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체험 극과 극
전 |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스스로 어눌하다고 생각해?
류 | 이 정도면 똘똘하지, 뭐.
전 | 아니 그러니까, 나는 빈 구석이 많다. 빈틈이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류 | 빈틈이야 많지.
전 | 근데 내가 보기에 류승완의 빈틈은 계산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류 | 에이? 빈틈이 왜 하필.
전 | 아님 말고. 가끔 존경스러울 때가 있어. 나이 어린 감독이라는 거 처음엔 몰랐거든. 그런데 현장에서 나이 많은 선배 배우들 모셔다 뭘 끄집어내는 걸 보면, 카리스마라고 하기는 좀 뭣하고 뭔가 ‘기술’이 있는 거 같기도 해.
류 | 그건 내가 모자라는 게 많은 사람이어서 그렇다니까. 내가 완벽하면 그러겠어. 주위에서 보기에 모자라 보이니까 ‘나라도 나서서 도와줘야지’ 그러는 거지. 안돼 보이니까. 난 아직도 현장에서 못 보는 게 많아. 조명이나 사운드 작업도 자세한 건 잘 모른다고.
전 | 영화 연출은 따로 공부했을 거 아니야.
류 | 공부 안 했지. 무슨 공부를….
전 | 감독은 공부해야 되는 것 아닌가.
류 | 그렇게 되는 것 같진 않은데.
전 | 태어나는 배우가 따로 있는 것처럼?
류 | 그렇지. 김지운 감독님이나 박찬욱 감독님 보면 그래. 젊어서부터 다들 잘 놀았고, 그때도 끼가 다분했던 사람들이거든. 누가 가르쳐주고, 뭘 배워서 그래서 감독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 단 한 사람. 강우석 감독님 보면 ‘기술’같은 게 있어. 처음에는 남의 작품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이야기 하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웃음의 포인트를 기막히게 지적하는 거야. 기술자라고 할 만한 감독이지. 근데 그 기술도 누구한테 전수받거나 따로 공부한 건 아니니까, 뭐.
전 | 아까 시사회 직전에 강우석 감독님을 만나서 그랬어. ‘나, 돈내고 영화 봤다. 경구 오빠 잘하더라’ 뭐 그런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는데. 강 감독님이 ‘연출 잘했다는 칭찬은 한번도 못 들었다’고 그러시대. 근데 그건 연출을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배우가 부각된 영화여서 그런 것 같아. 그게 연출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에 비해 <피도 눈물도 없이>는 반대야. 감독이 두드러져 보이거든. 내 입장에서 보면 감독들 스타일을 그렇게 나눌 수 있어. 둘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부터 그랬어.
류 | 맞아. 단점일 수 있지. 연출을 못했는데, 그게 그대로 드러나니까. (웃음)
전 | 아니야. 내 말은. 감독의 개성이 많이 묻어난다는 거지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 그런 말이 아니라고.
류 | 아직은 내가 하수여서 그래. 정말 잘하는 사람은 무기교의 기교를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배우도 그렇잖아. 물 흐르듯 그냥 쭉 가야 되는데.
전 | 음, 난 그렇게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류 | 그건 아는데. 그게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거라도 내가 받아들이긴 그래. 연출이 보인다는 건 내 수들이 읽힌다는 거잖아. 무술하는 사람들로 따지면 아직 내가 고수는 아니라는 거고.
전 | (동석한 이들에게) 내가 이야기한 게 그런 뜻으로 들렸어요? 그러고 보면 되게 욕심 많아 보여. 나도 그렇지만.
류 | 타고난 욕심은 없어. 아흔아홉개 가지면, 하나 더 갖고 싶어하는 거는 있어도.
전 | 그게 그거 아니야? 옆에서 보면 어찌나 치열하게 사는지.
류 | 당연히 그래야지.
전 | 누구나 최선을 다해 살잖아. 근데 류승완은 달라. 매번. 늘. 어디에서건 치열해보이려고 하니까.
류 | 도연씨도 그래.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배우 단독 숏인데도, 그 전 대사 읊어주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현장에서 고마웠던 부분이야. 많은 배우들이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게 몸에 배서 그런가. 예고하지 않은 리액션도 자연스런 액션으로 만들기도 하잖아. 말이 쉽지 그것도 2천컷이 다 되는 우리 영화에서 리액션까지 계산하려면…. 독불이랑 셔터문 부서져라 붙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실 나 놀랐거든. 독불이가 ‘이리 와’ 그러는데 수진이가 그냥 걸어가는 거. 난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러는 것 보고 나중에 놀랐어. 최영환 기사가 배우와 교감한다는 표현을 잘 쓰는데, 그 장면에서 그 말 하더라고. 나야 처음에는 잘 몰랐지. 나중에 편집하고 녹음하면서 알았지만 드라마 흐름을 타면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어.
전 | 사실 난 카메라 보고 연기 못하겠어. 여기 보고, 시선 잡아주고 그래야 가능하니까. 극악한 상황이면 그냥 하긴 하는데…. 카메라 정면으로 보고서는 연기 못한다고. 인터뷰 할 때도 그래. 쇼 프로 같은데 가끔 나가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데 대답할 때 그 사람 안 봐. 딴 데 보거나 대본을 보거나 그러지. 내가 연기할 때 남들 눈을 보면 감정이입이 빠르니까. 그래서 남들한테도 그렇게 하는 거야. 저 사람들도 카메라말고 내 눈보고 있으면 감정이입이 빠를 거라 생각하니까 될수록 그렇게 하려고 하는 거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사지절단은 기본, 멜로는 영 쑥스러워”
류 | 나도 연기자들 눈을 피해. 미안하니까.
전 |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류 | 한번 해봐. 계속 구르는 걸 보고 있으려면, 당연히 나도 사람인데 미안하지….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저번에 현장 올 때 아무 생각없이 나온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아닌 것 같아. 연습을 분명 많이 하고 오는 것처럼 보여. 연출부끼리도 그것 때문에 정말 매번 수군댔다고. 연습하고 온 것 같지 않냐, 뭐 그러면서. 그러다 전도연이 한쪽에서 ‘거기, 뭣하고 있어’ 소리치면, 해산하고.
전 | 카앗! 그건 그만하고. 류승완이 멜로영화 찍으면 어떤 색깔이 나올까. 어떨 것 같아. 해보고 싶진 않아?
류 | 이것도 멜로영화잖아. <다찌마와 Lee>에도 멜로 부분이 있고. 나 멜로적 감성이 없는 놈 아니야. 이 사람들이 날 뭘로 보고. (웃음) 요즘 사람들이 날 무슨 코미디언으로 안다고. 그냥 보고 실실 웃어. 김지운 감독님하고도 언젠가 이야기하다가 우리 둘 다 멜로드라마를 잘 못 보는 공통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모든 영화에는 멜로의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고. 사실 멜로영화 시나리오를 안 써본 건 아니야. 근데 너무 과격한 시나리오가 나왔어. 사지절단 뭐 그 딴 거는 기본으로 나오는. 멜로는 아무래도 쓰다가 내가 못 견뎌하는 게 있어. 한다면 <겨울연가>가 아니라 <파이란>이나 <프랭키와 쟈니>나 <우묵배미의 사랑> 같은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겠지.
전 | 그때 되면 나를 캐스팅 할 건가? (웃음)
류 | 당연하지.
전 | 그런 형식적인 답 말고. (웃음)… 가끔 류승완이라는 사람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듣다보면, 저게 충무로에서 제작이 가능할까 싶은 게 있어. 자세한 내용이야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아. 다음 작품은 뭐할 건데?
류 | 다음 작품? (귓속말 크기로)마루치 아라치. 이번에는 정말 좋은 놈, 나쁜 놈이 정확한 영화 하고 싶어.
전 | 배우는 계속할 거야? 마스크도 주연하기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조연으로서는 어느 정도 괜찮은데. 자연스러워 보이고. 다만 키가 170cm가 안 되는 것 같아 보여서 좀.
류 | 아, 돌아버리겠네. 그럼 내기할래. 오늘 키 재서, 내가 170cm 안 되면 네가 술 사. 넘으면 내가 살 테니까. (웃음) 배우야, 그냥 하는 거지. 자긍심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다 아는 사람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내세우는 거고.
전 |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빨리 결혼했어. 안 하면 얼마나 편하고 재밌는 게 많은데.
류 | 결혼해도 편해. 재미도 있고. 심심하면 애도 보고, 시간나면 빨래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