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디아의 바쁜 하루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인디아에게 하룻동안 벌어진다. 집으로 가려고 학교를 나오면 재규어를 몰고 온 삼촌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날 맥게릭 부인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에 삼촌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돌아서서 뒷문으로 나간다. 그러다 불량배 패거리들한테 걸리고, 연필로 피츠의 주먹을 찌른다. 그런 일들을 겪고 집으로 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전날 밤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삼촌이 다가오고, 피아노 합주를 한다. 침대에서 낮잠을 자다가 깨서 삼촌이 엄마와 춤을 추며 키스하는 것을 엿보고, 밖으로 나가 윕을 유혹하고, 숲에서 데이트하다가 삼촌과 함께 윕을 죽인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엄마의 머리를 빗겨준다. 이게 모두 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영화 전체 상영시간의 20%를 할애한, 인디아의 일생과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하루다.
01 인디아의 옆모습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인디아의 옆모습을 주로 활용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호기심 많은 소녀가 항상 무언가를 엿보고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모습을 관객이 잘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정면숏보다는 측면숏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아에게도 옆모습 클로즈업을 많이 쓸 테니 옆모습을 잘 관리하라고 얘기했었다. 어떻게 옆모습을 관리하는 건진 나도 잘 모르지만. 다행히 미아가 정면보다 옆모습이 훨씬 예쁜 배우라 다행이었다.
02~03 연필 깎는 장면 피츠의 주먹을 찔렀던 연필이다. 연필에 묻은 피를 깎아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사운드는 지금 생각하면 좀 과했지 싶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기분 나쁜 소리인데, 이 장면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적당히 기분 나빠야 하는데 너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주얼은, 다음에 뭐가 나올지 예상하고 보면 어떤 끔찍한 장면이 나와도 아무렇지 않은데, 사운드는 예상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 같다. 괴로운 소리는 알고 들어도 괴롭다. 또 이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폭력의 흔적을 지워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인디아는 아직 폭력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깎아내고 부인하려 한다. 곧이어 볼 장면에선, 점차 인디아가 폭력에 매료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서도 노랑과 빨강의 색채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04~06 연필을 들어올리는 인디아의 옆모습 방금 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복기하는 행동이다. 손에 닿았던 느낌, 그 느낌을 되살려본다. 난생처음 해본 폭력 행위가 나를 흥분시키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카메라 포커스가 얼굴에서 연필로 오고, 눈이 위치한 곳에 연필심이 자리하게 된다. 본다는 행위가 가진 날카로움, 그것의 공격성을 시각화했다.
07 필통 뚜껑 어떤 사물의 뚜껑을 열고 닫는 행위를 매치했다. 필통의 뚜껑을 여는 행위가, 인디아의 머릿속에선 전날 밤 지하실에서 냉동고 뚜껑을 열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08 냉동고 여기서 인디아는 삼촌이 어떤 존재인지 추리해낸다. 삼촌이 아이스크림을 사왔고, 인디아에게 아이스크림을 갖다놓으라고 시켰다. 당시엔 아무것도 발견 못했지만, 삼촌은 의미심장하게 ‘그 밑에 추웠니?’라고 말했다. 삼촌의 그런 일련의 행동과 말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었는지 인디아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찰리는 인디아가 시체를 발견하게끔 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찰리는 인디아의 애인이라기보다 인디아의 멘토에 가깝다. 멘토로서 학습의 첫 단계였던 거다.
09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인디아 냉동고에서 올라오는 김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인디아 주변으로 올라온다. 시각적으로도 그렇고 사운드에 의해서도 그렇고 과거와 현재 두개의 시제가 연결된다.
10~12 시체를 발견하는 인디아 여기서 인디아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시체를 발견하고 보통 사람들처럼 비명을 지르거나 달아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하다못해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았던가. 왜 거기서 달아나기는커녕 더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관찰했던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까지 인디아는 시체를 바라본다. 폭력, 사악한 행위의 결과물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는 심정을 반추해본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13 연필이 가지런히 놓인 필통 인디아를 자폐아로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면을 조금 부여하고 싶었다. 잘 깎인 연필이 가지런하게 키 순서대로 필통에 놓여 있다. 또한 인디아의 방에만 패턴무늬 벽지가 있고, 인디아가 읽는 책은 <파이의 역사>고, 미술실에서 그리는 그림도 꽃병과 꽃이 아닌 꽃병 안의 작은 패턴이다. 반복과 규칙과 대칭에 대한 인디아의 집착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14-16 피아노 치는 인디아 삼촌에 대한 생각이 인디아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찰리는 정원을 가꾸면서 디딤돌 놓는 일을 하고 있는데, 디딤돌을 밟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 ‘너네집 정원 정말 최고야. 흙이 너무 부드러워. 땅파기에 너무 좋아.’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 알게 된다. 찰리가 돌을 놓고 쾅 밟는 동작과 피아노의 음을 매치시켰다.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끊임없이 교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