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 축복> Vara: A Blessing 키엔체 노르부 / 부탄 / 2013년 / 96분 / 개막작 / 드라마
신은 가장 비천하고 낮은 곳에 임하신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라: 축복>은 인도 남부지방의 전통춤 바라타나티암(Bharatanatyam)에 얽힌 한편의 설화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아름다운 처녀 릴라는 힌두신에게 바치는 춤 바라타나티암 무희인 어머니에게 춤을 배우는 견습 무희로, 조각가를 꿈꾸는 하층계급 청년 샴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여신상을 조각하고 싶어 하는 샴의 요청으로 그의 모델이 되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편 마을 유지가 릴라를 눈독 들인 가운데 두 사람의 밀회는 촌장에게 발각되고, 어머니와 샴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릴라는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부탄의 덕망 높은 승려이기도 한 키엔체 노르부 감독은 자신의 세 번째 작품 <바라: 축복>을 통해 형식과 메시지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인도의 저명 작가 강고파디아이 단편소설 <피와 눈물>을 바탕으로 감독이 직접 각색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민담이나 감동적인 설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신파에 가까운 이 익숙한 이야기가 바라타나티암의 동작과 만났을 때 신에게 봉헌되는 춤과 같은 숭고미에 도달한다. 릴라의 희생은 신을 향한 구도의 길과 다르지 않으며, 이것이 각각 춤, 조각, 카메라란 창구를 거쳐 표현된다. 릴라가 바라타나티암의 동작을 통해 비슈누신의 서사시를 전달하듯, 샴은 그녀를 통해 신의 숭고함을 직접 조각하고, 감독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빛과 카메라로 다듬어 또 하나의 조각을 완성한다. 절제된 시점, 과감한 빛의 활용으로 아름다움의 본질을 탐구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나기마> Nagima 잔나 이사바예바 / 카자흐스탄 / 2013년 / 80분 / 갈라 프레젠테이션 / 드라마
나기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19살 여성이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데다가, 못생기고 말주변이 없기까지 한 그에게 밝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자그마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같은 고아원 출신인 친구 안냐가 임신을 해 거동이 불편한 까닭에 안냐를 보살펴야 하는 것도 나기마의 몫이다. 어느 날 안냐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기마는 안냐의 아기를 직접 키우기로 결심한다. <나기마>는 나기마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영화 속 나기마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언제나 무표정이다. 그의 무표정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은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기마의 삶을 따라가는 것만큼 그의 무표정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기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박복한 삶을 탓하기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 나기마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꽤 충격적이고 울림이 크다. 카자흐스탄의 여성감독 잔나 이사바예바의 세번째 작품이다.
<어게인> Again 가나이 준이치 / 일본 / 2013년 / 107분 / 뉴 커런츠 / 성장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보여주고 싶은 감정이 있어도 미처 다 꺼내지 못하는 시기가 청춘일 것이다. <어게인>은 미숙한 청춘을 관통하는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영화다. 하츠미는 마을에 이사 온 여고생이다. 새로운 환경과 생활에 적응하던 그는 폐지를 수집하는 류타로를 알게 된다. 하츠미와 류타로, 두 사람은 동네에서 자주 만나면서 가까워진다. 서로를 알아가던 중 류타로는 하츠미와 성적인 관계를 시도하고, 하츠미는 류타로의 행동에 놀라 집으로 도망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츠미의 엄마는 류타로가 자신의 딸을 강간했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영화의 전반부가 하츠미와 류타로가 가까워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면 후반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보호자와 함께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류타로의 잘잘못을 가리는 게 이야기의 목적은 아니다. 여전히 류타로를 그리워하는 하츠미는 류타로의 처벌에 혈안이 된 엄마에게 류타로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영화는 하츠미가 자신의 감정을 찾고 알아가기까지의 고민을 꼼꼼하게 보여준다.
<지난 날> The Past 아쉬가르 파라디 / 이란 / 2013년 / 130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드라마
이란의 영화감독 아쉬가르 파라디가 도덕과 비도덕의 차이를 무화하는 역설적 이야기꾼으로서 실력이 있다는 건 그의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이미 입증됐다. 파라디는 사태에 사태를 덧입혀가며 껍질을 벗기면 또 껍질이 있는 이야기 전법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렇게 하여 종국에 우린 판단 유보에 이르고 만다. 파라디를 국제적인 스타급 감독으로 올려놓은 그같은 방식은 <지난 날>에서 한층 더 강고해졌다. 별거에 들어간 아미드와 마리 부부. 아미드가 이혼 수속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 부인인 마리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됐을 때 마리의 아이들은 친엄마 마리보다 양아빠 아미드를 더 반긴다. 마리는 이미 새로운 남자와 살고 있고 마리의 아이들은 그를 싫어한다. 게다가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이들에게 숨겨진 문제의 핵심은 그 남자의 전 부인이 지금 혼수상태라는 사실이다. 누구의 잘못이 그녀를 혼수상태에 빠뜨린 것인가. 그것이 이 영화가 묻고 있는 질문이자 걸고 있는 내기다.
<콘크리트 클라우드> Concrete Clouds 리 차타메티쿤 / 타이, 홍콩, 중국 / 2013년 / 99분 / 뉴 커런츠 / 로컬
머트는 아버지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뉴욕에 살고 있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고향인 타이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머트는 헤어진 옛 애인을 추억하게 되고 다시 그녀를 찾아 나선다. 반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둘째아들 닉은 곧 형을 따라 타이를 떠나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 바람에 10대 청년 닉과 여자친구의 관계는 헤어질 위기에 놓인다.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사건은 이렇게 두 아들의 애정 전선을 뒤바꿔놓는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으로 시작했지만 감독은 시치미를 뚝 뗀 뒤 두 아들의 이야기에만 골몰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아버지가 몸을 던진 아파트 옥상, 거기에 놓여 있는 구멍 뚫린 콘크리트 냉각탑을 의미한다. 영화에는 타이의 새로운 세대에 대한 감독의 근심이자 기대가 가득하다. 특히나 젊은 세대의 문화를 강조한 독특한 장면 편집이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유다> Judas 안드레이 보가티레프 / 러시아 / 2013년 / 107분 / 플래시 포워드 / 시대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하다. 영화는 유다의 배신이라는 잘 알려진 성경의 이야기를 유다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유다는 시장 한편에서 설교를 하는 예수를 처음 만난 뒤, 그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지닌 채 그의 제자가 되고, 예정된 배신을 한다. 사람의 시선 높이 정도의 낮은 앵글은 유다를 그와 대등한 시선에서 보려는 시도다.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리는 화면은 이 영화 전체가 배신을 앞둔 유다의 불안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유다의 얼굴을 위한 영화다. 확신에 찬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예수의 얼굴과 강인해 보이지만 시종일관 불안함이 담긴 유다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는 성경의 시대에도 돈과 빵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각인시킨다. 그 속에서 신념 때문에 흔들리는 유다의 모습은 차라리 순진해 보인다. 영화 속 유다의 모습은 성경 속 배신자의 전형이기보다는 절대적인 진리가 부재한 삶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가깝다.
중요한 게스트 누가 오나?
2013년 해운대를 찾는 감독과 배우들
올해도 해운대 밤하늘을 수놓을 스타들이 부산을 찾는다. 일단 홍콩 배우 곽부성이 개막식 사회를 맡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콜드 워>를 비롯해 <신조협려>(1991), <천장지구2>(1992)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한때 아시아 소녀들의 가슴을 녹였던 홍콩의 배우다. 외국배우가 개막식 사회를 본 건 지난해 탕웨이에 이어 두 번째. 1960, 70년대 홍콩 최고의 스튜디오인 쇼브러더스의 황금기를 이끌고 거장 장철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외팔이’ 왕우도 신작 <실혼>과 대표작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를 들고 내한한다.
부산의 오랜 친구이자 아시아의 거장 감독들도 신작을 들고 온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비롯해 지아장커, 모흐센 마흐말바프, 소노 시온, 구로사와 기요시, 야마시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 이상일 등이 그들이다. 클레르 드니, 알베르 세라 등 유럽의 많은 감독들도 자신의 신작을 관객에 소개할 예정이다. 한편, 한국의 임권택, 이창동을 비롯해 짐 셰리던, 아모스 기타이, 리티 판 감독이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해 자신의 영화 인생을 이야기한다.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는 샤를 테송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이다.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Adele: Chapters 1 & 2 압델라티프 케시시 / 프랑스 / 2013년 / 179분 / 월드 시네마 / 드라마, 퀴어
첫눈에 반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장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열다섯살 소녀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은 소설 수업 시간에 읽은 피에르 드 마리보의 <마리안느의 인생>이 묘사하는 내용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길가에서 우연히 파란 머리의 대학생 엠마(레아 세이두)를 본 순간, 아델은 소설이 전하고자 했던 감정이 그녀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는 아델이 엠마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며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되는 관계에 혼돈과 상실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조명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두 레즈비언 여성의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극적으로 창조된 캐릭터와 이야기에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두 주연배우의 호연에 있다. 올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단이 황금종려상 수상작 호명과 더불어 프랑스 여배우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와 레아 세이두의 이름을 함께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주 그녀들의 얼굴을 공들여 조명하는 케시시의 카메라는 두 여배우가 지닌 매력과 개성으로부터 이 사랑 이야기에 필요한 설렘과 열정, 상실과 고통의 감정을 끌어내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에그자르코풀로스와 세이두의 아름다운 육신과 감성이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의 가장 중요한 질료다. 얼마 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프랑스에서조차 논란이 된 파격적인 레즈비언 정사 신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작품. 러닝타임이 세 시간에 이르지만 끝까지 몰입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영화다.
<천주정> 天注定 지아장커 / 중국, 일본 / 2013년 / 129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무협
동시대의 거장 지아장커는 언제나 무협영화를 꿈꿔왔다. <스틸 라이프>를 만들었을 때에도 그는 무협영화에서 구성을 빌려온 것이라고 했다. 청조를 배경으로 한 그의 오랜 무협 프로젝트 <재청조>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전에 이미 우린 지아장커식 무협영화 한편을 만나게 됐다. 이 영화 <천주정>이다. 네명의 주요 인물, 광산 노동자, 의문의 청부살인업자, 마사지숍의 접수원, 직업을 찾아 전전하는 젊은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배경은 중국의 동시대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는 필시 무협영화다. 주인공들은 종종 몸을 그리고 손에 쥔 단도를 무협영화의 무사들처럼 사용한다. 지아장커 영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피와 살이 튀는 액션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지아장커는 지금 중국이 처한 폭력 양상을 표현하는 데에는 그런 무협영화적 언어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영문 제목은 <A Touch of Sin>, 호금전의 저 유명한 무협영화 <협녀>(A Touch of Zen)에서 가져온 것이다.
<파스카> Pascha 안선경 / 대한민국 / 2013년 / 97분 / 뉴 커런츠 / 로맨스
여자의 나이는 마흔살. 남자의 나이는 열아홉살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여자의 직업은 가난한 시나리오작가, 남자의 직업은 없다. 여자의 이름은 가을, 남자의 이름은 요셉이며, 둘은 사랑하는 사이고 동거한다. 이 사랑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시선들이 고울 리 없다. 가을의 아버지는 요셉에게 “네가 엄마가 필요했구나”라고 말하며 그들의 사랑을 비하한다. 가을의 오빠는 요셉에게 “너의 부모님이 우리 가을이를 구속시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으름장을 놓는다. 가을과 요셉의 사랑은 쉽지가 않다.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파스카>는 그런데도 어딘지 흔들림이 없다. 이런 상황을 견디고 살아가는 그들 주인공을 그리는 방식에서 그렇다. 가을과 요셉에게 더 슬픈 사건이 없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지킨다. 살아라, 가을과 요셉!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딜리셔스> Delicious 태미 라일리 스미스 / 영국 / 2013년 / 85분 / 플래시 포워드 / 로맨스
전과자 자끄는 런던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일 거라 믿는 한 요리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우며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레스토랑 주방에서 그는 스텔라라는 여자를 만난다. 스텔라는 과거에 겪은 어떤 상처 때문에 외로움과 폭식증을 겪고 있다. 런던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끄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스텔라,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진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딜리셔스>는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두 남녀의 성장영화에 더 가깝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보다 상대방을 통한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딜리셔스>가 그리는 사랑이 ‘판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문제’로 느껴진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문제를 함께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노력은 어떤 판타지보다 훨씬 아름답고 대견스럽다.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임에도 두 남녀의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게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