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에게
사랑하는 여인 권(서영화)을 찾아 방문한 여행자라는 사실 정도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솔직히 말해 뭘 더 알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만 허물없이 몇자 적습니다.
당신이 술자리에서 서양 친구에게 “당신 처는 정말 훌륭하다”고 거듭 말하면서 “누구라도 이 가정을 파괴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있지도 않은 심각성을 과장하여 말할 때, 붉어진 당신의 얼굴과 우왕좌왕하는 그 말과 시선과 몸짓과 거기서 느껴지는 상실감은 당신을 조금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아주 측은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반면에 상원(김의성)과 함께 술을 마신 뒤 어깨를 겯고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올 때에는 동네의 골목대장들처럼 구는 그 순진한 우정의 행세가 보는 사람까지도 괜히 기분 좋고 으쓱하게 해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당신의 확고한 성찰도 기억합니다. 영선(문소리)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신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사실 우리의 뇌가 만든 틀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런 말은 삶의 결을 신중하게 들여다본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신념일 겁니다.
중요한 건 당신만 알고 제가 모르는 일들이 있는 것처럼(권을 만나기 직전 누군가와 벌인 당신의 싸움 말입니다) 당신은 모르지만 제가 아는 일들도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순서의 허위적 틀이지만,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지금 그 틀이 부서져 실제로 당신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권에게 쓴 편지, 그것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운 권의 손, 다시 읽는 권의 눈, 그리고 상상하는 권의 뇌라는 과정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권과 언덕을 오르던 당신들의 애틋한 모습이 영화 속에 오롯이 있습니다만 당신들은 정말 그 언덕을 올랐던 것일까요. 오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랐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이 애매함에 대해 적어도 당신이라면 정확히 한쪽을 고르라고 제게 재촉하는 대신, 그것이 삶의 실체라고 대답해줄 거라 기대합니다.
기왕에 꺼냈으니 당신이 모를 만한 또 하나를 말해야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는 겁니까. 맞습니다, 게스트 하우스 여주인과 상원이 당신을 깨워도 도무지 일어나지 않던 그 장면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쪽으로 발바닥을 보이고 누워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당신의 모습을 보다가 순간 덜컥 겁이 난 건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당신의 잠이 불가피한 죽음의 분위기를 끌어당겨서, 자는 당신을 누운 시체로 그 순간 보이게 했다는 걸 당신은 모를 겁니다. 저는 그 순간 당신이 빠져버린 깊은 잠 때문에 시간의 차례를 건너뛰어 죽음에 몰입되어버리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했던 겁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몰입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영화는 당신의 이름을 제게 ‘모리’라고 소개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모립니다(저는 지금 고의로 한국어의 동음 효과를 내기 위해 ‘모리입니다’를 줄여 썼습니다). 제게는 당신이 몰(沒)입니다. 당신이 꽃의 존재에 빠져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제가 이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빠지다, 끝나다, 죽다, 숨다, 없다 지나치다 등등 얼마든지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쓰일 수 있는 어떤 상태, 그 몰(沒)의 사람으로서의 현현이 모리라고 느꼈습니다. 당신은 수시로 순서 없는 시간, 깊은 잠, 거대한 꿈, 어른거리는 죽음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한대의 표면에 걸쳐 있다’고 말해야 반드시 더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복잡한 이 주장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부연하기로 하고 지금은 무엇보다 당신이 제게 몰(沒)인 것을 먼저 밝히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오해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 오해가 당신과 저의 교감의 장이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