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람을 잃고 그는 떠났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2014-06-17
글 : 장영엽 (편집장)
장률 신작 <경주>가 공간과 시간을, 생과 사를 그리고 유머를 얹고 리듬을 타며 유영하는 방법

“두만강에서 경주까진 꽤 멀지 않습니까?” <풍경>의 개봉을 앞두고 장률 감독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933호 특집, ‘안개 속의 풍경’). 그 대답이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향 땅에 대한 영화 <두만강>을 만들고 첫 다큐멘터리 <풍경>을 거쳐 <경주>를 연출하기까지의 4년은 장률 감독에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영화 경력을 시작하면서부터 만들고 싶었던 작품(<두만강>)을 기어이 완성했다는 안도감과 영화적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답답함, 영화 연출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이 시기 장률 감독의 마음을 거쳐갔다. 3년의 공백을 가진 뒤 거리를 두고 등장인물을 묵묵히 응시했던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풍경>을 통해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진짜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경주>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장률의 극영화 복귀작이다. 감독으로서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다시금 극영화로 돌아온 그의 작품은 어떤 변화를 담고 있을까. 그게 장률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 <경주>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경주>는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베이징대학 교수 최현(박해일)의 여정을 쫓는다. 상갓집에 들른 뒤 그는 문득 고인이 된 형과 함께 7년 전 들렀던 경주의 찻집에서 춘화를 봤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그림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에 최현은 무작정 경주행 열차에 올라 형들과 함께 갔던 찻집을 다시 찾는다. 춘화와 여주인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찻집을 인수했다는 미모의 여인 윤희(신민아)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최현은 윤희의 저녁 약속에 동행하게 되고, 그들은 예상치 못했던 밤을 맞는다.

장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공간이다. 어떤 지역이 지닌 고유한 개성과 정서가 장률의 영화 속 인물과 이야기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점은 <경주>에서도 변함이 없다. 영화가 처음으로 경주라는 도시의 모습을 공들여 조명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솟아 있는 거대한 능 앞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키스를 하고,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은 천진난만하게 능 위를 뛰어다닌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무덤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생명들. 죽음을 마주할 때 으레 갖게 되는 엄숙함과 두려움과 불편함이 배제되어 있는 이 공간의 기묘한 특성이 장률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러한 공간 속에 <경주>의 주인공 최현이 앉아 있다. 영화 초반부의 그는 욕망이 거세된 인물처럼 보인다. 중국인 아내가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아내가 없는 한국에서도 담배를 코에 대고 냄새만 맡는다. 그러나 죽음과 욕망과 삶이 능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경주라는 도시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 뭔가 다른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능을 바라보며 최현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과거의 어떤 사연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후배 여정(윤진서)을 경주로 부르는 장면은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경주라는 도시 안에서 최현은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는 한국 사람이지만 중국에서의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 정서적으로 중국인에 더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그는 지금 잘 알지 못하는 도시 속에 놓여 있다. 어떤 공간 속으로 완전히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에 대한 장률의 관심은 <경주>에서도 여전하지만, 최현은 장률의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이방인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인물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도구처럼 이용하거나, 사회적 약자이기에 강렬한 욕망과 분노를 안으로만 누르고 살아가던 전작의 인물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가진 최현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음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의 변화가 기존의 장률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유와 웃음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경주>는 장률의 그 어떤 영화보다 대사가 많은 작품이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던, 그보다는 할 ‘여유’가 없었던 그의 인물들은 <경주>에서 종종 분위기에 취해, 별다른 이유 없이,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엉뚱하고 귀여운 말을 쏟아낸다. 최현뿐만 아니라 윤희를 두고 그와 미묘한 경쟁 관계를 이루는 영민(김태훈), 윤희의 소개로 우연히 만난 베이징대 교수 최현을 통해 좋은 교직 자리라도 얻어보려는 박 교수(뮤지션이자 배우 백현진이 멋지게 이 역할을 소화해낸다) 등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그렇다. 상황과 대화를 통해 종종 웃음을 유발하는 <경주>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률 감독의 유머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자, 더욱 넓어지고 있는 그의 영화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엉뚱한 구석도 있는 한 남자의 경주 유랑기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영화의 기묘한 흐름을 이야기하기 위해 장률의 전작 <풍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큐멘터리 <풍경>을 통해 열네명의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 그들이 꾼 꿈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들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이뤄지길 바라지만 종종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마는 욕망과 현실의 조각들이 불균질하게 섞여 있는 다양한 꿈에 대해 듣고 볼 수 있었다. 꿈에 대한 장률 감독의 관심은 <경주>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다. 주인공 최현의 여정을 영화가 차분하게 뒤따르고 있다고 믿을 때쯤, <경주>는 점차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지금까지 최현이 겪었던 모든 것들이 실존하는 경험이긴 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고인이 된 형의 장례식에서 만난 상복을 입은 젊은 형수와 긴 치마를 입은 윤희의 모습은 묘하게 닮아 있으며, 경주에서 처음 만난 여러 인물들은 마치 최현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군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는 철석같이 믿지만 돌이켜보면 이성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현실과 환상의 완만한 조합이 꿈이라고 한다면, <경주>에서 최현이 겪는 사건들은 꿈의 속성을 닮았다. 불현듯 영화에 개입하는 음향효과들은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최현이 관광안내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 화창한 하늘에선 난데없는 천둥소리가 들리며, 그가 7년 만에 다시 찾은 개울가는 다 말라붙은 자갈밭이 되었지만 최현은 그곳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음악은 물론이고 음향효과라고는 실존하는 사물과 풍경에서 비롯되는 소음 정도였던 장률의 영화에서 이렇게 ‘소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적이 있었던가? 예측 불허의 순간에 청각을 자극하는 <경주>의 소리들은 현실과 환상을 잇는 매개체이자, 백일몽 같은 이 영화의 아련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내내 등장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가, 갑자기 핸드헬드의 느낌으로 풀숲을 헤치고 최현에게 다가서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영화의 스탭도, 등장인물도 아닌 제3의 존재가 주인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관객과 영화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할까. 산 사람들 주변을 유적처럼 배회하던 죽음이 불현듯 시선의 주체가 되는 이 장면은 <경주>의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이자 인물과 풍경 사이로 한 걸음 더 다가선 장률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그렇게 경주라는 도시에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산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짧은 로맨스를 조명한 <경주>는 시 한편을 읽고 난 것처럼 정갈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는 영화 속 그림의 문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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