잡생각이 지나갔다. 첫 번째, 70대에 접어든 감독이 여전히 저렇게 열심히 남의 영화를 보러 다닌다는 건 그에게 좋은 일일까, 안 좋은 일일까. 물론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쓸모없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팜므파탈>이 국내에 개봉하던 2004년 무렵 그에게 서면 질문지를 보낼 때 영화사 직원이 내게 전해주었던 절대 주의사항 한 가지가 있었다. “질문 내용 중 절대로 히치콕의 이름을 언급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인터뷰를 망칠 수도 있어요.” 그 당시의 드 팔마는 히치콕과의 혈연관계를 묻는 질문에 특히 신경질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럴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 히치콕을 벗어나려 할 때 개념적 영화를 만들며 긴장을 잃곤 한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이 걸작이라고 칭하는 <리댁티드>가 그런 영화라고 생각하며 보았다. 그나저나 드 팔마는 <블라인드 디텍티브>를 어떤 기분으로 보았을까. 그도 좀 당황하진 않았을까.
걸작이 되지 못한 괴작: 지아장커 <천주정>
이제 마지막으로 올해 중반부까지 본 영화 중 내가 생각하는 괴작과 걸작 한편을 차례대로 말하려고 한다. 먼저 괴작에 관하여. 올해 영화제에 오며 가장 기대한 작품 하나가 있다. 당연하게도 지아장커의 작품이다. 놀라겠지만 이 작품이 괴작이다. 이 말을 듣고 당신이 놀란 것처럼 나도 놀란 이유는, 이 영화가 걸작이 아니라 괴작이라는 데 있다. <천주정>이라고 제목만 바뀌었을 뿐 청조를 배경으로 한 무협영화라고 알려졌던 <재청조>의 내용이 펼쳐질 거라고 예상하고 왔는데 <천주정>은 <재청조>와 무관한 다른 영화일 뿐 아니라 청조가 아닌 동세대 중국에 대한 초상이다.
첫 장면부터가 아주 이상하다. 대강 모자를 걸친 한 남자가 허름한 오토바이를 타고 깊은 계곡 아래 나 있는 도로를 달리고 있다. 그때 난데없이 세 젊은 녀석들이 그의 길을 막으며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자 남자는 그들을 우습다는 듯 쳐다본 뒤에 품 안에서 총을 꺼내 단숨에 그들을 처리해버린다. 그리고 묵묵히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이 장면은 기시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니라 이런 장면을 우리가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어두운 산속, 한 남자가 계곡을 지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어설픈 산적 무뢰배들이 남자에게 다가와 가진 것을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럼 남자는, 지금 자리를 떠나면 내가 오히려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산적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검을 꺼내어 그들을 베어내고 가던 길을 묵묵히 또 간다. 이건 무협영화의 하위 서사다. 지아장커의 <천주정>은 바로 그렇게 시작하며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도 동시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하나의 무협영화다.
<천주정>에는 네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여 서로의 자리에서 폭력과 연루된 사건을 벌이고 혹은 서로를 은연중 스치게 된다. 첫 번째 인물은 광산의 노동자다. 이 남자는 마을의 우두머리와 회사의 사장에게 민원을 넣었으나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러자 기어이 총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잔인하게 살 인을 저지른다. 두 번째 인물은 아까 그 산적들을 처단한 남자다. 그는 청부살인업자인 것 같다. <스틸 라이프>의 첫 장면과 유사한 장면으로 시작하고 나면 이 남자는 배에서 내려 어머니의 70살 생일에 맞춰 오랜만에 고향에 나타난다. 그러더니 이내 가족들과의 짧은 해후를 마치고 또 자기의 길을 떠나 범죄 행각을 벌인다. 세 번째 인물은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리셉셔니스트다. 지아장커의 여주인공으로 익숙한 자오타오가 그 역을 맡고 있다. 그녀는 어떤 유부남과 연인 관계다. 남자는 그녀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여자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뒤 마사지숍에는 손님 둘이 나타나 그녀에게 성접대를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다(<소무>의 주인공인 왕홍웨이가 그중 한명이다). 그녀는 자신은 마사지걸이 아니라 리셉셔니스트라며 거부하지만 상황은 극에 치닫고 여자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남자 둘을 처단한다. 마치 무협극의 여협객처럼. 네 번째 인물은 젊은 남자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이리저리 직장을 전전한다. 좋아하는 여자도 만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지아장커는 자신이 접하고 충격에 빠진 지금 중국의 동시다발적 ‘폭력’ 양상을 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 폭력의 양상을 영화적 언어로 말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마침내 무협영화의 언어를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무협영화의 반복되는 주제가 바로 거친 사회적 환경 안에서 개인이 처하는 억압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의 말 그대로 이 영화에는 사람이 때리고 죽고 할 때 무협영화의 그것처럼 인물이 날아다니고 피가 튀긴다. 네개의 일화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자오타오가 주인공인 부분이다. 자오타오의 일화가 이 영화의 시초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 제목 <A Touch of Sin>은 호금전의 <협녀, A Touch of Zen>에서 가져온 것이다. ‘Zen’이 ‘Sin’으로 바뀐 채로. 그래서인지 자오타오가 여협객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하고 저 거대한 협곡을 걸어가는 초현실적인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관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작에 관하여 어떤 우려를 덧붙이려 한다. 실은 그 우려 때문에 이 영화를 끝내 걸작이라 칭하지 못하고 괴작이라 부르고 있다. 현실적 문제를 영화적 언어로 말하려 할 때 지아장커가 선택한 건 무협영화라는 장르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아장커는 이미 <스틸 라이프>를 만들 때에도 무협영화의 구조를 가져온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가 <스틸 라이프> 때 가져온 것이 ‘구조’라는 점이다. <천주정>에서는 무협영화의 구조가 아니라 무협영화의 ‘액션’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천주정>은 현실적 문제에 무협 장르적인 액션이 가미되는 것인데, 그와 같은 액션이 반복해서 등장할 때마다 그 액션의 생소함 때문만 아니라 오히려 그 액션이 지향하고 있는 어떤 우의성이 순간마다 두드러진다는 점이 나의 우려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지아장커는 의의 또는 우의와 영화적 표현법 사이의 줄다리기를 천재적으로 해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의의와 우의에 대한 강박이 다소 지나쳐 영화 전체가 경직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초반부에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혹사하는 어떤 남자가 이유없이 등장하는데 몇 장면이 지나면 채찍으로 그 말을 때리듯이 돈다발로 자오타오를 때리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식이다.
그런 장면들이 지아장커의 영화를 위대하게 만든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아장커의 영화가 위대한 건 흔한 말로 그 안에 공기가 담겨서다. <천주정>은 뛰어난 영화이지만 동시에 그 공기를 해치는 의의에 대한 강박이 자주 엿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올해 칸의 걸작이라고 부르는 몇몇 다른 이들과 달리 결국 괴작이라 부른다. 지아장커 영화 중에서 지금과 유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위대한 다음 작품 <스틸 라이프>로 돌아와 있었다. 지아장커는 영화제가 끝나는 대로 <재청조>에 돌입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다시 과욕의 괴작을 지나 진정한 걸작으로 우릴 찾으려는 것일까.
예측 불가능한 걸작: 알랭 기로디 <호수의 이방인>
일단의 기대는 했지만 그 기대를 상상 이상으로 뛰어넘은 걸작을 내놓은 건 알랭 기로디다. 그의 영화 <호수의 이방인>, 아직까지도 나는 외계에서 날아온 것 같은 이 유기체의 영화에 관하여 흥분만 하고 있을 뿐 뭐라 딱히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지경이다. 이 영화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이러는가 싶다가도 기적같이 그 유기적 흐름을 관객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모든 걸작의 공유점이라는 걸 알 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난감함을 감수하고 단지 짧은 생각을 전할 수밖에 없겠다.
이야기로는 그다지 복잡할 게 없다. 여기는 게이 들이 모이는 한적한 어느 호수, 게이들의 파라다이스다. 차를 몰고 누군가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주는 부감숏. 그리고 사람 하나가 호수가로 등장하면 말 그대로 그를 향해서 일제히 쏟아져 ‘레이더’를 돌리는 다른 이들의 시점숏. 그렇게 영화가 시작하면 우리의 주인공 프랑크는 오늘도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며 파트너를 찾는다. 대개는 못생기거나 늙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프랑크는 그냥 저 멀리 앉아 있는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그래도 말상대로는 제법 재미있는 중년의 남자 앙리와 말상대나 하고 일광욕이나 하다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사실은 이 뚱뚱보 남자의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열 영화를 넘어설 만하다). 그러다 멋진 콧수염에 몸매도 근사한 미셸을 만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임자가 있다. 어느 밤, 프랑크는 저녁 나절에 호수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콧수염의 멋진 남자 미셸이 그의 파트너를 익사시켜 죽이는 살해장면이다. 프랑크는 공포에 몸을 떤다.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본론이다. 미셸이 프랑크에게 관심을 보이자 프랑크는 그가 살인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멀리하지 못하고 끌리게 된다. 죽음에의 두려움보다 육체에의 욕망이 그를 그렇게 이끈다. 그리고 격렬한 정사와 애정의 감정으로 둘의 관계는 뜨거워지지만 공포 역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마침내 다른 살인이 발생하고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쪽으로 어느새 와 있다.
<호수의 이방인>은 한 장소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숏의 쓰임도 일정하고 아주 단순한 반복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디로 흐를지 예측 불가능이다. 인물들의 격정적인 정사와 호숫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결들이라는 단순한 조합 몇개가 만들어낸 어떤 무드는 처음에는 아주 우스꽝스러워 보이더니 어느새 강력한 스릴로 뒤바뀌어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감독 알랭 기로디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화적 리듬감이다. <호수의 이방인>은 공포와 매혹에 대해 묘사하는 대담하고도 흥분되는 걸작이다.
그중에서도 라스트 신은 압권이다. 미셸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숨는 와중에도 그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는 프랑크의 행동은 죽음에의 공포와 육체에의 욕망을 한순간에 겹쳐놓는 명장면이다. 알랭 기로디는 애초에 조르주 바타유의 생각에 기초하여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에로티즘과 죽음이 이 영화의 바탕에 흐르는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개념을 위반하고 상위하는 분위기, 분위기로서의 죽음과 욕망이 이 영화를 시종일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무서운 그로테스크 영화의 걸작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경쟁부문이 아닌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보낸 것이 올해 칸영화제가 범한 가장 큰 실수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세계, 영화
어느새 또 아침이 되었고 결론 대신 짧은 사족을 쓴다. 창문 앞에 서니 오늘도 우리 숙소 건너편 아담한 호텔에 묵는 프랑스 여배우들은 우리는 자기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기들만 우리를 신경 쓰며 커튼을 닫는다. 그 여배우들의 스타일리스트쯤 되는 모양인데 장영엽 기자가 로버트 패틴슨을 닮았다고 우기는 프랑스 젊은이는 적어도 처음 여기 왔을 당시에는 나와 모양새가 현격히 달랐지만 (내 생각이지만…) 지금은 거의 나의 몰골에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었고 이제 절반 조금 못 미치는 영화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제가 중반을 넘은 것이다.
오늘은 라브 디아즈의 새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와 버금가는 기대작들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다. 난해하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어서 조금 부담이 되지만 어쨌든 기대되는 짐 자무시의 <온니 러버스 레프트 얼라이브>가 있다. 그리고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할아버지 세대로 들어가 만들어낸 영화 <이민자>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영화들과 이미 보았으나 이번 차례에 말하지 못한 몇개의 작품들 몇편을 더하여 다음 차례를 꾸릴까 한다. 어제는 꿈을 꾸었다.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 아무도 없는 꿈. 하지만 지금 극장에 가면 거기에는 다시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세계, 영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