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예능,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CF. 이쯤 되면 ‘포위됐다’는 표현을 써도 될 법하다. 2014년의 한국은 모델 출신 엔터테이너들에게 ‘포위’됐다. 더이상 모델은 패션지 화보나 의류광고, 런웨이쇼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안방극장이든 영화관이든 유명 스타들이 모여드는 파티에서든, 이들 ‘모델테이너’는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처에 존재한다. 이 말이 잘 실감나지 않는다면 모델로 출발해 스타덤에 오른 일련의 인물들을 떠올려보자. 최근 가장 주목받는 한류스타로 손꼽히는 이종석(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과 김우빈(드라마 <상속자들>, 영화 <친구2>)은 몇년 전만 해도 국내 패션쇼 런웨이를 걷던 모델이었다. 아이돌 스타와 배우들이 주로 출연하는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의 새로운 인기남으로 떠오른 홍종현, tvN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3>를 통해 여성 시청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성준과 모델 시절부터 스타급의 팬층을 거느리던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와 영화 <패션왕>의 안재현, 올 하반기 개봉예정인 임필성 감독의 영화 <마담 뺑덕>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솜 등이 모두 모델 출신의 주목받는 배우 겸 엔터테이너들이다.
자연스런 일상 연기 원하는 트렌드에 부합
사실 모델로 경력을 시작해 스타가 된 사례는 과거에도 종종 있어왔다(자세한 내용은 62~63쪽 참조). 지금은 ‘배우’로 기억되는 수많은 스타들- 차승원, 정우성, 이정재, 이나영, 김민희, 공효진, 조인성, 강동원 등- 이 상업 광고와 패션쇼를 거치며 신선한 얼굴을 찾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스타의 등용문으로 통하던 영화, 드라마 산업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외적으로는 스타성이 충분하나 연기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지 못했을 거라는, 모델 출신 배우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당대에 활동하던 연기자들에 비해 지나치게 큰 키도 문제가 되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90년대 중/후반 데뷔한 대표적인 모델 출신 배우 차승원조차 “남자 모델 중 방송에서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징크스가 있다”(98년 <경향신문> 인터뷰 중)며 엔터테인먼트 업계 진출에 대한 어려움을 피력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델로 활동한 과거를 드러내지 않고 신인배우로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포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익명을 요구한 매니지먼트 관계자 A는 모델 출신의 소속사 배우와 함께 어느 주말드라마 현장에 갔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드라마 업계에 오래 몸담아온 분들, 특히 나이 지긋한 남자 프로듀서 분들은 확실히 모델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셨던 것 같다. 모델 출신 배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모델 출신의 선배 연기자들이 성공적으로 업계에 안착하고, 케이블 채널과 종합편성채널 등 엔터테이너를 수용하는 플랫폼이 확장되며 모델테이너에 대한 선입견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장윤주, 한혜진, 송경아, 안재현 등 소속)에서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박신의 차장은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스타일로그> 등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는 인기 패션 프로그램이 패션과 모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전반적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온스타일, 패션엔 등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채널들이 생겨나며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모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졌고, 대중으로선 현재 어떤 모델이 활동하며 또 주목받는지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거다. 그리고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의 장윤주나 <스타일로그>의 조민호처럼 패션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나선 모델들은 진행 능력 또한 검증받을 수 있다. 케이블 패션 채널의 방송을 보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꽤 많다.”
뛰어난 연기력을 요하는 연기보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연기를 선호하는 최근의 트렌드도 모델 출신 연기자들이 보다 수월하게 활동할 계기를 만들어줬다. 김영광, 최태환 등이 소속된 초이엔터테인먼트의 최주수 대표는 “최근에는 관계자들이 이른바 ‘센’ 연기보다 내추럴한 연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경력이 적지만 연기에 대한 감각이 있는 모델 출신 연기자들은 금세 현장에서 적응하기도 하더라”는 말을 전한다. 이미 검증된 외모도 큰 장점이다. 영화 <패션왕>에 모델 출신 배우 안재현을 캐스팅한 오기환 감독은 “연기자의 자질을 판단할 때 신체 50, 내면 50을 본다고 하면, 모델은 이미 신체적인 기준은 확보한 셈이다. 일반 연기자들이 신체적인 조건과 내면적인 소양을 함께 단련하는 동안, 모델 출신 배우들은 절반은 확보하고 가는 셈이니 경쟁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배우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 스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업계 관계자들이 모델을 눈여겨보는 이유 중 하나다. “<패션왕>의 원호에 누구를 캐스팅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안재현이라는 모델을 꼭 한번 만나보라고 학생들이 그러더라. 30대 이상의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잘 알지 못하는데, 10대, 20대 초반의 아이들 사이에선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였던 거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모델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때 알았다.” 오기환 감독의 말처럼 모델의 주요 팬층은 10대, 20대 여성들이다. 흥미롭게도 모델에 대한 이들의 열광은 남자 아이돌 그룹에 쏟는 애정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연기하는 아이돌이 늘어나면서 모델 출신 배우들의 진입 장벽도 한층 낮아진 게 아닌가 하는 얘기를 관계자들끼리 나눌 때도 있다. 비주얼적으로 뛰어나고 스타성이 있으며, 팬층이 겹친다는 점에서 연기에 도전하는 아이돌과 모델은 닮은 점이 많다.” 매니지먼트 관계자 A의 말이다.
배우/가수 매니지먼트사들도 모델 연기 수업에 뛰어들어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모델들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며,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도 발빠르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배우 매니지먼트사인 나무액터스와 HB엔터테인먼트는 얼마 전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에스팀 출신의 모델 중 연기자로 활동할 의향이 있는 이들에게 배우 전문 매니지먼트사의 특화된 관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HB엔터테인먼트의 박형준 이사는 “(에스팀의) 모델 중에서도 연기에 대한 의욕이 강한 친구들”을 우선적으로 영입할 예정이며, “외모와 개성, 발음과 움직임” 등 해당 모델이 배우에 요구되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앞으로 HB엔터테인먼트와 제휴를 맺는 에스팀의 모델 출신 연기자는 드라마와 영화 등의 캐스팅 과정에서부터 홍보 단계까지 매니지먼트사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게 된다.
한편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3대 기획사’ 중 하나로 손꼽히는 YG엔터테인먼트는 올해 초 모델 에이전시 케이플러스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그동안 YG가 주력하던 음악 콘텐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연기자 부문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배우나 셀러브리티로 빠르게 성장할 자질”을 갖춘 모델들을 양성하는 것 또한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추진하게 되었다는 것이 YG 유해민 사업개발본부장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모델들의 역할은 어떤 브랜드를 대표해서 캣워킹을 하는 거잖나. 모델의 필수 자질인 긍정적인 요소와 애티튜드가 몸에 배어 있더라. 특정 브랜드를 대표하려면 건강미도 넘쳐야 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야 한다. 기본적인 머티리얼이 훌륭한 거다. 더불어 무대에 서는 교육도 많이 받고, 기본기가 탄탄하다보니 조금만 재능이 있으면 연기자나 셀러브리티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에 따라 YG와 케이플러스는 지난 8월1일부터 모델 출신 연기자 지망생들에게 연기 수업을 제공하는 ‘YG케이플러스 액터스쿨’의 운영을 시작했다. 이 연기반을 총괄 담당하는 이는 YG에 소속된 배우이자 모델 출신 선배 연기자 차승원이다. 유해민 본부장은 “배우 지망생들에겐 대선배인 차승원의 연기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회사로서는 잠재력이 좋은 친구들을 미리 확보하는 구조를 프로세스화”하는 것이 YG케이플러스 액터스쿨의 설립 목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YG가 구축한 연예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모델 출신 배우들이 방송에 노출되는 기회도 지속적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아직 보여줄 것이 더 많다
이처럼 모델이라는 매력적인 엔터테이너의 성장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변화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더 많은 관계자들이 모델을 원할수록,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모델들이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진입할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이유에서다. 매니지먼트사 관계자 A는 “케이블 프로그램 관계자들에게 들으니 준비 안 된 모델 친구들이 배우 오디션을 보러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번 보자, 해서 갔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연기자와 모델을 병행하는 게 최근의 트렌드라 해도, 배우를 너무 쉽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한다. 몇년 전 아이돌 출신 배우들의 활약이 주목받을 때 너도나도 연기자를 지망했던 것처럼, 모델테이너에 대한 과도한 거품이 오히려 이 업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는 것이다. 모델의 활동 영역이 다양해지는 만큼, 모델의 경계 또한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을 걱정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초이엔터테인먼트의 최주수 대표는 “예전에는 유명 잡지나 광고에 출연하고, 또는 런웨이에 서는 이들을 모델이라 불렀는데 최근에는 그 정의가 굉장히 광범위해진 느낌”이라고 한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등이 보편화되며 직업 모델은 아니지만 유럽의 패션쇼장, 셀러브리티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해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패셔니스타들이 존재하며, 이들과 모델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의 대중화는 반갑지만, 검증되지 않은 이들이 업계로 유입되는 것이 모델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모델테이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지속될 전망이다. 독특한 개성과 매력으로 무장한 이 새로운 유형의 엔터테이너들은, 아직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해야 오래 일한다
연기 수업 받는 모델 이송이 인터뷰
지난 8월6일, 연기 수업이 한창인 YG케이플러스 액터스쿨을 찾았다. 연기자를 꿈꾸는 모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27살 모델 이송이의 답변을 들어보자.
-동료 모델들은 연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자연스럽게 연기자와 모델, 연예인과 모델 사이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다가 최근 들어 많은 변화가 짧은 시기에 몰려왔다. 예전에 비해 몸매나 피부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고, 연기 수업을 받는 모델도 많아졌다. 나 역시 지인들을 통해 엔터테인먼트사로 옮길 생각이 있느냐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나는 에스팀에 있다가 YG엔터테인먼트와 합병한 케이플러스로 왔다.
-최근 들어 남성 모델은 배우로 진출한 사례가 많지만 여자 모델의 연기 진출은 손꼽을 정도다. 오히려 여자 모델은 케이블, 예능 프로그램 패널로 많이 활동하는 것 같다.
=지금 패널로 활동 중인 한혜진, 송경아, 이현이 언니는 키가 정말 크다. 아무래도 연기하기엔 조금 큰 키라는 생각도 들지만 장윤주 언니가 영화 <베테랑>에, 혜진 언니가 드라마 <패션왕>에 출연한 것처럼 이미지에 맞는 역할은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플러스에선 내가 좀 작은 편(172cm)이다. 키가 좀 작다 싶거나 연기에 적합하다 싶은 친구들은 회사에서도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모델로 일하면서 최근 느끼는 변화는.
=2009년에 데뷔했는데 지난 4~5년 동안 패션 산업의 규모가 굉장히 커졌다. 그러면서 모델의 수명도 길어졌다. 윤주 언니나 혜진 언니가 다양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런 변화가 모델의 수명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법 같기도 하다.
-롤모델이 있다면.
=차승원 선배님을 존경하고, 공효진 선배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