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연 속에 가능성이 있어요
2014-09-16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이지현 영화평론가의 편지

권에게

당신이 모리(가세 료)로부터 두터운 편지를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백하건대 저는 당신의 상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상상 속의 자유가 향하는 방향 또한 확인하였습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다 나았다고 말했지만 전 아직도 당신이 병마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단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혹 저의 짐작이 틀렸더라도,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남자 문제 아니면 암 문제, 둘 중 하나라고 상원(김의성)처럼 저 역시 믿고 있어요. 아직도 그때 어학원에서 편지뭉치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 편지들 때문에 우리가 마주한 것이니 한편 그 우연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때로 우연은 기인한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예측 불가능한 것이 우연의 속성이라지만, 저는 그러한 우연들 역시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떨어지는 주사위의 결과를 전부 다 예측하진 못하더라도, 그 결과가 여섯 가지 확률 중 하나란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연의 벽 앞에서 무너져내리겠죠. 그러니 당신과 나, 우린 예외가 되어야 합니다. 우연이 실은 무지의 그림자임을, 우린 깨닫고 대처해야 합니다.

모리가 말했습니다. 권(서영화), 당신이 모리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한국에서 어학원 다닐 당시, 당신은 모리가 사람들과 싸웠던 모습을 목격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의 상황을 모르지만, 여전히 그가 혈기를 감추지 못해 낭패를 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요. 당신이 잃어버린 한장의 편지에는 아마 그때의 기록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편지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니 아쉬워 마시기를. 모리는 항상 정직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한 이들을 탓하지만, 실은 그야말로 그러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새벽녘 카페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에서,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우연하게 마주친 영선의 남자친구와 다투었더라도, 그 역시 짐작 가능한 우연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당신과 영선(문소리)이 카페의 입구에서 조우하던 때와, 영선의 남자친구와 모리가 싸우는 순간을 비견해서 떠올리는 중입니다. 분명 모리는 맹렬하게 몸을 던져 싸웠겠지요. 그에 비해 당신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침착하게 대처했어요.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의 건강이 몹시 염려스러웠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냥 못 버텼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의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당신이 하였던 상상들은, 제게도 역시 위안이 되었습니다. 상상에서 당신은 병에서 치유돼 모리와 결혼했으며, 딸과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시간을 훔쳐보며 전 모리의 말처럼 당신이 그저 “지금 이룰 수 없는 건 희망하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됐지요. 그래서 제가 믿는 우연의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우연은 주관적 관점에서 생겨납니다. 만일 어떤 일의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여긴다면, 우린 그때의 주관적 판단때문에 그 ‘우연한’ 사건들을 목격하게 되겠죠. 그런 면에서 우연은 ‘기회’의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당신의 상상, 희망의 언덕을 오르는 은밀한 당신을 보면서, 저는 당신이 꿈꾸었던 환상의 모습을 응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쩌면 화장실에 간 덕에 불행을 피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무지를 뚫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행운을 거머쥘지도 모릅니다. 다만 모든 일은 가능성의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걸, 전 당신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권, 당신은 제게 있어서도 매우 그레이트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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