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화통한 배우 전도연 vs 소심한 감독 류승완 [2]
2002-03-02
사진 : 오계옥
정리 : 이영진

“근데, 영화 정말 어땠어?”

류승완(이하 류) | 아…, 난 야자타임 같은 거 못한다니까, 글쎄.

전도연(이하 전) | 일단 밥부터 먹고, ‘야자’ 하죠.

류 | 도연씨, 이쪽에 말리면 안 돼. 그러지말고, 이거 ‘후딱’ 끝내고 박찬욱 감독님하고 술 한잔 안 할래요? 강호형이랑 다들 함께 있다고 그러는데.

전 | 시작해야겠네. 야! 너는 당일 약속잡으면 내가 바로바로 시간낼 만큼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웃음)

류 | 어어… 그건 아니고.

전 | 뭐, 또 이야기해봐. 어디서 먹을 건데. 뭐 사줄 건데? (웃음)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톤을 바꾸어) 감독님∼.

류 | (뻘쭘한 자세로) ….

전 | 난 야자 못하겠어. 마음이 약해서.

류 | 거봐요. 도연씨도 야자 못한다잖아요.

전 | (김치전을 젓가락으로 들고서) 승완아, 이거 먹어봐, 맛있어. (웃음)

류 | ….

전 | 오늘 무대 인사 끝나고 사라졌던데.

류 | 어… 그러니까. 다른 시사회 가면, 감독이 배우들이랑 쫙 앉아서 영화보잖아. 폼나게.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근데 준비해간 무대인사 버벅거리고 내려오니까 극장 안은 이미 컴컴해졌던데. 시간이 안 맞은 거지. 다른 배우들 따라서 겨우 자리까지 가긴 했는데, 쭉 앉고 나니까 이번에는 또 내 자리가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앞줄에 끼어앉아봤어.

전 | 어땠는데?

류 | 신나게 봤지. 나도 관객이었으니까. 보면서 ‘야, 죽인다’ 뭐 그랬어. 나야 찍을 때는 못 만들었다고 자학하는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보면서 이거 정말 내가 어떻게 찍었을까 감동하기도 하고, 뭐 그런 놈이니까. 거기에다 관객 많은 데서 보니까 내가 간간이 심어놓은 유머장치들에서 다들 킥킥대는 것도 좋았고. 근데 나중에 영화 끝나고 나니까 불안해지더구먼. 누가 뭐라고 잘 봤다고 한마디 해도 거짓말 같고, 인사치레 같고 그러더라. 이젠 내가 더이상 숨을 데가 없구나 싶기도 하고. 전에는 소문이라도 퍼트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여러 번 전화한 거야. 재영이형에게도 몇번씩 어땠냐고 물었고. 근데 정말 어땠어? 지난번 기술시사 때는 좀 당황한 눈치던데.

전 | 나? 그랬지. 후반부에 침묵맨한테 얻어맞은 다음에 담배피우면서 독불이가 그러잖아. ‘아, 이 XX년 어디 가서 뭐하고 있는 거지’라고. 그 장면 보면서 ‘핑’ 돌더라고. 그만큼 좋았지. 그런데 처음 기술시사 때는 보는데 내가 맡은 수진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그 장면 이후에 나오는 수진은 뭐라고 해야 하나. 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처럼 낯설고 어설퍼보였어. 그래서 시사 끝나고 나보고 어땠냐고 물었을 때도, 눈도 안 마주치고 그냥 ‘좋았어요’라고 한 거거든. 그렇지만 속으론 ‘수진에게 뭔가 좀더 있었어야 하는데. 이걸론 부족한데’ 그랬던 거지. 다들 눈치챘을 거고.

류 | 오늘은 어땠는데?

전 | 그 장면 다시 보니까 ‘여기서부터 내가 독불이를 따라가는구나’ 싶더라고. 그게 영화의 흐름이라고 생각했고. 영화를 좀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아.

류 | <피도 눈물도 없이> 찍으면서 나에게는 균형잡는 게 중요했어. 어느 한 인물에 치우치면 안 된다고. 수진이나 경선이나 독불이나, 셋이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잖아. 우리, 왜 성냥개비 세개 가져다놓고 마주 세워서 서로 지탱하게 하잖아. 딱 그거라고. 그 삼각구도를 후반부까지 끌고 가야 했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혜영 선배가 맡은 경선이야 혼자 나오는 장면이 많으니까 자기 힘으로 장악하고 갈 수도 있다지만, 수진이라는 캐릭터는 힘들었을 거야. 독불이라는 캐릭터의 그림자가 너무 깊게 드리워져 있으니까. 사실 어지간한 배우였으면 그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을 거라고. 전도연이니까 하는 거지.

“구미호한테 홀린 것 같이 OK를 냈잖아”

전 | 그럼 이거 하나 물어보자. 시나리오 작업할 때 뭐 그런 것 있잖아. 유독 애착이 가는 인물.

류 | 찍으면서도 그건 생기지.

전 | 뭐였어?

류 |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시나리오를 쓸 때는 수진과 경선, 두 여자한테 막 집중을 했는데. 찍으면서는 그만 독불이, 한테….

전 | 내가 볼 땐 시나리오부터 독불이한테 쏠려 있더구먼. (웃음) 시나리오 불변의 법칙 있잖아. 그거 정말 맞는 말 같아. 조금씩 고칠 거라고, 영화는 결국 변할 거라고 하지만, 그 차이는 얼마 없는 거라고. 처음 영화 봤을 때 느낌이 결국엔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나오는 법이구나 그랬거든. 혹시 류승완에게는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신선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

류 | 나에게는 큰 모험이었는데. 두 여자를 돋보이게 하려면 그 적이 정말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독불이를 키웠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 우리가 재밌어 하는 영화들 보면, 안티 히어로가 빛나잖아. 사실 장 클로드 반담의 발차기는 아무리 운동 못하는 놈이라도 피할 만큼 느려.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다 맞고 쓰러지기 바쁘잖아. 그렇게 되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전 | 근데 중요한 건 거기다 인간적인 매력까지 플러스 했잖아. 그러니까 너무 강해진 거 아냐? 처음 독불이 컨셉은 안 그랬잖아.

류 | 초반에 나는 쉽게 접근하려고 재형이형한테 모델을 줬어. <성난 황소>의 제이크 라모타. 그런데 재형이형이 너무 심하게 판 거야.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론이 나오고 결국 대사가 원했던 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가서 ‘이건 아니다’라고 했지. 그랬더니 재형이형이 내 말에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는데, 사실 다 맞는 말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형, 너무 미안해’ 그랬지. 대신 우리 좀 ‘양아스럽게’ 가자고 한 거야. 자기도 그게 더 좋다고 한 거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비중도 늘고 뭐, 그렇게 된 거지.

전 | 오해할까봐 하는 이야긴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건 아니야. 나 역시 시나리오 볼 때부터 독불이가 찡했고 그래서 좋았고. 영화도 그래서 좋아. 단지 이런 장르의 영화에 내가 처음 출연하다보니까 스크린에서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낯설었던 거고, 보고 나서 조금 당혹스러웠던 거지. 연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는 건 개인적인 관객으로서 보게 되잖아. 남 연기할 때 내가 눈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렇게 쭉 따라가다 보니까 거기서 보이는 전도연은 왠지 떠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류 | 난 신인배우 전도연을 보는 것 같아 좋았는데. 내가 전도연을 캐스팅한 것도 연기가 안 보여서였거든. 전작들 대부분이 엇비슷한 멜로드라마인데도, 이미지가 다 달라. 그 안에서 전도연이라는 사람의 패턴이 보였으면 내가 캐스팅을 하는 데 겁냈을 거야. 멜로드라마에서 단골로 귀여운 역할 하던 배우에게 돈가방 훔치려고 악쓰는 험한 역을 맡겼겠어?

전 | 정말 신인배우 전도연이라고 그럴까봐. (웃음)

류 | 사실 독불이와 수진은 동전의 양면이잖아. 붙어서 마주볼 수 없는 관계. 난 독불이한테 인간적인 것을 부여하면 수진한테는 그걸 안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수진은 누가 봐도 동정하는 캐릭터라고. 독불이한테 얻은 보기 싫은 상처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지. 집에 찾아온 남자들은 만날 집적대지. 시나리오 쓰면서 어떻게 하면 수진을 도망가게 하나 그랬거든. 그래서 적들을 너무 많이 배치한 것 같기도 해. 고립되게 보이려고. 돌아보면 독불이하고만 딱 둘이 부딪치게 했어도 충분히 됐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아마 그런 여자의 심정을 잘 몰라서 그랬을 거야. 저 남자 하나가 지긋지긋하게 보기 싫어서라도, 떠날 수 있는 건데. 그런데 그러면 수진이한테 너무 강요하는 것 같고, 신파 냄새가 나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았고. 보기에 따라서는 거기에 약간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상대적으로 다른 캐릭터에 비해 수진에 대해서 내가 현장에서 고민을 덜했던 것 같아. 빌미를 제공한 건 물론 전도연이라는 배우 때문이지만.

전 | 왜 나야?

류 |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대사톤을 단번에 해냈으니까. 툭툭 내뱉고, 빠르게 받아치고. 현장에서 모니터 보고나서 ‘도연씨 이런 거예요’ 말만 하면 긴 대화 안 해도 될 정도로 잘했고.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OK를 빨리 내리게 되지. 무슨 구미호한테 홀린 것처럼.

전 | 에이. 내 미모에 또 홀렸던 게지. (웃음)

류 | 그게 함정이었어. 경선만 하더라도 약간 중성적인 매력 같은 게 있잖아. 그래서 배려 아닌 배려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닌가 한다고. 그게 되레 나중에는 연기하는 이혜영 선배한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지만, 경선에게는 남성화된 성격 같은 거를 부여할 수 있으니까 자꾸 요구를 할 수도 있었고. 그런데 수진은 안 그렇잖아. <다찌마와 Lee>의 화녀 이후 내겐 최초의 여성 캐릭터인데. 좀더 내가 다른 경우의 수를 많이 고민해서 갔으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지 모르겠어.

의상협찬 J 로즈로코 뉴욕, 안나 모리나리, Miss sixty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