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FC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축구팀이다. 메시와 네이마르가 뛰고 있다.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FC 바르셀로나가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구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다. FC 바르셀로나의 주인은 메시도, 네이마르도 아닌 20만명에 달하는 조합원이다. 회비 150유로만 내면 누구나 바르샤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1년 넘게 활동한 조합원이라면 조합 이사회에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고, 6년마다 열리는 클럽 회장 선거에서 소중한 한표를 행사할 수 있다. 선수 이적을 비롯한 구단 운영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르샤의 축구가 아름다운 이유다.
영화를 공급받는 극장이 상영조건 좌우
바르샤가 그렇듯이 작은 힘이 모인다면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리틀빅픽쳐스(Little Big Pictures, 이하 리틀빅)는 여러 제작사들이 힘을 모아 만든 공공적 성격의 배급사다. 명필름, 영화사 청어람, 리얼라이즈픽쳐스, 삼거리픽쳐스, 케이퍼필름, 외유내강, 인벤트스톤, 주피터필름 등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 소속 제작사와 <씨네21>, 영화부가판권유통사 더컨텐츠콤을 합친 10개 회사가 각각 5천만원씩 공동 출자해 설립했다. 이렇게 모인 5억원에 더 많은 주주들을 모아 총 20억원의 설립 자본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리고 지난 7월24일 부산영상위원회와 총 50억원(이중 리틀빅이 15억원 출자) 규모의 펀드 ‘부산영화투자조합1호’를 마련했고, 8월 말 150억원(이중 리틀빅이 1억원 출자) 규모의 모태펀드 ‘대한민국전문투자조합1호’에 출자했다. 당장은 이 돈을 기반으로 영화 투자와 배급 사업을 꾸려가기로 했다.
제작사가 모여 공동으로 투자배급사를 차린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2002년 KTB엔터테인먼트, 강제규필름, 에그필름, 삼성벤처투자 등 4개의 영화 투자/제작사가 함께 A라인이라는 공동 배급사를 차렸고, 2004년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이 합병해 MK픽쳐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배급업에 뛰어든 바 있다. 2007년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와 오퍼스픽쳐스의 이태헌 대표 그리고 보경사의 심보경 대표 등 3명의 제작자가 설립한 영화투자제작사 유나이티드 픽쳐스도 있다. 또, 2007년 영화사 청어람은 조성우 음악감독이 이끌었던 영화음악 프로덕션 M&FC과 함께 배급 사업을 펼친 적도 있다. 하지만 리틀빅은 일정한 편수의 라인업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금융)자본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자 목표였던 과거의 공동 배급사와 성격이 다르다. 산업의 형태를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던 과거가 아닌 대기업 투자배급사를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된 현재, 다수의 제작자들이 대안배급사를 설립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지난 10월21일 명동의 한 중식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협 이은 회장은 “한국 영화산업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로 불공정한 산업 환경이 조성되었다”며 “리틀빅픽쳐스라는 공공적 성격의 배급사를 설립함으로써 제작사와 공정하게 수익을 분배해 한국영화시장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리틀빅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최용배 부회장은 “상영관 사업을 함께하고 있는 대기업으로 인해 여러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공급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영화를 공급받는 극장이 모든 조건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들의 말처럼 독과점을 지향하는 거대 자본과 수직계열화가 된 유통에 의해 그간 시장에서 불이익을 당한 다수의 제작사들이 협동한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다.
갑과 을의 불공정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로 리스크, 하이 리턴.”(Low Risk, High Return). 한국영화가 불황이었던 2008년 이후 대기업 투자배급사는 ‘하이 리스크, 로 리턴’일 수밖에 없는 영화산업에서 수익을 극대화하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다각적으로 강구해야 했다. “우리도 먹고살기 어렵다.” “이러다간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시 투자배급사의 호소는 시장 상황을 감안할 때 일정 부분 용인되는 측면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제작사를 비롯한 을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힘의 불균형은 이후 시장 상황이 호전되었음에도 다시는 조정되지 않았다. 대기업 배급사들의 ‘체질 개선’ 프로그램은 더욱 강화됐고, 제작사에 부과된 생존의 선택은 더욱 가혹한 것이 됐다.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간에 여러 불공정한 거래 중 제작자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대표적인 계약이 공동 제작이다. 이것은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리스크를 공동으로 부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결합했던 과거 제작사간의 공동 제작과 다르다. 영화의 완성도를 갖추겠다는 명분(?)으로 투자배급사가 기획/개발부터 마케팅, 제작, 수익 분배까지 영화의 전 공정에 깊이 관여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을 제작사에 요구한다. 공동 제작 계약을 맺게 되면 제작사는 해당 영화의 극장 수익 중 극장으로 돌아가는 몫을 제외한 금액을 배급 계약에 따라 투자배급사와 6 대 4(투자배급사 대 제작사)로 배분한 뒤, 남은 몫인 4를 공동 제작 계약에 따라 투자배급사와 또다시 5 대 5로 나누어야 한다. 결국 제작사가 챙길 수 있는 몫은 2뿐이다. 최근의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간의 수익 배분이 8 대 2라는 얘기도 이같은 셈법에서 나왔다. 그런데 계산이 이상하지 않는가. 처음부터 투자배급사가 8 대 2로 투자배급 계약을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배급 계약과 공동 제작 계약을 따로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협의 한 제작자는 “처음부터 8 대 2로 계약하면 그만큼 부분투자자들의 몫이 6 대 4에 비해 커지게 된다. 투자배급사는 부분 투자자들은 시나리오 개발이나 제작에 관여한 바가 없으니 6 대 4로 배급 계약한 뒤 제작사 몫인 4를 가지고 또다시 공동 제작 계약을 맺는 것”이라며 “이것은 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꼼수”라고 공동 제작 계약을 둘러싼 투자배급사의 속내를 비판했다.
공동 제작 계약을 맺으면 제작사가 챙길 수 있는 몫만 줄어드는 게 아니다. 배급 수수료를 비롯해 모니터링 수수료, 마케팅 수수료, 해외배급 수수료, 부가판권 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를 투자배급사에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계약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투자배급사에 (손익분기점(BEP)에 대한) 담보로 잡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 소속의 한 젊은 제작자는 “물론 수수료의 총액이 큰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떼이다보면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은 9대 1까지 가기도 한다. 제작사는 갈수록 리스크에 대한 부담감을 안게 되고 수익은 줄어든다”라며 씁쓸해했다. 또 다른 제작자는 “중소기업인 쇼박스와 NEW가 CJ와 롯데 같은 대기업의 시스템을 따라하면서 공동 제작이 관행화된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창작자에게 남는 건 상실감”
공동 제작만큼이나 판권 문제 역시 제작자, 특히 젊은 프로듀서들의 사기를 저하하는 것 중 하나이다. 200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화의 판권(저작권법에 의해 인정된 재산권 중 하나)은 투자사가 5년 정도 가지고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제작사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투자배급사가 영구적으로 판권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올해 영화사를 새로 차린 뒤 얼마 전 첫 영화를 제작한 한 젊은 제작자는 “판권 문제가 공동 제작 계약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라며 “얼마 전 CJ엔터테인먼트에 왜 판권을 돌려주지 않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5, 6년 전부터 투자배급사가 관리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는데 돌려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창작자에게 남는 건 상실감이다. 영화가 개봉한 지 5년이 지나면 판권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창작자의 권리이기 때문에 제작사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리틀빅이 정상 궤도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투자배급사를 상대로 판권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틀빅이 기존의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의 불공정한 거래를 바로잡고 공정한 산업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출범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는 주문이다.
리틀빅의 출범에 대해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은 일단 말을 아끼고 있다. CJ E&M 영화사업부문 정태성 대표는 “일단 리틀빅이라는 새로운 배급사가 출범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며 말하며 “다만 여러 제작사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CJ의 입장을 얘기하긴 아직 이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기회가 있을 때 그때 가서 하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역시 “리틀빅의 출범과 관련해 무슨 말을 할 때는 아닌 것 같다”라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내보였다.
제작사와 투자배급사간 불공정 거래가 앞으로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멀티플렉스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거래는 이미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다. 지난 10월11일 리얼라이즈픽쳐스를 비롯한 23개의 투자사 및 영화제작사가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프리머스시네마 등 멀티플렉스 4사를 상대로 한 무료초대권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멀티플렉스 4사가 투자사 및 영화제작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전동의 없이 무료초대권을 임의로 발행한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2민사부는 “영화상영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한다고 볼 수 있는 피고(멀티플렉스 4사)들은 배급사, 나아가 영화제작업자에 대한 관계에서 거래활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판단된다”며 “피고들은 무료입장권을 발급하면서 이에 대해 배급사나 제작업자들과 사전에 협의를 하거나 동의를 구한 바 없고, 일부 배급사는 이에 대해 항의하고 배급사와 협의 없이 무료입장권을 발급하는 행위를 중지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음에도, 그 후에도 별다른 협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무료입장권을 발급해왔다. 이것은 특정 영화에 대한 유료 관객수가 감소하는 손실을 영화제작업자에게 전가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에 따른 손실금액 약 31억원을 멀티플렉스 4사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밝히며 영화제작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이 나온 지 닷새가 지난 10월16일 영화사 청어람은 디시네마오브코리아(이하 DCK)를 상대로 가상 프린트 비용(VPF, Virtual Print Fee)을 지급할 의무가 없음을 확인하는 소송도 제기했다. DCK는 2007년 CJ CGV와 롯데시네마가 각각 50%씩 출자해 국내 영화관을 대상으로 디지털 영사 시스템을 보급한다는 취지로 설립한 회사다(<씨네21> 926호 국내뉴스 ‘영사 비용, 배급사가 낼 수 없다’ 참조). 디지털 영사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극장이 초기 설비 비용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담하고, 10년 동안 유지 및 관리비를 DCK에 납부하면 10년 뒤에 장비 소유권을 극장이 가질 수 있게 된다. DCK는 초기 설비에 들어간 나머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배급사로부터 해당 영화 개봉 시 상영관 1관당 80만원의 금액을 VPF로 징수해왔고, 연간 2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불공정한 산업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26년>의 개봉을 1개월 앞둔 지난해 11월1일, 청어람은 DCK로부터 VPF 계약 체결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배급사에 VPF를 부담하게 하는 건 극장의 영사기 구입 및 설치 비용을 배급사에 부담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개봉 일주일을 앞두고도 CGV와 롯데시네마의 예매 서비스가 열리지 않았고 청어람은 VPF 이용 계약을 어쩔 수 없이 체결했다.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26년>의 상영관 예매 시스템이 개시됐다.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배급사는 점유율 70%에 달하는 DCK가 제시하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이것은 지위를 이용한 부당거래이자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하는 강제 거래”라고 소송을 제기한 이유를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원동연 제협 부회장은 “리틀빅은 슬라이딩 부율 시스템(개봉 첫주 80: 20(배급사:극장), 둘째 주 70:30, 셋째 주 60:40, 다섯째 주 40:60, 여섯째 주 30:70식으로, 첫주에 극장이 챙겨가는 몫은 매우 적지만 영화가 오래 걸릴수록 극장의 몫이 많아진다)이나 최소상영일수 보장 같은 공정한 상영 환경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배급 시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을 앞세워 불공정한 산업 환경을 조성해온, 기존의 대기업 투자배급사 중심의 영화시장에서 리틀빅은 “제작사의 창작성과 권리를 인정하고 보다 합리적인 배급 수수료를 책정할 것이며 공정한 계약과 수익분배를 위해 노력해 건강한 영화적 생태계가 조성되도록 할 것”이라는 명분을 세웠다. 하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 배급사로서 안정적인 라인업 확보와 자금 조달 방법 역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의사 결정 방식 역시 기존의 배급사와 달리 민주적이어야 할 것이다. 참여하는 제작사는 많고 시장은 한정되고 불안정한 만큼 작품들을 어떻게 수급해서 관객에게 어떻게 내놓을 것인가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고 있고, 주주들의 출자금으로 운영되는 회사인 만큼 최대한 많은 수의 주주를 확보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출자자로 참여하지 않은 동료 제작자들의 기대감이 높다. 안영진 프로듀서는 “최용배 제협 부회장이 PGK 소속 프로듀서들에게 리틀빅 참여를 부탁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리틀빅의 취지와 명분에 깊이 공감한다.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면 참여하고 싶다”며 “이것과 동시에 기존의 투자배급사의 불공정한 거래 문제에 대해서 영화계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한 뒤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작은 힘이 지금보다 더 많이 모인다면 이같은 바람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