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코믹스(comics), 일본에 망가(manga)가 있다면 한국에는 만화(manhwa)가 있다. 이들은 흔히 만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별반 구분 없이 소비되지만 조금만 파고들어보면 각기 다른 결을 지닌 독립 장르라 봐도 무방하다. 탄생부터 성장과정까지 다른 문화적 배경이 녹아들어 있어 사실상 대체 불가능한 역사적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웹툰을 여느 인터넷 만화와 구분지어야 하는 이유다.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인 웹툰은 이제 단순히 웹을 기반으로 서비스되는 만화의 의미를 넘어섰다. 웹툰이라는 말에는 웹툰이 공급되는 환경, 다양한 장르와 다채로운 문법들, 소비자들의 이용 형태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2003년 다음의 ‘만화속세상’ 코너에 정식으로 연재를 시작한 이래 웹툰은 포털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초기엔 포털 사이트의 서비스 유인책으로 시작했지만 2005년 최대 규모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던 네이버가 웹툰 서비스를 본격화하면서 저변이 급속도로 확대됐다. 시장이 커지자 자연스럽게 형태도 풍성해졌고 과감하고 이색적인 시도를 한 작품들도 점차 늘어났다. 놀 수 있는 판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침체를 거듭하고 있던 잡지 시장과 맞물려 웹툰은 젊은 작가들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장르의 다양화는 다시금 새로운 독자의 유입을 불러왔고 기존의 잡지에서 활동 중이던 역량 있는 작가들도 흐름에 동참했다. 강도하, 양영순 등 기존 만화계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의 경험이 웹툰에 녹아들며 하나의 장르로서의 견고함이 더해져갔다. 웹툰이란 이름의 생태계는 그렇게 탄생했다. 몇 그루 묘목에서 시작해 울창하게 거듭난 만화의 숲. 숲은 정해진 영역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한다. 때로 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다가오기보다 어느 순간 극적으로 도약하곤 하는데, 웹툰 탄생 10년이 넘은 지금 한국의 웹툰은 또 다른 단계로 진화 중이다.
문제가 변화를 이끌다
웹툰 시장은 분명 거대하지만 이른바 ‘공짜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규모의 정확한 측정은 어렵다. 2014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행한 ‘2013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대략 1500억원으로 추산되는데, 아직 측정의 기준이 미비해 환산은 까다롭지만 일단 이용자 규모만큼은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2014년 코리안클릭 기준으로 네이버와 다음의 웹툰 사용자 수는 월 630만명, 페이지 뷰는 9억회에 달한다. 한데 주목할 만한 점은 2012년에는 월 1천만명을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승승장구한다던 웹툰산업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반대다. 대형 포털을 기반으로 하던 웹툰의 이용창구가 모바일, 중소 웹툰 전문 사이트 등으로 다변화되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웹툰 시즌2의 시작이다.
최근 웹툰 시장의 변화를 크게 4가지로 요약한다면 콘텐츠의 유료화, 플랫폼의 다변화, 작가 에이전시의 역할 증대, 작품의 표현영역과 장르 확대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크고 작은 변화를 언급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특히 이 4가지 지점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웹툰은 넓은 사용자 저변에 비해 산업모델로는 아직 초기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산업 규모와 정확한 수익 모델이 측정되지 않는 것이 (혹은 매번 다르게 측정되어 혼돈을 가져왔던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이는 애초에 웹툰이 대형 포털 사이트 기반의 무료 콘텐츠로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다. 시장과 저변 확대에 주력한 초기에는 이러한 형태에 별다른 무리가 없었지만 산업 규모가 커지고 웹툰 작가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수익 모델에 대한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례로 네이버와 다음의 신진 작가 발굴 시스템은 기회의 제공과 함께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미래가 불분명한 무임금 노동을 유도한다는 그늘도 드리웠다.
이 밖에도 애초에 허브 역할을 담당해온 포털의 관리 부재도 도마 위에 올랐다. 1명의 기획자가 대략 20~30명의 작가를 관리하는 체계는 작품 전체의 질적 저하를 불러온다는 지적이었다. 이는 포털의 관리정책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 자체의 허점이랄 수 있는데, 처음부터 사이트 유인책으로 웹툰을 활용해왔던 포털은 기존 잡지 매체처럼 철저한 작가 관리 시스템과는 달랐다. 단적인 예로 2차 판권의 경우에도 대부분 작가에게 일임하는 형태였는데, 웹툰이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으로 활용되는 등 영역이 확장되고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자 마냥 손을 놓을 수만은 없게 됐다. 하지만 포털 내부에서 이를 모두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콘텐츠 전반의 질적 저하, 표현 수위의 제한, 유해 콘텐츠에 대한 관리 부족이라는 또 다른 문제로 번져갔다. 비유하자면 잘 자란 만화의 숲은 이제 좁은 땅에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드리운 짙은 그늘이 새로운 나무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태, 바야흐로 새로운 땅을 찾아 숲을 넓혀야 할 시기가 찾아온 셈이다.
플랫폼 무한경쟁시대
그런 측면에서 최근 웹툰 시장의 4가지 변화는 모두 기존 웹툰 시장이 안고 있던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 콘텐츠의 유료화는 불분명한 수익 모델 문제, 플랫폼의 다변화는 양대 포털 사이트 중심으로 돌아가는 독과점 문제에 대한 시장의 대답이다. 에이전시 역할 확대나 표현 수위와 장르 다변화도 마찬가지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포털 사이트인 만큼 표현 수위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제약이 적지 않았고 시장 지배적인 포털이 원하는 방향에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 콘텐츠로 인해 아마추어 작가들의 권리와 수익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작품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정 연령층, 특정 소비자를 위한 유료 콘텐츠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이유다. 다만 양대 포털 이외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그때그때의 대응 외에는 전면적인 조치를 취하기 힘들었다(게다가 ‘질적하락론’은 일부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웹툰 시장의 다양성과 질은 전체적으로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켰다고 보는 편이 정당하다). 그런데 요 몇년간 극적인 변화의 기회가 찾아왔다. 다름 아닌 스마트폰의 보급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웹’툰을 ‘앱’툰으로 만들었다. 이제 상당수 사람들이 PC를 사용해 웹툰에 접근하는 대신 스마트폰에서 웹툰을 본다. 코리안클릭에 따르면 네이버 웹페이지 방문자는 2012년에 비해 다소 줄어든 반면 모바일을 통한 방문자는 1690만명으로 51%가량 증가했고 이는 웹툰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에 따라 최근 통신사들은 T스토어, 올레마켓 등을 서비스하며 웹툰의 주요 통로로 급부상하고 있고 기존 포털들도 모바일 서비스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플랫폼의 이동이 소비패턴에도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박석환 만화평론가는 모바일 플랫폼의 등장이 웹툰의 유료화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라고 말한다. “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관습의 문제였다. 한번 무료 콘텐츠로 고착된 상태에서 결제 과정의 피곤함과 곤란함을 넘어설 정도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건 쉽지 않다. 유료화의 어려움이 있던 웹 환경에서 모바일로 넘어오자 자연스레 유료 서비스로 유도가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모바일로 서비스되는 웹툰이 처음부터 장밋빛 전망으로 물들었던 건 아니다. 웹툰의 전면 유료화를 외치며 야심차게 준비한 카카오페이지의 실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다. 2013년 상반기 카카오페이지는 태풍의 눈이었다. 개장 이전 등록된 콘텐츠만 8천개에 달할 정도로 기대를 모은 프로젝트였고 허영만 작가의 <식객2>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대 속에 출발했다. 하지만 카카오페이지는 결국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고 이후 e-book 서비스 중심으로 개편, 2014년 4월20일부터 ‘카카오페이지 시즌2’로 다시 도전 중이다. 문제는 접근성이었다. 카카오톡과 연동되지 않아 기존의 가입자를 끌어오지 못한 데다 모바일 마켓을 새롭게 구축하려 한 탓에 예상외로 높았던 사용자 진입장벽을 넘지 못했다.
여기서 진입장벽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이어진다. 애초에 웹툰의 유료화에 사람들이 반감을 나타낸 것은 웹툰이 당연히 무료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웹툰의 연장선에서 이전 모델과 비교되며 상대적인 거부감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모바일 서비스의 연장에서 바라보면 장벽은 의외로 낮아진다. 이미 각종 모바일 서비스에서 콘텐츠를 구입하던 것에 익숙해져있던 사람들은 콘텐츠의 질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언제든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 말하자면 콘텐츠 자체는 기존 웹툰의 연장이지만 비즈니스 모델은 이미 구축된 모바일 서비스의 연장에 놓고 웹툰의 유료화라는 심리적 장벽을 우회해서 돌파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레진코믹스의 코인 방식 결제 전략은 영리함이 돋보인다. 기존 게임 결제 과정과 유사한데 1회당 얼마가 나가는지 명확하게 계산되는 대신 1회당 코인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처리해 반감을 최소화한 것이다.
환경의 변화는 화려한 폭죽처럼 연쇄반응으로 이어진다. 유료 콘텐츠의 등장이 용이해지자 유료 콘텐츠 소비자에 맞는 차별화된 웹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특정계층과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자 그간 수면 아래 억눌려 있던 성인 웹툰에 대한 욕구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여기서 성인 웹툰이란 단순히 야한 만화란 말이 아니다. 어른들이 볼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깊이를 갖췄다는 의미에서의 ‘성인 웹툰’이다. 이미 존재해왔던, 하지만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수요가 합리적인 시장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자 웹툰 시장은 단지 규모의 차원뿐만 아니라 장르, 접근성, 표현방식 등 내적인 부분에서도 극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현재 웹툰시장은 무료 웹툰 중심의 광고 수익 모델에서 벗어나 유료 애플리케이션, e-book 서비스 등으로 각기 다른 비즈니스 모델들이 차례로 구축되고 있는 상태다. 이와 더불어 웹툰 서비스 전문 사이트들도 속속 등장해 저변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레진코믹스, 티테일, 판툰, 곰툰, 탑툰 등 신규 웹툰 서비스들은 유료화의 장벽과 표현 수위의 문제 등 초반의 우려와 달리 빠른 속도로 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특히 레진코믹스는 2013년 6월 안드로이드 앱을 출시한 이래 1년 만에 110만명의 회원과 270여편의 작품을 연재하는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 안드로이드, ios 앱 모두 매출 1위를 기록했고 대표작 중 하나인 네온비 작가의 <나쁜 상사>는 지금껏 누적수익 28억원을 거뒀다. 성인 웹툰의 가능성과 유료 웹툰의 시장성을 증명한 것이다. 이후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후발주자들로 인해 현재 웹툰 플랫폼은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했다. 대형 포털도 이제는 작가들을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는 상태에 직면했으며 신인 작가 발굴, 새로운 독자 유입을 위해 사이트별로 개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개방된 플랫폼으로 신인 작가들을 끌어들이려는 티테일과 판툰, 모션 코믹스라는 차별화된 전략을 들고 온 곰툰, 성인 웹툰 전문의 탑툰 등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골라보는 재미를 넓히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과 플랫폼을 골라볼 수 있는 폭넓은 환경을 반길 일이지만 2013년 10월 문을 열었다가 최근 서비스를 마감한 카툰컵의 경우처럼 한순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기도 하다.
웹툰 2기, 새로운 10년을 위한 이정표
현재의 웹툰 시장의 지각변동은 외부적인 환경 변화(모바일 환경의 구축)로부터 촉발된 우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내부에는 기존 웹툰 시장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분출되지 못했던 욕망이 자리한다. 사실 애초에 웹툰의 탄생과 성장도 우연이었다. 웹툰은 출판만화의 대체재로 육성되거나 처음부터 인터넷 환경을 이용하려 마음먹고 만들어진 콘텐츠가 아니다. 인터넷 환경의 변화와 참여에 능동적인 세대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희귀한 사례다. 지금의 변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부적인 문제가 외부 균열의 틈새에서 출구를 발견한 극적인 형태다. 점진적 진화보단 ‘도약진화’에 가깝다.
이러한 극적이고 급격환 변화의 현장에는 문제가 한 박자 늦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현재 웹툰 시장의 지각변동은 과도기의 열정과 혼란이 뒤섞여 있다. 대형 포털 일변도의 틀에 익숙해져 있던 웹툰 독자 입장에서는 실로 반길 일이지만 희망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순간 어느 쪽으로든 기울 수 있다. 플랫폼의 무한경쟁체제는 콘텐츠의 과잉 생산을 야기할 수도 있고 작품 전반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얼마 전 문제가 된 키위툰의 불공정 계약 사례처럼 서로 간에 합의된 규칙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잡음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과거 10년간 축적된 문제들이 해결된 자리에 새로운 문제들이 고스란히 들어찰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떤 미래로든 갈 수 있는 분기점이고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웹툰 작가들의 매니지먼트에서 작품 기획, 에이전시까지 총괄하는 재담미디어의 황남용 대표는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에 달한 것 같다. 플랫폼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은 에이전시 등 전문 제작사가 협력해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 서로간의 역할분담이 중요한 시기”라며 상생과 협력을 당부했다. 박석환 만화평론가는 “현재 소비층의 임계점이 여실하다는 판단하에 글로벌 서비스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내수 시장은 시장의 안정성을 꾀하되 해외의 소비자층을 늘려서 국내의 과도한 생산체계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라며 현재 네이버가 주력하고 있는 글로벌 웹툰 서비스의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 현재 활동 중인 웹툰 작가로는 처음으로 한국만화가협회장에 취임한 이충호 작가는 “일본 만화가 잡지 시스템 아래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에 반해 한국 만화 시장은 대본소, 대여점, 잡지 등 급격한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 만큼 앞으로를 예측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작가적 역량과 욕심, 이야기꾼으로서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라며 창작자의 기본자세에 대해 역설했다. 출판만화의 성장과 몰락을 직접 경험하고 웹툰으로 무대를 옮겨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만화 시장의 격변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의 말에 실린 무게가 남다르다. 조만간 지금의 들끓는 변화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안정화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당장의 즐거운 변화를 충분히 만끽하되 지금이야말로 향후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변화는 불현듯 찾아오고 후딱 지나가버리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