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뭐가 나빠> Why Don’t You Play in Hell? 소노 시온 / 일본 / 2013년 / 126분 / 아시아영화의 창 / 코미디, 액션
영화에 미친 인간들이 있다. 최고의 액션영화 감독과 일본의 이소룡을 꿈꾸는 히라타와 사사키가 그들이다. 둘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짝퉁’ 이소룡 영화를 찍으며 꿈을 키운다. 한편, 야쿠자 보스 무토는 배우 지망생인 딸 미추코가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길 원한다. 미추코는 히트작 CF에 출연한 게 경력의 전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무토의 숙적인 야쿠자 이케가미는 미추코와 사랑에 빠진다. 히라타와 사사키는 미추코와 함께 무토의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당신이 극장에서 팝콘 먹고 콜라 마시며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소노 시온의 말처럼 <지옥이 뭐가 나빠>는 여러 이유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코미디영화다.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의 현실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던 전작 <희망의 나라>와 달리 이 영화는 소노 시온 특유의 변태적인 감수성이 충만하다. 특히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영화 촬영현장에서 한데 뒤엉키며 지옥 같은 소동을 벌이는 영화의 후반부는 파격적이다.
<나의 애견 킬러> My Dog Killer 미라 포르나이 / 슬로바키아, 체코 / 2013년 / 90분 / 플래시 포워드 / 성장, 드라마
슬로바키아와 체코 모라비아 경계에 있는 한 작은 시골 마을.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증오와 의심을 먹고 자라난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열여덟살 마렉 역시 친척과 이웃에게 무시당하자 지방의 신나치주의 집단에서 탈출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개를 훈련시키는 데 여념이 없는 마렉. 어느 날 아버지가 재산 처분을 위해 도장이 필요하다며 멀리 떨어져 사는 어머니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하지만 마렉은 어머니가 집시와 재혼했다는 사실과 배다른 동생 루카스의 존재를 알고 분노한다. 곧이어 몸담은 스킨헤드 집단으로부터 압박까지 들어오자 소년은 혼란에 빠진다. 슬로바키아의 우울한 풍광과 무표정한 인물들의 뒷모습을 느리고 건조한 카메라로 따라가는 이 영화는 소년의 황폐한 내면을 통해 유럽의 민족 갈등과 인종 차별의 현실을 보여준다. 극심한 소음에도 덤덤히 할 일만 하는, 이미 죽어 있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야말로 그 어떤 폐허보다 황량하고 스산하다.
<경유> Transit 한나 에스피아 / 필리핀 / 2013년 / 92분 / 뉴 커런츠 / 드라마
해마다 이스라엘에서는 다섯살 미만의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강제 추방되고 있다. <경유>는 이 법이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직 다섯살이 채 되지 않은 아들 조슈아를 키우는 모세,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만 필리핀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넷, 이스라엘-필리핀 혼혈로 자신이 이스라엘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자넷의 딸 야엘 등의 사연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된다. ‘경유’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삶의 어떤 지점에서 서로를 스쳐지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전 시퀀스의 어느 대목을 이후의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되, 그 장면의 컷과 컷 사이로 새로운 이야기의 갈래들이 비집고 나오는 연출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상업영화로도 사랑받을 법한 극적인 이야기와 구성을 취한 작품.
<한공주> Han Gong-ju 이수진 / 한국 / 2013년 / 112분 / 한국영화의 오늘 / 성장
여고생 한공주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인천으로 전학을 간다. 이전의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학교 친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어느 날 학교 음악실을 지나던 중, 그는 기타를 발견하고 연주한다. 그의 연주를 보고 감탄한 반 친구들은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그 동영상을 본 이전 학교의 학부모들이 단체로 한공주의 학교로 찾아와 난동을 부린다. 그 일로 학교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은 한공주는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과거에 벌어졌던 어떤 사건의 피해자였던 한공주에게 ‘그때 그 사건’을 환기시키는 건 이중으로 굴레를 씌우는 일이다. 그런 그를 사회가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한공주가 살아갈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과거의 일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한공주>는 공주의 현재와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질문한다. <마더>에서 진구의 여자친구, <써니>에서 ‘본드걸’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천우희가 한공주를 맡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꿈
원신 원컷 영화 3편
한 호흡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원신 원컷.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담대한 형식적 실험이자 시네마토그래프가 꾸는 꿈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원신 원컷 영화를 무려 세편이나 만날 수 있다. 아모스 기타이 감독의 <아나 아라비아>는 유대인과 아랍인 아웃사이더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곳에서 80분간 그들의 인터뷰를 담아낸다. 끊이지 않는 화면을 통해 이야기가 오가는 장소 자체가 평화와 공존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샤흐람 모크리 감독은 <생선과 고양이>에서 카스피 연안의 한 식당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흥미로운 사건을 원 테이크로 촬영했다. 원신 원컷은 지루할 것이란 편견과는 달리 역동적인 리듬감이 돋보인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늙은 여인과 그녀를 둘러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그린 알렉세이 고를로프 감독의 <늙은 여인의 이야기>도 있다. 그야말로 형식적인 실험이란 수사에 어울리는 과감한 영화다. 세 작품 모두 시도는 같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고자 한 색깔은 전혀 다르다. 각기 다른, 하지만 각자 유일한 리듬으로 포착한 세 작품의 영화적 진실이 어떤 매력을 발산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약속> A Pact 드니 데르쿠르 / 독일, 영국 / 2013년 / 83분 / 월드 시네마 / 스릴러
폴은 애나를 짝사랑한다. 애나는 기요르그의 애인이다. 폴은 애나를 차지하기 위해 친구 기요르그를 속인다. 그걸 모른 채 기요르그는 애나를 폴에게 양보한다. 다만 자신이 원할 때 애나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 중년의 부부가 된 폴과 애나 앞에 기요르그가 나타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이야기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전형적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서서히 본격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다각형의 구도로 이행된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은밀한 거래는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감독은 끝끝내 이를 설득력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인다. 여기에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어우러져 미끈한 심리 스릴러물이 탄생했다. 음악가이기도 한 감독은 전작 <페이지 터너>에 이어 이번에도 음악을 인물간의 주요한 매개로 등장시킨다.
<순천(順天)> Splendid but Sad Days 이홍기 / 한국 / 2013년 / 64분 / 와이드 앵글 / 다큐멘터리, 휴먼
늙은 어부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할아버지를 떠올릴 것이다. <순천>은 졸릴 만큼 평화로운 순천만의 풍광을 뒤로 평생 거친 바다 위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는다. 마을 사람들이 입 모아 여장부라 칭찬해 마지 않는 그녀 곁에는 오십 평생 알코올 중독자로 속을 썩인 할아버지가 있다. 할머니는 “평생 나를 고생시켰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살뜰하게 할아버지를 챙긴다. 그녀의 태도에 푸념은 있어도 원망은 없다. 다만 삶의 주름 사이에 고여 있는 피로와 슬픔만은 어쩔 수 없나보다. 술 때문에 망가지고 지친 몸을 빠끔히 내밀어 그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도 미안함, 답답함, 섭섭함이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회한은 없는 삶의 풍경, 그리고 넉넉한 순천의 풍경.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풍광에 불과할 테지만 고단한 순천만 어부의 삶과 겹쳐지며 잔잔하고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순천(順天)의 의미 그대로 하늘을 거스르지 않는 삶, 바다를 따르며 사는 인생의 도리가 순천만의 풍광 속에 녹아 있다.
<싱가포르에게, 사랑을 담아> To Singapore, with Love 탄핀핀 / 싱가포르 / 2013년 / 70분 / 와이드 앵글 / 다큐멘터리
싱가포르에 관한 영화이나, 싱가포르 내부의 모습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명의 싱가포르인들이 조국에 대해 말한다. 수십년 전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추방된 그들은 노년에도 여전히 입국을 거부당하고 있지만 한순간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 영화는 런던, 타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싱가포르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추방당한 이들에게 싱가포르란 과거에 대한 추억과 추방의 상처, 애틋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애증의 대상이다. 그들이 받은 상처는 여전히 싱가포르 국적을 얻지 못하는 이후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선 어떤 이들은 책이나 음악으로 그들의 경험을 기록하기도 하고 다른 약소국을 돕는 것으로 극복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작 <보이지 않는 도시> <싱가포르 가가> 등을 통해 자신의 조국이기도 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던 탄핀핀 감독의 신작.
<요리대전> Zone Pro Site: The Moveable Feast 첸위슌 / 대만 / 2013년 / 145분 / 오픈 시네마 / 성장, 가족, 코미디
연회요리의 대가 창승사는 딸 샤오완이 가업을 잇기 바라지만 그녀는 모델이 되겠다며 집을 떠난다. 자신의 요리 비법이 담긴 노트 한권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창승사. 도시로 떠난 샤오완은 갑자기 빚더미에 앉게 되어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오지만 이미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홀로 남은 어머니만 가게를 지키려 고군분투 중이다. 이에 샤오완은 빚도 갚고 마음을 전하는 요리를 부활시키려고 요리대회 참가를 결심한다. <요리대전>은 한때는 대만의 대표적인 문화였지만 이제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연회요리를 소재로 한 유쾌하고 행복한 코미디영화다. 주성치의 <식신>이나 일본 만화 <요리왕 비룡>식의 오버액션 맛 표현이 주요한 개그 포인트지만 마냥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연회요리에 대한 기본적인 고증을 거친 요리들은 눈으로 맛보는 즐거움은 물론 인스턴트에 묻혀 잊고 지낸 먹는 행복까지 떠올리게 한다. 화려하고 과장된 색감과 더불어 샤오완 역의 하우교의 깜찍 발랄한 연기와 어머니 역의 임미수의 코믹 연기가 단맛을 더한다.
<개러지> Garage 레니 에이브러햄슨 / 아일랜드 / 2007년 / 85분 / 아일랜드 특별전 / 드라마
아일랜드의 탁 트인 풍광과 함께 배를 내밀고 손을 앞으로 늘어뜨린 채 뒤뚱뒤뚱 걸어가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개러지>는 어디에나 한명쯤 있을 법한 조금 모자란 남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편견과 조롱을 통해 변화하는 아일랜드의 시골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동차 정비공 조지는 바보 같다고 놀림받고 가끔은 외로워도 별 불만 없이 만족스런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10대 청소년 데이비드와 함께 일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소년과의 우정은 낯설지만 그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안겨준 다. 문제는 조지의 주변이 조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조지와 데이비드의 우정을 오해하고 조지를 더욱 혐오하기 시작한다. 지루한 시골 생활은 사람들의 얼굴에 악의를 드리우고 조지가 용기내 다가갈수록 상처는 더욱 커진다. 시골 풍경처럼 순수해서 안타까운 남자 조지를 연기한 아일랜드 출신 코미디언 팻 쇼트의 덤덤하고도 애잔한 연기가 아일랜드의 무거운 날씨처럼 화면에 녹아든다.
<늙은 여인의 이야기> The Story of an Old Woman 알렉세이 고를로프 / 카자흐스탄 / 2013년 / 75분 / 뉴 커런츠 / 가족, 드라마
원신 원컷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 어느 날 갑자기 요양원에서 가족들의 부름을 받고 집으로 오게 된 늙은 여인의 이야기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는 휠체어에 태워진 채 집 안 이곳저곳으로 불려다니며 수모를 겪는다. 게다가 여인을 집으로 호출한 아들 내외에게는 뭔가 다른 꿍꿍이도 있어 보인다. 방에서 방으로, 집 안에서 정원으로 등장인물들의 뒤를 바쁘게 쫓는 카메라는 ‘이벤트’를 앞둔 가족들의 조바심과,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에 사로잡히는 늙은 여인의 모습을 함께 담는다. 인간으로서의 신체적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감정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직 눈의 움직임을 통해 대사로 설명되지 않는 여인의 감정을 표출해내는 주연배우 레아 넬스카야의 호연이 인상적이다(그녀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소 감성 과잉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으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감독의 연출력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