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본 사이 박정범 감독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가 온몸에서 빠져나간 듯 얼굴이 핼쑥했다. “15kg 정도 빠졌다. 고생을 많이 한 것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10kg 뺐다. 얼굴에 살이 붙은 <무산일기>(2010)의 승철과 달리 <산다>의 정철은 배짝 마른 느낌을 줘야 했다.” 살을 뺐든, 살이 빠졌든 <산다>가 만만치 않은 작업인 건 분명해 보였다.
데뷔작 <무산일기>가 그랬듯이 <산다> 역시 박정범 감독이 연출하고, 주인공 정철을 연기한 작품이다. <무산일기> 이후 거의 4년만의 신작.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제목만큼 <산다>는 박정범 감독이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작품이다. <무산일기>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구상에 들어가 올해 초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지난 4년 동안, 시나리오가 바뀐 것만도 무려 50여 차례나 된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 공모에 트리트먼트가 당선될 때까지만 해도 형제 이야기였다. 그다음에 서울 사는 누나와 동생의 이야기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내용이 됐다.” 그게 누나 수연(이승연), 그녀의 딸 하나(신햇빛), 수연의 남동생 정철(박정범)과 그의 여자친구(이은우), 정철이 일하는 강원도의 된장공장 사장(박영덕, 박정범 감독의 친아버지다)과 그의 딸(박희본)이 얽히게 되는 이야기다.
<무산일기>의 탈북자 승철이 한국 사회에서 소외 계층이었던 것처럼 정철과 수연 역시 자본주의의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이다. 매일 삶을 연명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그들이다. 그럼에도 정철은 삶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투철한 친구다.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해서 사는 친구. 된장이 썩어가는 과정이 현장의 비즈니스때문에 벌어진 이야기고, 그게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정철과 수연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위험한 세계다. 자본은 착취하고, 또 착취하기 위해 그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더욱 위험한 건 이런 삶을 살다가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내내 우울했던 것도 그런 불안감에서 오는 공포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앞으로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준비 과정만큼이나 촬영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애초의 계획이었던 30여회차에서 무려 20회차나 더 늘어 50회차가 됐다. “영화의 로케이션 장소인 강원도를 쉽게 생각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데다가 추웠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계획했던 분량을 전부 찍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승철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을 보여줬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많은 인물들을 골고루 안배해야 하는 것도 과제였다. “한 인물을 제대로 그리는 것도 힘든데 이번에는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오래 걸렸다. 인물이 늘어나니 작업 시간도 덩달아 늘어났고, 그 시간을 배분하는 게 힘들었다. 그게 내 오만이자 과욕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또 많이 배웠다.”
박정범 감독은 오래 손에 쥐고 있던 <산다>를 슬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산다>는 올해 안으로 개봉하는 게 목표다. “40회차 넘어가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겠다. 그 깨달음을 다음 작업에 쏟아부어야지. 포기하지 말아야지. ” 그의 말대로 차기작은 벌써 윤곽이 나온 상태다. “폴란드가 될지, 다른 나라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창동 감독이 제작하는 해외 로케이션 영화가 있다. 명필름과 함께하기로 한 작업도 있다. 두편 모두 잘 준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