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요나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아성은 방향의 키를 틀었다. 현실과 한참 떨어진 열차 칸을 벗어나 지극히 일상적인 시공간으로의 급선회. <우아한 거짓말>에서 그녀는 여고생 만지가 돼 돌아왔다. 거대했던 전작의 뒤라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택한 작품이었을까 싶지만 이번에도 만만찮아 보인다. 어떤 면에선 전작들에 비해 좀더 감정의 음영이 짙어졌다고 해야 맞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시크한 만지가 살갑던 동생 천지(김향기)의 갑작스런 자살과 마주해야 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만지에겐 캐릭터보다 상황이 더 중요했어요. 상실감에서 시작해서 죽음을 부정하다가 나중에는 천지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를 알아가는 그 상황에 중점을 뒀죠.” 이때 만지에게는 상실감 이상의 복잡한 감정이 흐른다. 그건 가족으로서 천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는 다른 유의 것이다. 동생이 죽음을 결심할 때까지 무관심했던 방관자로서, 직간접적으로 천지를 따돌린 아이들과 자신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공범자로서 느끼는 일종의 죄의식에 가깝다.
“꼭 겪어야만 할 수 있는 연기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아이를 낳거나 진심으로 사랑을 한다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과 같은. 근데 전 가까운 누군가와 생이별을 한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처음엔 자신이 없었어요.” 조심스러웠던 그녀를 끝내 작품으로 이끈 건 우연히 읽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다.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은 다음날부터 써내려갔다는 부재에 관한 메모들이 그녀의 마음을 강렬하게 강타했다. 상실의 아픔이란 뭘까 고민하며 지새운 밤 끝엔 어김없이 가족과 친구들을 잃는 꿈속을 헤매야만 했다. 마음고생 뒤에 만지가 되겠다고 이한 감독에게 장문의 메일을 썼을 땐 잘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라도 생겼던 걸까.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어요. 배우로서의 욕구가 일어난 거죠. 열정적으로 뭔가 하나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렵더라도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만 믿고도 앞으로 가볼 수 있지 않겠냐는 용기로 보였다. <우아한 거짓말>은 엄마 현숙(김희애)과 만지가 각자의 방식으로 천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영화이지만 이한 감독이 “어떤 면에선 만지의 성장담”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역할이 막중하다. 위하는 척 천지에게 건넨 친구들의 우아한 말들이 하나같이 거짓이었음을 뼈아프게 알아가는 언니이자 엄마 곁에서 듬직한 맏딸로 자리해야 하는 게 만지다. 그녀가 <괴물> <즐거운 인생> <라듸오 데이즈> <설국열차>를 통해 줄곧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막내의 빛나는 의연함을 보여줬다면 이번엔 조금 더 묵직한 한수를 놓는 인상이다. “팍 스파크가 튀는 운명 같은 작품을 만난다는 건 내 환상이었구나, 언제나 내 선택과 무거운 책임만 있구나 싶더라고요.”
전작에서 유독 아빠들과의 인연이 깊었던 그녀에게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나눠야 했던 엄마 현숙은 어떤 존재였을까. “어릴 땐 몰랐는데 엄마가 귀여워질 때가 있어요. 범사랑의 의미로 엄마에게 연민을 느껴요. 그런 감정이 연기할 때도 느껴져서 신기했어요.” 무엇보다 김희애와의 조우는 그녀에겐 큰 파문을 일으킨 것 같다. “자연스러움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평소에 다큐멘터리를 많이 봐요. 근데 이번에 선배님이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우린 지금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아니잖아’라고 하시는데 굉장한 충격이었죠. 제 가치관, 방향이 깨지는 경험이었어요. 작품마다 어떤 연기가 베스트인지는 다 다른 거고 어떤 영화엔 좀더 극적인 연기가 필요한 거잖아요. 선배님 덕분에 중요한 걸 배웠죠.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우아한 거짓말’의 반대말은 뭘까. ‘부끄러운 진심’이 그녀의 대답이다. 가감 없이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는 그녀와 이 말이 무척이나 닮아 보인다. 그녀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던져준 <우아한 거짓말>은 연기의 진심을 찾아나선 그녀의 또 다른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