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다.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뒤 디즈니-픽사와 이에 대항하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으로 양분되어왔던 북미애니메이션 업계는 현재 한바탕 지각변동 중이다. 2010년 무렵부터 소니픽처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등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스튜디오들이 연달아 작품을 흥행시키며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로 압축된 2강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일루미네이션의 <슈퍼배드2>는 아직 국내 개봉도 하지 않은 시점에 벌써 7억5천만달러의 성적을 기록해 단연 올해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떠올랐다.
반면 디즈니-픽사는 <주먹왕 랄프>(2012)가 나름 선전하며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엔 미흡했고, 2012년 <메리다와 마법의 숲> 역시 과거 픽사 애니메이션들의 흥행에 비해 파괴력이 모자란 감이 있다. 그나마 올 하반기를 공략 중인 <몬스터 대학교>가 현재 6억3천만달러를 넘어서며 그간 부진했던 명가의 자존심을 살렸다. 드림웍스의 상황은 더욱 암울한데 2012년 <가디언즈>의 흥행 참패로 대량해고 사태까지 맞이했던 드림웍스는 올해 <크루즈 패밀리>로 다소 기세를 회복하는 듯 했으나(북미 1억8천만달러, 전세계 5억8천만달러) 뒤이은 <터보>의 참패로(전세계 1억3천만달러) 다시 한번 나락으로 빠져드는 모양새다.
경계가 사라졌다
사실 블루스카이를 비롯한 중소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약진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의 경우 2002년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를 통해 한차례 파란을 일으키며 정체된 업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역시 2010년 창립 작품인 <슈퍼배드>의 놀라운 흥행(전세계 5억4천만 달러)과 함께 화려하게 출발한 바 있다. 둘 다 제작규모 대비 믿기 힘든 성과를 거두며 전통의 강자들을 위협할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그럼에도 이같은 약진이 최근에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이들의 성장과 함께 디즈니-픽사, 드림웍스로 대표되던 부동의 성채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감독의 창작물로 기억되는 영화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집단 창작물로 간주된다. 개별 작품의 완성도보다 창작 집단의 연속성과 숙련도가 중요하며 이는 곧 제작사의 브랜드로 이어지는 구조다. 1990년대 중반 CG애니메이션의 출발과 함께 몇 십년을 이어왔던 디즈니 독주 체제가 막을 내리고, 3D애니메이션의 픽사와 안티디즈니의 드림웍스가 등장하며 3강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로 대표되는 각 스튜디오들의 색다른 분위기는 장편애니메이션의 중흥기를 불러왔다.
하지만 중소 스튜디오 작품들의 연이은 흥행과 더불어 디즈니-픽사,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부진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정확히는 한참 전부터 진행되어오던 변화의 징후가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북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변화는 거대 스튜디오들의 개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까지는 디즈니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픽사스러운 분위기, 드림웍스다운 정체성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2∼3년 사이 디즈니-픽사, 드림웍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쌓아왔던 각자의 정체성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흥행 성적마저 주춤하면서 일방적인 독주 없이 평준화된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비단 흥행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작품의 질적인 면, 나아가 브랜드 가치까지 평준화되고 있단 사실이다. 그간 픽사의 작품에서 보아왔던 창의성이나 드림웍스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던 반골정신을 볼 수 없는 지금, 북미 애니메이션 시장은 개별 작품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매 순간 평가받고 있다. 관객은 더이상 픽사, 드림웍스, 블루스카이, 일루미네이션의 작품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니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브랜드의 높은 장벽으로 인해 도전조차 힘들었던 예전에 비해 작품만 괜찮으면 얼마든지 흥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CG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생태계
역사는 하룻밤 사이 완성되지 않는다. 변화의 일차적인 원인은 픽사와 드림웍스의 부진에서 비롯됐지만 후발주자들이 치고 올라올 수 있었던 건 CG애니메이션 중심의 시장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애니메이션 산업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다. 선행 브랜드의 높은 장벽은 물론이고 장기간 축척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동안 각 스튜디오들, 특히 디즈니는 인력자원을 철저히 통제하며 자신들의 노하우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셸애니메이션 시장을 선도한 디즈니가 그토록 장기간 디즈니 왕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이같은 폐쇄적인 시장 환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CG애니메이션으로 패러다임이 넘어오면서 모든 스튜디오가 기술적으로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시작하는 환경이 이루어졌다. 픽사와 드림웍스도 이를 발판으로 도약했다.
최근 후발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스튜디오들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는 1990년대 중반부터 3D, CG 전문 업체로 장기간 축적된 자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는 이십세기 폭스의 애니메이션 부서를 전담했던 크리스 멜레단드리가 설립한 만큼 그 부분의 노하우를 자연스레 이어받을 수 있었다(크리스 멜레단드리는 1998년 이십세기 폭스가 블루스카이를 인수하도록 추진한 장본인이다). 요컨대 10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성장 중인 CG애니메이션은 기술간의 장벽이 그리 높지 않다. 얼마든지 새로운 기술 축적이 가능하고 업계간 인력 이동도 과거에 비해 자유롭다. 이것은 일대 혁신이다.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는 숙련된 애니메이터에 의해 좌우되고 결정되기 마련인데 애니메이터들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질적 평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재밌는 건 최근 부진으로 많은 인력을 방출하며 구조조정을 겪은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의 인력들이 신생 스튜디오로 다수 유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생 스튜디오는 안정된 작품을 제작해 흥행에 성공하고 반대로 거대 스튜디오는 계속 부진에 시달린다. 인력 이동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느새 전통적인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흐름은 여전히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의 손아귀에 있다. 후발주자들은 이제 갓 한두 작품을 성공시켰을뿐 이미 안정적으로 자리잡거나 준비 중인 작품 수에서 월등한 차이가 난다. 흥행 규모도 아직은 디즈니-픽사, 드림웍스쪽이 높다. 그러나 덩치가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폐쇄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디즈니-픽사, 드림웍스의 평균 제작비가 1억5천만~2억달러인 데 비해 후발주자들의 경우 각 제작단계를 회사 안에 일방적으로 귀속시키지 않고 프로젝트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해나가는 유연성을 발휘하며 평균 8천만달러 선에서 작품을 완성한다. 반면 수익은 평균 4억달러 내외로 거대 스튜디오와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아직까진 크게 실패한 작품이 거의 없는 만큼 무궁무진한 성장 가능성이 있다. 차곡차곡 작품을 더해가며 관객에게 이제 막 각자의 색깔을 각인시키기 시작한 제3의 스튜디오들. 진짜 도약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