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마음 여린 우리 감독님
전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그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원한 것도 그랬고. 류승완은 남성중심적인 영화를 많이 했잖아. 그래서인지 현장 분위기도 그래. 현장 가면 재영 오빠랑은 너무 호흡이 잘 맞는거야. 다른 남자 배우랑도 그렇고. 그게 얼마나 부러웠다고. 처음엔 저 사람이 여배우랑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나보다라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여배우, 아니 그런 현장이 익숙지 않은 어떤 연기자들한테는 어쩜 저렇게 무관심하나 싶더라고. 실제로 모니터 보고만 있지 않고 직접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인데. 왜 그런 것 있잖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들 때마다 보면 항상 그 자리에 류승완은 없었어. 그리고….
류 | 나도 배우한테 기대고 싶어. 재영이형도 그런 얘기 하더라. 자기도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너무 힘들고 그러는 상황에서 감독한테 기대고 싶다고. 그런데 감독이란 놈이 쭈뼛거리면서 와서는 ‘형, 뭐 한번만 더 해주세요’ 그런다고. 그러니까 배우가 할 수 없이, ‘한번 더 가자’ 소리치는 거지. 의사소통의 문제인 것 같아. 아직도 난 현장 가면 막내에서 막 올라온 급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고. 난 그래도 배우들한테 큰소리치고 그러진 않잖아.
전 | 요즘 현장에서 누가 그래?
류 | 가령….
전 | 박찬욱 감독님이 그래? 김지운 감독님이 그래?
류 | 배우들 이름 부르고 그러잖아. 야, 도연아, 그러지 않나.
전 | 갑자기 왜 옛날이야기를 하고 그래. 감독님, 영화 오랜만에 하셨군요? 요즘 안 그래.
류 | 제가 착각했었나 봐요. 죄송.
전 |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격투신을 사실 내가 찍어보길 했어. 그래서 대신 재형 오빠한테 물어본다고. 이렇게 하면 돼? 하고 그러면 재형 오빠가 그래. ‘야, 됐어. 그거 안 나와. 이 부분만 열심히 하면 돼’ 그래도 모르는 나로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힘주고 굴려야 한다고. 근데 우리 감독님은 모니터를 보러가도 딴 데 가서 목소리 높이고 있고, 우리끼리 모니터 보고. 오케이 사인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그러니 오케이인지 아닌지 스탭들한테 물어보고, ‘한번 더 가자는데요’라고 전해 듣고.
류 | 나도 배우니까 알지. 이창동 감독님 <오아시스>에 엄연한 조연으로 출연하잖아. <복수는 나의 것>에 놀러가서 그냥 얼굴 내밀고 올 때랑은 다르더라고. 전에는 승범이가 그런 말 해도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왔는데. 슛이 딱 들어가고 어느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때의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겠더라. 음… 그때가 극도로 외로워지는 순간이잖아. 특히 아무 이야기도 안 해주고 그냥 ‘너 저기 가서 서 있으면 돼’라는 미션을 받을 때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고.
전 | 오죽했으면 내가 따졌겠냐고. 물류창고(영화에선 자동차 불법정비소로 설정이 바뀌었다)에서 수진과 경선이 싸우는 장면 찍을 때 내가 그랬잖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라. 뭘 잘못했는지. 너무 열이 받아서 그랬지. 머리채를 잡아뜯고 땅에 부딪히고 그러는데 아무 말 없이 테이크 아홉번씩 가고 그러니. 아, 뭐가 부족한가. 인터뷰 하면 ‘저희 감독님이 맘이 여려서요’라고 했지만, 그런 거 보면 저 사람 독하다 싶었어. 한번 더 가면 더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으니, 화가 안 나겠어. 나야 술 한잔 하고 어울리고 그러고 풀고 나면 잊어먹기라도 하지, 혜영 언니는 다르잖아. 현장에서 오랜만에 하는 거고, 그것도 전에 맡았던 역이랑 다르고. 근데 또 감독 성격은 배우보다 예민해서 삐치면 말도 잘 안 하고.
미팅가도 <총알탄 사나이> 이야기만 30∼40번씩
류 | 내가 독하게 보이는 것은 확신이 없어서 판단을 못 내려서가 많아서였을 거야. 그래서 ‘한번 더, 한번 더’가 나오는 거고. 다 힘들면 OK가야 하나 싶다가도 나중에 완성됐는데 ‘개판이다’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컷마다 그런 공포 때문에 몸부림쳤어. 내가 무심하긴 했지. 인천에서 독불이가 수진이 때리는 장면을 찍는데 ‘야, 전도연 카메라에 걸려’라고 그랬다니까, 말 다했지 뭐. 그것도 나중에 김성제 프로듀서가 와서 ‘승완아, 여배우한테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해서 안 거지만. 황당했을 거야. 그 말 듣고.
전 | 난 그게 황당한 게 아니었고. 액션장면 첫 촬영이다 보니까 거기서 뭘 하라는 건지, ‘악악’거려야 하는 건지, 뭔지 잘 몰랐거든. 또 액션장면은 전 컷이 뭐였는지 잘 모르겠는 거야. 그걸 모르니까 다음 장면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거고. 연결이 안 되는 거지.류/잘하는 연출자는 숏만 분할하고 편집하는 게 아니라 배우가 뭘 생각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뭘 끌어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 텐데. 난 그때 이틀 만에 끝내야 하는 상황인데다 엄청나게 장애요소들이 많았어. 어찌나 동네 분들이 영화에 관심을 보여주시던지. 하여튼 민소매만 입고 철문에 직접 부딪히고 열연이었지.
전 | 그 장면에선 몸이라도 아픈 게 그나마 위로가 됐다니까. 몸으로, 몸으로라도 때우자, 뭐 그런 심정 있잖아.
류 | 크, 정말 좋은 배우죠? (웃음) 이건 박찬욱 감독님한테 들은 이야긴데. 나도 고민하다가 배우들이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봤더니 그러시대. ‘아, 내가 쓰는 수법이 있는데. 일단 모니터를 봐. 아니다 싶어도 힘들어 보이면 그냥 오케이를 내려. 그 다음에 그냥 한마디 해. 에이, 오케이. 그냥 다음 장면 준비합시다 그런다’고. 그러면 배우들이 쫓아와서 모니터 보고 ‘왜 이게 오케입니까’ 하고 따진대. (웃음)
전 | 내가 놀러갔을 때도 되게 웃겼어. 병원 장면 찍는 날이었는데, 강호 오빠는 그냥 목소리만 쳐주는 거였거든. 근데 자기는 화면에도 안 나오면서 자기 목소리 톤이 맘에 안 든다고 ‘캇캇캇’ 그러는 거야. 그거 보면서 여긴 정말 민주적인 현장이구나, 그랬지. (웃음)
류 | 우리도 ‘캇’ 할 수 있었어. 본인들이 만날 ‘오케이’만 기다리니까 그랬던 거지. 이건 농담이고. 연기자들이 힘들었지. 편집하면서 내가 너무 많이 고생시켰구나 그랬으니까. 사실 <복수는 나의 것> 현장가면 우아하잖아. ‘레디… 사운드… 앤… 케매라 롤링… 앤… 액션’ 반대로 우리는 슛 들어가기 전에 ‘야, 마지막이야, 뛰어뛰어’ ‘거기, 조용 안 해’ 현장이 살벌했지. 그래도 보람은 있지 않아?
전 | 그건 있지.
류 | 아마 난 현장에 1년만 더 있으면 목청 틔워서 성악해도 잘할 거야. ‘컷’할 것을 ‘카아앗’하니까. 메이킹에서 내 모습 지금 보면 막 짜증난다니까. 너무 신경질적으로 ‘캇’ 질러대니까.
전 | 아까 못 물어봤는데, 이성에게 약한 이유가 따로 있어?
류 | 자라면서 남녀공학을 다닌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도 짝이 항상 경안이라는 남자애였어. 그래서 서툰 것 같고. 사실 남자애들하고도 잘 못 놀아.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야. 얼굴 본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제작사 기획실 친구들하고 쉽게 말을 못 놓는다고.
전 | 남녀공학 문제가 아니라 타고나는 거 같아. 그런 감성이 따로 있지 않을까.
류 | 관심사가 폭이 좁아서이기도 해. 어렸을 때 미팅가서도 만날 <총알탄 사나이> 이야기만 30∼40번씩 반복하고 그랬으니까. 상대가 그러면 항상 화장실 간다고 하고서 안 와. 사실 나보다 더 어눌해 보이는 최영환 기사도 그런 것 잘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