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내 얘기는 ‘사랑과의 전쟁’이야”
2014-06-17
글 : 김성훈
정리 : 임정범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윤종빈 감독, ‘친구’ 장률 감독에게 <경주>를 묻다

장률 감독과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의 윤종빈 감독은 둘도 없는 술친구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 열이면 열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나이도, 작품 스타일도, 관심사도 다른 두 사람의 조합이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군도>의 음악과 최종 믹싱을 진행하느라 바쁜 윤종빈 감독에게 장률 감독을 인터뷰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뭔가 다른 질문을 던져, 뭔가 다른 대답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주 술을 마시는 사이이니 평소처럼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지 않을까. 한데, 두 사람의 대화는 예상과 달리 진지하게 이어졌다.

윤종빈_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처음인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장률_사람이 변하게 된 계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데.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 시기에 갑자기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고 할까. 거울 속에서 추억도, 상상도, 허구도 다 나오니. <경주>는 나 자신에게 좀더 들어간 작품이 아닌가 싶어.

윤종빈_계급과 정치는 감독 장률의 전작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어요. <경주>는 그 두 가지가 배제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장률_정치와 계급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고. 전작과 다른 길을 가야겠다 그랬던 건 정말 아니고. <풍경>을 찍기 전에 영화를 계속해야 하는가, 그만둘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습관적으로 그냥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 최현(박해일)은 대학교수잖아? 만나는 사람도 최하층 사람들이 아니고. 거기에 계급성을 넣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도식들로 인물을 만들면 성실한 감독은 아닌 거지.

윤종빈_경주는 어디서나 능을 볼 수 있는 도시잖아요, 죽음이 도처에 널린. 이 도시를 통해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싶었나요.

장률_1995년 경주에 처음 갔을 때 충격적이었어. 어느 나라에나 왕릉이 있지만 일상과 단절되어 있지. 과장하자면 경주는 왕릉이 코앞에 있어. 더 과장하자면 냄새도 날 것 같은. 경주 사람들이 이 냄새를 어떻게 참는지 의아해하면서 도시를 돌아보았는데 그 풍경이 자연스러운 거야. 당시에는 문화재 보호가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능이 놀이판이었고, 연애판이었어. 능 옆에서 형들과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때 능이 참 좋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중국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태도와 확실히 달랐어.

윤종빈_중국에서는 어땠는데요.

장률_중국에서는 능 위에서 놀면 싫어하고, 그렇게 노는 사람들도 없어. 죽음은 엄숙해야 하고, 일상과 거리가 먼 것이라. 능과 사람의 관계가 경주와 달라. 반면 경주의 능은 매우 친숙하고 자연스러워서 죽음도 이렇게 부드럽겠구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좋았어.

윤종빈_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요.

장률_<풍경>이란 영화가 영향을 준 것 같은데. 꿈과 현실의 넘나듦을 체험하면서 그때 그 경주가 생각나는 거야. 그러면 찍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나리오도 생각하고, 경주도 가보고.

윤종빈_출연진을 전문 배우로 구성한 것도 처음 아닌가 싶어요.

장률_전작은 전문 배우를 거의 쓰지 않았지. <경주>의 인물들은 성격이 복잡해 배우들만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마침 그때 박해일을 만났어. 박해일을 마주하고 술을 마시는데…. 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귀신이 온다? 좀 귀신 같아. 경계를 넘나드는 느낌을 받았어. 그러고 신민아도 만났는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깊이가 있었어. 이 두 배우가 있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지.

윤종빈_박해일 선배는 감독님과 비슷하게 분장시킨 것 같아요.

장률_나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 교수(백현진).

윤종빈_아닌데. 박해일 선배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던 신민아를 차마 안지 못한 채 혼자 블루스를 추는 장면에서 딱 감독님 생각이 나던데요.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장률_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현 교수랑 나랑 비슷하다면서) 감독님,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 실제로 난 안 그러는데. (웃음)

윤종빈_감독님과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한국말을 못하는 척하는 것 같아요. 특히, 불리할 때.

장률_이럴 때는 못 알아듣는다. (웃음) 신민아는 어땠나.

윤종빈_감독님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는 풍경이었어요. 대부분 배우들이 장률 감독님의 관념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 하나. 생동감이 없는 채로 말이죠. <경주>는 정반대예요. 감독의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데다가 생기 넘치게 움직이기까지 해요. 배우들 대부분이 그랬어요. 특히, 신소율은 감독님의 세계에 눌려 있지 않아 인상적이었어요.

장률_신민아는? 신민아의 연기는?

윤종빈_한줄로 정의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어요. 신비로움. 그게 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요. 윤희가 어떤 여자인지 쉽게 설명됐다면 이야기의 힘이 떨어졌을 거예요.

장률_영화에서 두 남녀의 리듬은 신민아가 장악했어. 일상생활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은 리듬을 장악하는 것 같아.

윤종빈_박해일과 신민아가 각각 연기한 최현과 윤희의 사연은 친절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둘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으며, 답답한 이유가 무언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장률_그 사람들의 사연을 만들 순 있어. 그런데 만들지 않았어. 실제로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서로를 잘 알 수 없잖아. 짧은 시간 만나도 느낌 있는 사람이 있어. 최현이나 윤희나 서로의 일부를 두번의 낮과 한번의 밤 동안 알아도 너무 안 거야. 그 느낌만 살리고 더 많은 설정은 넣지 말자, 했지.

윤종빈_찻집에서 상복 입은 여자, 죽은 형의 아내가 박해일 선배를 증명사진처럼 바라보는 신이 있잖아요 . 그렇게 찍은 이유가 뭔가요.

장률_꿈을 꾸는 장면을 찍는 방법은 비슷하잖아. 보통은 누워 있는 모습으로 연출하는데 그건 너무 영화 같아. 정신이 나간 사람은 정상적인 모습을 담아낼 때 가장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엉뚱한 행동을 할 때 엉뚱하게 그려내는 건 너무 정상적이잖나. 그래서 증명사진처럼 촬영했어.

윤종빈_최현이 박 교수에게 “제가 하고 있는 학문(동북아정치학)은 똥같다”고 얘기하는 부분은 자전적인 이야기 같아요. <풍경>을 찍을 때 영화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한 적 있지 않나요?

장률_그래도 영화가 똥이라고 말하진 않았는데. (웃음)

윤종빈_낯선 공간에서 남녀 사이의 성적 긴장감이 생긴다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특이한 건 성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섹스 생각만, 시도만 많이 할 뿐이다. 최현이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촛불을 켜놓는 장면이 재미있었어요.

장률_방문을 잠그지 않고 약간 열어놓은 윤희는 참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 남자가 참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전작이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지? 내 얘기는 ‘사랑과의 전쟁’이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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