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 그분 맞으시죠?
2014-07-02
글 : 김성훈
글 : 윤혜지
<경주>에서 만난 사람들… 배우 김태훈, 이은우, 신소율, 정인선, 김수안, 제작자 이춘연, 이준동, 뮤지션/영화음악감독 백현진, 국회의원 송호창

<경주>에서 박해일은 1박2일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난다. 배우 김태훈, 이은우, 신소율, 정인선, 김수안, 제작자 이춘연, 이준동, 뮤지션/영화음악감독 백현진, 국회의원 송호창이 그들이다. 이야기에 수시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고, 얼굴을 짧고 굵게 내비치는 사람도 있다. 영화를 즐겨보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조/단역 9명으로부터 <경주> 출연기를 들었다.

깊은 우물처럼
창희 처 역 이은우

“경주에 같이 가자. 첫 미팅이 끝날 때쯤 장률 감독님께서 출연 제안을 해주셨다. 최현(박해일)이 장례식에서 만나는 죽은 형 창희의 아내 역할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장례식장 시퀀스에서 한번, 찻집에서 최현의 꿈속 장면에서 한번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읽은 건 <뫼비우스>(2013)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내가 등장하는 시퀀스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베니스에서 도착한 뒤 곧바로 경주에 내려갔다. 영화제 때문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경주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감독님의 주문은 따로 없었다.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원신 원컷으로 진행된 찻집 신이었다. 카메라가 최현 얼굴에서 시작돼 맞은편의 내게로 팬한 뒤 다시 최현의 얼굴을 비추다가 맞은편을 바라보면 신민아씨가 보여야 하는 복잡한 동선이었다. 나를 찍던 카메라가 최현 얼굴로 팬할 때 (박)해일 선배한테 입모양으로 ‘고마워요’라고 했다. 남편의 죽음을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아내의 마음이었다.”

그 날카로운 첫 키스의 인연이…
다연 역 배우 신소율

“감독님의 전작 <이리>(2008)를 재미있게 봤다. <경주>의 시나리오는 잔잔했다. 윤희의 친구 다연도 조용한 경주 여자였다. 시나리오상에서는 영민(김태훈)을 짝사랑하는 설정이 없었다. 감독님이다연이 영민을 대놓고 짝사랑하는 설정을 넣으면 재미있겠다고 하셔서 현장에서 바뀌었다. 재미있었던 건 영민을 연기한 김태훈 선배는 배우 경력 첫 키스신 상대였다는 사실이다. 손영성 감독의 <약탈자들>(2008)에서 김태훈 선배가 나를 쫓아다니는 설정이었는데 <경주>에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난생처음 경험한 장률 감독님의 현장은 신선했다. 당시 SBS 일일드라마 <못난이 주의보>(2013)와병행하고 있었다. 컷 길이가 짧은 드라마와 달리 <경주>는 대부분 롱테이크였다. 일일드라마에 비해 자유로웠다. 인상적이었던 건 또 있다. 최현, 윤희, 박 교수, 영민, 플로리스트 강 선생과 함께 회식하는 장면은 테이크가 거듭될 때마다 연기의 디테일이 달라졌다.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깨알 같은 유머들이 생겨났는데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정하다 말해주오
최현이 화장실에서 나와 건넌방을 보면 술상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는 50대 남자 역 파인하우스필름 이준동 대표

“촬영 전부터 장률 감독이 ‘형밖에 없다’고 언질을 줬을 때 농담인 줄 알았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배역 이름은 없고, 긴 지문으로만 써 있었다. 최현이 화장실에서 나와 건넌방을 보면 술상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는 50대 남자. 지문에는 없지만 영화에서는 술상에 올라가 노래도 불렀다. 김수희의 <못 잊어>. 술 마시면 늘 부르는 노래다. 술 먹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보통 흥겹지 않나. 하지만 나는 인간의 비애를 구슬프게 드러낸다. 평소 장률 감독이 그걸 눈여겨본 것 같다. (웃음)

촬영은 두 테이크인가, 세 테이크 만에 끝났다. 술 마시면서 촬영한 것처럼 보였다고? 아니다. 술을 안 마시고도 그런 연기를 해냈다는 건 뛰어난 배우라고 봐야 한다. (웃음) 송호창 의원이 나를 감싸안는 모습이 중년 게이 커플처럼 아련해 보였다고? 그게 어떻게 게이 커플인가, 지친 삶을 서로 격려해주는 다정한 선후배지. (웃음)”

정치로 인한 상처 낫게 하는 게 연기
술상남 일행역 새정치민주연합 송호창 국회의원

“<부러진 화살>(2011), <변호인>(2013) 같은 영화에 법률 자문으로 참여한 적은 있었다. 지난해 9월쯤인가. 잠깐 시간이 괜찮으면 경주에 내려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시나리오도 미리 받았고. ‘술상남’ 이준동 대표 옆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장률 감독님이 행동과 대사를 설정해주셨다. 술상 위에서 춤을 추는 이준동 대표를 감싸안은 뒤 우리를 보는 박해일씨한테 ‘잘 봤습니까?’라고 말하는 설정. 이준동 대표가 노래 부르는 건 만날 보는 거라 평소처럼 연기했다. ‘형,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이제 정신 차려라’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촬영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났다. 너무 빨리 끝나서 감독님한테 가서 ‘신민아씨는 몇 시간씩찍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빨리 끝내냐’고 따지기도 했다. (웃음) 이준동 대표로부터 내가 연기에대한 욕심이 많다고 들었다고? 정치를 하면 상처를 많이 받는다. 치유가 필요한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게 연기인 것 같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역할이든지 계속하고 싶다.”

그 소녀의 성장
경주 관광안내소 안내원 역 정인선

“경주는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가본 게 전부였다. 장률 감독님께서 <카페 느와르>(2009)를 인상적으로 보신 것 같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햄버거를 먹던 소녀가 안내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주셨다. 경주를 찾은 최현이 관광안내소에서 만나는 안내원이다. 최현을 중국 관광객으로 착각해 중국어로 인사를 하는 역할이라 시나리오에 중국어 대사가 많았다. ‘감독님, 이거 어떻게 해요’라고 여쭤봤더니 직접 녹음해주시더라. 유창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주문과 함께 말이다.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걸까. 첫 촬영 때 감독님께서 ‘방방 뜨지 말라, 중국어를 더듬거렸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쏟아졌다. 그렇게 맞춰가며 총촬영분량인 두 시퀀스를 하루 만에 다 찍었다. 참, (박)해일 오빠는 <살인의 추억>(2003) 이후 처음 만났다.(정인선은 <살인의 추억>의 엔딩 신에 등장하는 소녀로 출연한 바 있다.) 함께 찍은 적은 없어서 나를 몰라볼 줄 알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자마자 ‘오랜만이다. 이렇게 컸구나’ 하고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했다.”

꼰대, 말이 더 필요한가?
<경주>의 공동음악감독이자 박 교수 역 가수 어어부프로젝트 백현진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는데 버스에서 안 내리고 자버리는 바람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못 갔던 기억이 있다. 난 곡 작업도 해야 해서 경주에 일찌감치 내려가 한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그 기억이 나서 혼자 몇 군데를 걸어서 돌아다녔다. 이런 착한 여행은 참 오랜만이었다. 박해일씨처럼 나도 윤진서씨의 소개로 <경주> 시나리오를 받게 됐다. 시나리오를 보니까 박 교수가 사람이 참 엉망인 거라. 저런 엉망진창인 사람을 연기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라는 얘기는 달리 없으셨다. ‘왜 이런 사람 꼭 하나씩 있지 않아?’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꼰대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우리 같은 사십대들에게 자주 보이는 패턴이라고 생각했다. 중얼대는 건 거의 즉흥연기였다. ‘연남동’ 얘기도 그러다 나온거고. (웃음) 대사에 대해선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오히려 엔딩곡 가사는 감독님이 이것저것 바꾸셨다. 나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내 가사를 바꿔본 적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경험이라 참 재밌게 했다.”

호흡을 공유한다는 것
형사 영민 역 김태훈

“우리 현장도 경주란 도시의 편안함과 닮아 있었다. 이전에 찍은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그대로 살려서 촬영했다. 능에 올라갔다가 들켜서 묘지기(이춘연 대표)가 영민 얼굴에 플래시를 비추는 장면이 있다. 나도 모르게 자살사건 수사 때문에 왔다고 횡설수설 변명하는 장면이다. 감독님이 자살사건 얘길 뜬금없이 여기 와서 하는 게 재밌다고 하시더라. ‘자살사건의 용의자 때문에 왔다’고 둘러댄 내 대사를 받아서 이춘연 대표님이 ‘자살사건의… 용의자요?’ 하는 건 더 재밌잖나. 그런 식으로 같이 만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능에서 쫓겨나 삼거리에서 혼자 삐쳐서 가는 장면은 가장 마지막에 찍었다. 삼거리에서 헤어져야 하는데 정말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 장률 감독님이 모니터를 보시다가 그 걸음이 이십대 후반이었을 때의 당신 걸음걸이 같다면서 좋으셨다는 거다. 그럴 때 배우는 정말 행복하다. 내가 뭔가 무작정 느껴서 했는데 그걸 배우나 스탭이 다 열고 받아줄 때, 예상치 않게 나오는 진심이나 호흡을 상대와 공유한다고 느낄 때 정말 좋았다.”

오잉? 저놈들이?
능을 지키는 남자 역 씨네2000 이춘연 대표

“내 얼굴 몽타주가 그 양반 입장에선 독특하게 보였나보다. 허허. 처음부터 묘지기를 제안받았다. 차례차례 호통치는 것도 원래 대사가 있긴 했는데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라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했다. 경주 묘지기가 할 일이 뭐 있겠나. 저쪽에서 소주나 한잔하고 있다가 ‘오잉? 저놈들이?’ 하는 거지. 나도 스무편 이상 영화 만든 사람이라 시나리오 보면 어떻게 찍는지 대충 안다. 시나리오 받고 대사 외우면서 내가 이렇게 등장하면 카메라가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으면 되겠구나, 예닐곱컷으로 나눠서 당연히 이렇게 찍을 것이다, 예상하고 현장에 갔다. 웬걸. 목소리부터 등장시키는 거다. 그러더니 한컷으로 딱 찍어버리더라고. 또 사실 묘지기 역할이 뭣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서너번을 찍더라니까. 어차피 거의 편집될 줄 알고 내가 그냥 오케이, 오케이해서 끝내버렸다. 그런데 안 자르고 다 넣었다고 하네. (웃음) 장률 감독이 촬영하는 모습을 좀 지켜보면서 많이 느끼고 많이 배웠다. 나는 굉장히 교과서적으로, 해오던 것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 생각했지. 역시 이 사람은 거장이라 다르다고! (웃음) 장률 감독이 괜히 이것저것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속엔 무엇인가 꼭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직 <경주>는 못 봤지만 나도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일 거다.”

박해일 아저씨가 세뱃돈도 주셨고~
모녀의 ‘녀’(女) 역 김수안

“<경주> 스크립터 오빠가 <콩나물>의 윤가은 감독님이랑 친구여서 오디션에 데려가줬다. <경주>를 <신촌좀비만화> 중 <피크닉>보다 먼저 찍었다. 지난해 여름에 찍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감독님이 해주신 말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박해일 아저씨한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는 대사였다. 입에다 손 대고 담배 흉내내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었다. 같이 찍으면서 박해일 아저씨가 엄청 잘해주신 기억이 난다. 올해 1월에 <제보자> 촬영하면서 박해일 아저씨랑 또 만났는데 아저씨가 반갑다고 세뱃돈도 주셨다. 그래서 이제 아저씨랑 아주 친하다. 경주는 태어나서 처음 가봤는데 서울이랑 비슷하면서 뭔가 달랐다. 뭐가 달랐냐고? 음… 서울엔 뭐가 막 켜져 있는데 경주엔 뭐가 안 켜져 있어서 똑같아 보이면서도 달라 보였다. 살기 편한 건 서울인데 경주는 경치가 예뻐서 살아보면 괜찮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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