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잘 구상한’ 개념이다
2013-08-13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설국열차> 컨셉아티스트 3인방이 안내하는 컨셉아트의 세계
장희철, 지효근, 조민수(맨 왼쪽부터).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길은 여러 갈래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택한다 해도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과정이 있으니 바로 머릿속 상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구체적인 이미지는 관념을 지나 이미 물질적인 힘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컨셉아트는 허구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최전선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이제는 영화 제작에 없어서는 안될 작업. 손끝에서 새로운 세상을 빚어내는 컨셉아트의 세계. 기꺼이 안내를 자청해온 <설국열차>의 컨셉아티스트 3인방을 만나보자.

-한 작품에 컨셉아티스트 3명이 참여하는 건 한국 영화계에서는 흔한 일은 아니다.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된 건가.

=장희철_내가 제일 처음 <설국열차>에 참여했고 이후 작업 분량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손이 더 필요해져 조민수씨, 지효근씨가 차례차례 합류했다. 조민수씨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함께 작업해서 둘 다 류성희 미술감독과 연이 있었고, 지효근씨도 서로 잘 알던 사이라 필요에 의해 차출(?)당했다. 결국 제일 마지막까지 붙잡혀 일을 한 건 효근씨다. (웃음)

-세명 모두 본업은 따로 있나.

=조민수_내가 알기론 아직 한국 영화계에서 컨셉아티스트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컨셉아티스트가 필요한 영화도 그리 많지 않고 설사 있다 해도 대개는 미술이나 CG팀 등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지효근_없다고 단언하긴 좀 위험하고 드물다고 해두자. (웃음) 풍문으로 프리랜서로 이쪽 일만 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 컨셉아트에 참여했는데 조명이나 장면 연출 등 배울 것도 많았다. 충분한 매력과 성취감이 있는 분야인 것 같다.

장희철_컨셉아트가 필요한 장르영화가 1년에 3~4편씩 만들어져 이 일만 하면서도 생계가 유지된다면 이것만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프로젝트 기간도 길고 횟수도 그리 많지 않아서 대부분 겸직이다. 영화 이외 영상 분야나 게임 디자인쪽에서 주로 활동한다.

-컨셉아트라는 개념이 아직 대중에겐 낯설다.

=조민수_쉽게 말하자면 세상에 없는 ‘개념’을 세상에 있는 것으로 ‘이미지화’하는 작업이다. 드라마보다는 SF, 판타지처럼 현실에는 없는 상황을 그려내는 거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인 스토리보드나 콘티와는 조금 다르다. <아이언맨> 같은 영화 속 메커닉 디자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장르적으로 컨셉아트가 요구되는 영화가 많지 않아 본격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직 드물다. 한국에서는 아마 <괴물> 때부터 크리처 디자인 등이 시도되지 않았나 싶다.

-컨셉아트 일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지.

=장희철_말했다시피 영화쪽에서 컨셉아트를 필요로 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괴물>부터 시작했고, 민수씨는 <올드보이>, 효근씨의 경우 영화쪽은 <설국열차>가 처음이다. 다른 분야의 컨셉아트를 비롯해 디자인 업계까지 포함해서 넓게 보면 민수씨가 셋 중 이쪽 분야에 가장 오래 몸담았다. 영상미술부터 뮤직비디오 컨셉, 3D까지 대략 20년 정도를 업계에서 일했다. 나는 17년 정도, 효근씨는 10년이 좀 넘었다.

조민수_유승준 뮤직비디오의 CG나 조PD의 <마이 스타일> 컨셉아트 등을 했었다. 여러 일을 해봤지만 컨셉아트가 내 몸에 제일 맞는 것 같다. 상상을 시각화하는 창작이란 점에서 희열을 느낀다.

-컨셉아티스트의 어떤 점이 특별히 매력적이었나.

=조민수_컨셉아트는 과정이 중요한 작업이다. 어떻게 그릴까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까가 중요하다. 그냥 멋있는 디자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확한 개념을 제시하는 게 작업의 핵심이고 따라서 우리가 파는 것 역시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잘 구상한’ 개념이다. 때론 스케치 한장 달랑 그릴 때도 있지만 그것 또한 수백장의 작업 이후에 나온 고민의 결과물이다. 요약하자면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크리에이터랄까.

-영화 공정상 컨셉아트는 언제부터 들어가는 건가.

=장희철_감독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처음부터 촬영 직전까지로 보면 된다. 대개는 시나리오가 나온 이후 시작하지만 필요에 따라 트리트먼트나 기획회의 과정에서도 들어갈 수 있다. 시나리오가 나오고 나서 배우들에게 전달될 때 그림들이 삽입되는 경우도 있다.

조민수_미술팀의 작업이 화면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메인 프로덕션 과정이라면 컨셉아트는 영화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이다. 감독, 작가와의 끊임없는 피드백이 필수다.

지효근_<설국열차>의 경우엔 합류 시점이 서로 달랐지만 다 합하면 대략 2년 정도 걸렸다.

-뭉뚱그려 ‘컨셉아트’라고 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작업과정은 어떻게 나뉘나.

=조민수_아트디자인 작업을 열거하자면 환경설정 숏, 키 컷, 머니 숏, 그리고 컨셉아트가 있다. 환경설정 숏은 말 그대로 공간을 설명하는 설정 그림이고, 키 컷(key cut)이란 감독이 고른 한컷이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별하여 영화의 핵심과 컨셉을 바탕으로 축약해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머니 숏(money short)은 마케팅적으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에 관한 그림인데, 한국에서는 많이 쓰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모두를 컨셉아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컨셉아트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개념의 방향성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처 디자인, 이번 영화에서는 ‘설국열차’라는 상상의 산물을 현실로 그려내는 작업이었다.

-영화 컨셉아트와 다른 분야, 예를 들면 게임 컨셉아트는 많이 다른가.

=지효근_대상의 개념을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목적이 다르니까 접근법도 다르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 플레이’이다 보니 화면 이외의 이펙트, 인터페이스 같은 요소들도 컨셉아트의 일부분이다. 반면 영화 컨셉아트는 영화에 대한 레퍼런스, 조명이나 촬영에 대한 지식 등이 요구된다. 자동차를 만드는 공정과 오토바이를 만드는 공정이 다른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창작의 즐거움도 있지만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작업은 아니다. 각자 컨셉아티스트로서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 보람을 느끼는가.

=장희철_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잘 표현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감독의 머릿속 세계를 어떻게 그림으로 옮길까를 먼저 생각한다. 감독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그림이 선택될 때 보람을 느낀다.

조민수_내겐 영화적 의미가 첫 번째다. 감독이 생각하는 주제와 철학도 있겠지만 내가 해석한 영화적 의미와 철학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 위에 감독의 철학을 더하여 결과물을 완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의도대로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지효근_감독이 요구하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그 안에서 내 생각을 녹여내려고 한다. <설국열차>를 예로 들자면 열차의 세계 안에서의 완결성을 확보해서 어떻게 하면 설득력있게 만들 수 있을까를 내내 고민했었다. 첫 작품이었던 만큼 배울 것도 많았고 조금씩 학습의 결과가 나올 때 기뻤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학습의 결과로 감독님이 그림을 선택해주었을 때?(웃음)

조민수_감독님이 좋아하고 그림 골라주면 당연히 좋지. (웃음)

장희철_근데 저는 제가 마음에 들어도 감독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우울합니다. (다같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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