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따로 또같이 보냅니다
2014-09-1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자유의 언덕>의 ‘등장물’에 보내는 4개의 편지글에 앞서

<자유의 언덕>의 모리(가세 료)는 일본인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한국인 권(서영화)입니다. 둘은 2년 전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만났습니다. 그때 모리는 권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모리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권은 몸이 아파 요양을 갔습니다. 하지만 모리가 권을 찾아 다시 북촌에 왔습니다. 그가 권의 집 인근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물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온 권은 모리가 어학원에 맡겨놓은 편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권을 기다리는 동안에 있었던 모리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리는 몇 사람을 만납니다. 게스트 하우스의 여주인(윤여정), 그녀의 조카 상원(김의성)과는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됩니다. 인근 카페의 여주인 영선(문소리)과는 특히 더 가까워집니다. 모리가 길 잃은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주면서 둘의 관계는 더 깊어지는데 모리는 주저하면서도 영선의 쾌활함과 상냥함에 반하게 됩니다. 한편, 모리의 편지를 전부 읽고 난 뒤 권은 모리가 머무르는 숙소로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이것이 거칠게 요약한 <자유의 언덕>의 이야기입니다.

거칠게 요약한 이야기라고 굳이 명시한 이유는, <자유의 언덕>의 실제 장면 전개의 흐름이 지금 묘사한 이야기의 흐름과는 다소 다르게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영화의 첫 장면은 어학원에 들어서서 모리가 남긴 편지를 읽는 권의 모습입니다. 권이 편지를 읽자 모리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들려오며 영화는 게스트 하우스로 짐을 끌고 오는 모리의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잠시 뒤에 모리의 편지를 쥐고 계단을 내려가던 권이 현기증이 났는지 손에서 편지들을 놓쳐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어떤 계기가 됩니다. 편지에는 날짜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이 흩어진 편지를 다시 주워 합쳐 읽기 시작하자 이후부터 이날과 저날의 순서 없이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편지의 내용(모리의 이야기)의 전개(영화의 장면들)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채 흩어져서 진행됩니다. 가령 잃어버렸던 강아지 꾸미를 찾아주어서 고맙다며 영선이 모리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는 장면은 영화의 초입부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모리가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주는 일화는 영화의 시간상 얼마 뒤에나 등장합니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모리가 영선의 애인(김민우)에 대해 품평을 하는데 모리가 그녀의 애인을 만나는 장면도 얼마 뒤에나 등장합니다. 단순히 앞과 뒤의 장면들이 도치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언덕>의 장면들에는 시간의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자유의 언덕>의 이야기와 장면들이 서로 얼마간 차이를 갖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뒤따를 네개의 편지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전제라고 판단하여 여기 밝히게 됐습니다. 저 이야기와 장면들의 차이 안으로 들어가 활발한 감상을 남길 수 있는 적절한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선택한 건 ‘등장물’에게 몇개의 편지를 써보는 것입니다(영화에 등장하는 혹은 그렇지 않다 해도 곧 등장할 것이라고 상상되는, 인물과 사물을 다 포함하여 수신자를 설정한 것이라 등장물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쓰게 됐습니다). 하나의 소실점이 아니라 다수의 방점을 찍어 <자유의 언덕>을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편지글이라는 형식은 모리의 편지가 우리를 자극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네개의 편지가 영화의 서로 다른 수신자를 두고 여기 따로 또 같이 모이게 됐습니다. 모리에게, 권에게, 강아지 꾸미에게, 저기 언덕 너머 상상의 나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합의되지 않은 편지들을 읽어가는 누군가에게, 적어도 <자유의 언덕>을 보는 네개의 관점이 생기기를 우린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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