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전기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를 떠올렸을 것이다. 잡스와 마찬가지로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IT 천재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설립 과정을 조명한 이 영화는, 키보드를 두들기며 뛰어난 컴퓨터 실력을 자랑하는 모습을 굳이 부각하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IT 영웅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하지만 8월29일 개봉을 앞둔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잡스>를 기다리며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잔상은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핀처의 영화가 마크 저커버그라는 실존 인물을 중심에 두면서도 결국은 거대 기업의 탄생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의 공방전을 다룬 작품이었다면, <잡스>는 온전히 스티브 잡스라는 21세기적 아이콘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애플>이나 <맥월드>, <다르게 생각하기>(애플사의 기조)가 아닌, 스티브 잡스의 이름을 우직하게 반영한 <잡스>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잡스에 대한 영화인가 애플에 대한 영화인가
<잡스>는 리드대학교 재학 시절의 20대 청년 스티브 잡스의 모습에서 시작해 2001년 애플의 CEO가 된 40대의 잡스가 아이팟을 런칭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목격할 수 있는 잡스(애시튼 커처)의 가장 큰 성취는 그가 애플사 타운 홀의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 아이팟을 소개하며 관중의 열광적인 박수 갈채를 받는 첫 장면의 순간이다. 다시 말해 <잡스>는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 어지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전성시대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창고에서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친구들과 애플Ⅰ을 만들고, 자신감과 말솜씨만으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의 투자를 따내며, 회사의 내외부로부터 받는 압력 속에서 애플 제품의 독창성과 완벽주의를 유지하려 하는 잡스의 커리어 초기 20년의 모습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의도다. 다시 말해 <잡스>는 스티브 잡스라는 완성된 영웅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영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성장영화다.
파란만장했던 잡스의 애플 설립 20여년의 여정 중에서 <잡스>의 제작진이 어떤 에피소드에 집중했는지에 주목할 만하다. 스티브 잡스의 공식 자서전 <스티브 잡스>나 90년대 제작된 영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실리콘밸리 전쟁>(자세한 내용은 70쪽 참조)을 본 관객이라면 잡스의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몇몇 에피소드가 이 영화엔 누락됐다는 점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70년대 말 제록스사를 방문해 애플 컴퓨터 성공의 중요한 원천이 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처음 발견하는 순간이나 애플의 공동 설립자이자 엔지니어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전세계 무료 통화가 가능한 블루박스를 만드는 장면, 애플의 기술을 베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빌 게이츠와 분노로 대면하는 장면(빌 게이츠는 이 영화에서 잡스가 통화하는 수화기 너머의 존재로 잠시 언급된다)이 <잡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게 묻더라. ‘<잡스>는 애플에 관한 영화인가요, 아니 면 스티브 잡스에 관한 영화인가요?’라고.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건 한 남자가 그가 만든 회사가 되고, 그 회사가 한 남자가 되는 이야기라고. 헨리 포드와 자동차 회사 포드가 그랬듯, 잡스와 애플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조슈아 마이클 스턴은 잡스가 애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는 과감하게 배제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잡스>의 어떤 대목을 보면 극영화인데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온종일 작은 부품들을 조립하고, 끼워맞추고, 녹이는 무심한 표정의 장인들. 그런 그들에게 잡스는 끊임없이 완벽한 공정을 지시한다. <잡스>가 보여주는 ‘맥월드’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통해 늘 제시해온 활기 넘치고 매력적인 엔터테인먼트 왕국이 아니다. 그곳은 오히려 한치의 결함도 없이 완벽하고 강박적으로 아름다워야 하는, 애플 제품의 디자인을 닮은 차가운 세계다.
매 순간 스티브 잡스의 선택과 결단에 주목하는 이 영화에선 애시튼 커처가 그려내는 잡스의 모습이 중요하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하는 잡스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집요하고 냉철하게 원하는 바를 밀어붙이다가도 어느 한순간 수가 틀리면 폭발해버리는 시한폭탄 같은 잡스의 모습을 애시튼 커처는 꽤 만족스럽게 소화해낸다(커처의 연기에 대한 더 자세한 평가는 이어지는 페이지 참조).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찾아온 여자친구에게 광기를 표출하는 대목이나, 컴퓨터 폰트의 디자인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직원에게 “이미 난 당신을 해고했으니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며 윽박지르는 장면은 변덕스럽고 때로는 잔혹한 인간 스티브 잡스의 면모를 보여준다.
잡스 외의 모든 것이 건조하고 희미한
그런데 잡스를 중심으로 모든 영화적 인물과 사건들이 공전하다보니 생기는 문제도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잡스와 더불어 애플의 일부를 차지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약하다. <잡스>는 기본적으로 성장영화의 플롯을 차용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영웅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작품이다. 잡스가 애플을 운영하며 마주하게 되는 온갖 시련과 그런 상황을 딛고 일어서게 해주는 조력자들, 또는 내부의 적들이 결국 이 영화의 드라마를 길어올리는 역할을 할 텐데, 조슈아 마이클 스턴의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극에 깊이 몰입하게 할 만큼 능숙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영화는 스티브 잡스의 어떤 시절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를 향해 자리를 옮길 때 종종 지나치게 도약한다는 느낌을 준다. 일례로 애플의 이사진으로부터 해고당한 잡스를 조명하던 영화는 다음 순간 그와 대립하던 이사진의 사임을 알리고, 애플로의 복귀를 암시하는 장면을 곧 비춘다.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 장면의 정서를 다음 장면에서 급하게 전환해버리는 연출 스타일 때문에 <잡스>는 한층 건조한 톤의 작품이 되었다. 더불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잡스의 옛 동료 스티브 워즈니악은 “리더로서의 스티브 잡스에 대해 이 영화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했는데, 애시튼 커처가 그의 반응에 대해 “애플에 대한 워즈니악의 업적을 <잡스>가 충분히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냐고 맞받아친 바 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스티브 잡스 역을 맡은 애시튼 커처가 인정할 정도로 <잡스>는 잡스와 함께 애플 왕국을 건설했던 수많은 공신들의 유산을 조명하는 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8월 미국 극장가의 가장 뜨거운 영화 중 한편이다. <할리우드 리포터>를 비롯한 다수 매체들은 영화가 리더 스티브 잡스의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한 점, 극적인 순간이 부재한다는 점을 비판하면서도 애시튼 커처의 잡스 연기에 대해서는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구글을 비롯한 포털 사이트에는 젊은 시절의 잡스와 애시튼 커처가 분한 잡스의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들이 넘쳐난다. <잡스>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마음먹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정돈된 필치로 담겨 있다. 의외의 모습을 목도하기는 힘들더라도, <잡스>에 대한 관객의 기대에는 영화를 통해 다시금 스티브 잡스를 추억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을 거다. 여전히 그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고, 애플은 곧 스티브 잡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