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배드>(2010), <바니 버디>(2011), <로렉스>(2012), 그리고 한국에서도 곧 개봉할 <슈퍼배드2>(2013). 이 네편의 애니메이션은 2010년부터 올해까지 전부 한 제작사가 만든 작품들이다. 이 목록만 보아도 5년에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이 회사가 꽤 알찬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의 1년에 한편 꼴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는 이 회사는 1990년대에 <쿨 러닝> <시스터 액트2> 등을 제작한 뒤 이십세기 폭스사의 애니메이션 팀을 거쳐 <아이스 에이지>의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한 크리스 멜레단드리가 2007년에 세운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다.
일루미네이션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슈퍼배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달을 훔치려는 야심에 찬 악당이 우연히 입양한 세 여자 아이들 때문에 큰 소동에 빠지는 내용의 이 작품은 일루미네이션의 창립작으로서 2010년 전미 박스오피스 9위라는 주목할 성적을 기록했다. 이것만으로도 신생 제작사에는 충분한 성공이지만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슈퍼배드>가 선배 제작사인 블루스카이의 대표작 <아이스 에이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할리우드에서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의 작품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익을 안겨다준 애니메이션영화란 사실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 그것도 창립작을 두고 제작사의 성공을 단정짓는 것은 너무 성급할 수도 있다. 일루미네이션의 사장이자 프로듀서이며, 과거 <아이스 에이지> <로봇> 등을 제작해던 크리스 멜레단드리 역시 이 놀라운 성공 앞에 “처음은 안도했고, 그다음엔 성적에 압도당했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를 믿고 지원해 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고마웠다”며 첫 성공에 애써 들뜨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현되지 못한 거대한 야심
그런데 <슈퍼배드>의 성공이 불러온 화제가 다 식기도 전에 발표한 <바니 버디>는 놀랍게도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영화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부활절 토끼가 어느 날 갑자기 드러머가 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넘어오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이 영화는 어쩌면 최근 만들어진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가장 야심찬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데뷔작으로 모두의 주목을 받던 제작사가 상대적으로 유행이 지났다고 여기던 실사애니메이션영화를 두 번째 작품으로 떡하니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은 모두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토끼와 병아리와 인간이 혈투를 벌이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인간 배우의 조합은 여전히 어색했고, 특히 애니메이션 세계에서만 가능한 유머를 현실 세계로 그대로 옮긴 것은 어쩔 수 없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예상 못한 순간에 터지는 기괴한 웃음이 기억에 남을 뿐 <바니 버디>는 <슈퍼배드>에서 우리가 좋아했던 것, 즉 신선한 관점으로 익숙한 세계를 비틀어 볼 때 발생하는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다.
산만함과 과잉이 약점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니 버디> 역시 제작비를 충분히 만회할 정도의 나쁘지 않은 수익을 거두었고, 일루미네이션은 그 다음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로렉스>를 발표했다. <슈퍼배드>의 크리스 리노드 감독과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2> 등의 작품에서 애니메이터로 경력을 쌓은 신예 카일 발다 감독이 함께 연출한 이 영화는 플라스틱 마을에 ‘진짜 나무’를 심기 위한 주인공들의 모험을 그린다. 미국의 유명한 동화 작가인 닥터 수스의 원작을 영화화 한 이 작품에서 일루미네이션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프로듀서가 “책을 그대로 영화화했으면 20분 만에 끝났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간단한 줄거리에 다양한 세부 사항을 추가해 매우 ‘산만한’ 진행을 보여준 것이다. <로렉스>는 각기 완전히 다른 세 가지 공간에 1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해 과장된 연기를 펼치고 여기에 화려한 뮤지컬 신과 추격전, 그리고 대규모 군중의 대치장면까지 등장시켜 서사적으로든 이미지적으로든 명백한 과잉상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산만함과 과잉은 분명 단점으로 지적할 만한 것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짧은 에피소드들이 치고 빠지며 만들어내는 활력에 방점을 찍는다. 즉 정신없지만 신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로렉스>에서부터 다시 <바니 버디> <슈퍼배드>를 거꾸로 돌아보면 한순간도 쉬지 않는 이 활력이야말로 일루미네이션의 가장 큰 색깔이다.
잘하는 걸 더 잘하자
매 시퀀스, 매 신에서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가득 채워넣는 방식, 흡사 조증이라도 온 듯 활개치는 정력적인 인물들, 이를 뒷받침하는 다채로운 색상의 과감한 사용과 발랄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구현한 밝고 낙천적인 세계, 여기에 톡 쏘는 개성을 추가하는 짓궂은 유머까지. 일루미네이션의 이러한 특징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편을 뛰어넘는 수익을 기록하며 자체 흥행 기록을 경신한 <슈퍼배드2>는 더 다양한 무대와 인물을 내세워 예의 산만한 활력을 선보였으며, 내년 개봉예정인 <미니언>(<슈퍼배드>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한다)은 아예 수많은 미니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더 많은 인물과 사건을 다룰 예정이다. 즉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신생 제작사의 미래를 더욱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바니 버디>를 제외한 일루미네이션의 모든 작품을 연출한 크리스 리노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그런 기대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애니메이션영화가 너무 많다고 불평했고 곧 망할 거라고 했죠. 하지만 관객은 지금 애니메이션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고, 아직은 지겨워할 때도 아니에요. 그리고 (디즈니의) <라푼젤>과 (드림웍스의) <드래곤 길들이기>는 각기 다르면서도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죠. 저는 이런 제각기 다른 아이디어들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여기서 방점은 물론 ‘제각기 다른’이다. 일루미네이션은 정적인 순간에 감동을 만들었던 <월•Ⓔ>나 <토이 스토리3>, 또는 의외로 정석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쿵푸팬더>와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만약 지금처럼 꾸준히 자신들의 시도를 계속한다면 언젠가 다른 제작사들이 그리지 못한 세계를 선보이며 일루미네이션만의 또 다른 걸작을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산만한 인물들이 펼치는 정신없고 짜릿한 모험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너의 정체가 궁금해
일루미네이션의 대표 캐릭터 <슈퍼배드> 미니언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의 공식 마스코트이기도 한 <슈퍼배드> 시리즈의 미니언은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아이들의 웅얼거림이 섞인 세계 각국의 언어로 대화하는(한국어로 “하나, 둘, 셋”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 노란 생명체는 그 복잡한 특성만큼이나 복잡한 탄생 과정을 겪었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에는 단순한 “폭력배” 컨셉에서 시작했지만 뒤로 가면서 “불쌍한 두더지”, “<백설공주>의 난쟁이 도피” 컨셉이 더해졌고 심지어 <스타워즈> 시리즈의 열혈 팬인 감독의 취향에 따라 “귀여운 R2D2”, “자와의 움파루파 버전”이라는 난해한 컨셉까지 추가됐다. 그리고 여기에 감독인 크리스 리노드와 피에르 코핀의 목소리를 덧씌워 이 귀엽고 괴상한 캐릭터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