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 영화는 꼭 프리즘 같습니다
2014-09-1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자유의 언덕> 가세 료 인터뷰

가세 료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오랜 팬이었다. 한편 홍상수 감독은 가세 료를 만나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자유의 언덕>에서 가세 료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한국에 온 ‘모리’라는 일본인으로 등장하게 됐고 단순히 주인공의 의미를 넘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선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연기파로 정평이 나 있는 가세 료다. <자유의 언덕>에는 가세 료의 빛나는 연기가 가득하다. 그에게 <자유의 언덕> 제작과정에서의 일들과 연기에 관련된 느낌들을 물었다.

-당신이 <자유의 언덕>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건 전적으로 홍상수 감독에 대한 존경과 신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과 일해본 느낌에 대해서는 <자유의 언덕> 촬영이 끝난 직후 <씨네21>과 가진 인터뷰(913호)에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첫 질문이니까, 이렇게 한번 더 물어보고 싶습니다. 홍상수라는 감독과 일해본 결과, 그에 대해 당신은 어떤 것들을 느꼈나요?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사물을 말하고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주의 깊게 보는 분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눈을 가진 분이라 생각합니다. 사물을 볼 때 그것에 달라붙어 있는 여러 가지 기존의 이미지를 피해 그 본질이나 실제를 마침내 봅니다. 무엇보다도 성실하고 매우 착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출연을 결정한 이후 홍상수 감독은 당신에게 책 몇권을 들고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서너권의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한권이 바로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시간>입니다. 모리가 그 책을 들고 다니며 읽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당신이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온 걸 보고 ‘아 이거 뭔가 통하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 책은 어떤 책입니까? 당신에게 어떤 의의를 지닌 책인가요? 왜 그 책을 갖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나요? 그리고 챙겨온 다른 책들은 또 어떤 것들이었나요?
=영화에 등장하는 건 요시다 겐이치의 <시간>입니다. 그 시기에 제가 읽고 있던 것입니다. 같은 저자의 <술 안주 술>이라는 술에 대한 책이 재미있어서 다른 것도 읽어보고자 선택했던 책입니다. 사실 제가 이해하는 데에는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페이지에 나와 있는 몇줄이 왠지 좋아서 계속 읽었습니다. 가령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겨울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나는 시간을 흐르게 하는 물살에라도 통과한 것처럼 아침 햇살에 씻겨 내려간 저 나무의 고엽들을 보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얼마만큼이나 시간이 흘러갔는가 하는 것이 아닌, 길지도 짧지도 않은 동안 흐르는 상당한 시간이라는 바로 그 단순한 문제, 그런 게 바로 시간의 개념이다.” 가져온 다른 책으로는 래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집이 하나 있고, 감독님이 일본 단시집을 가져오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게 있어서 일본의 시인 부송의 시집도 한권 가져왔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한편은 <북촌방향>입니다. 당신도 물론 잘 알고 있겠지만, <자유의 언덕>의 주요한 장소인 동명의 그 카페는 <북촌방향>의 엔딩이 찍힌 장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언덕>에서 당신은 북촌이라는 장소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인물입니다. 북촌이라는 장소에 대한 느낌은 어떠했습니까.
=작은 옆길이 많고 고즈넉한 건물들이 남아 있는 장소로 매우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손이 닿을 것 같은 크기의 마을이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주는 장소였습니다. 모리가 머물고 있는 게스트 하우스의 공간도 정말 좋았습니다.

-문소리라는 배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 중 한명입니다. 그런 문소리와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아, 지금 이 장면에서 저 배우와 나 사이에 뭔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던가요.
=문소리씨는, 훌륭하세요. 정말로. 여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느 장면에서나 눈앞에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연기를 보았을 때는, 너무 신선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녀와 저 사이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모든 장면마다 그녀로부터 배우는 일들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술을 마시면서 영화를 찍었을 겁니다. 물론 아주 많은 술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몇 장면에서는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술을 먹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진짜로 술을 먹는 것이 영화 현장에서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흔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경험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나요. 어떤 새로움 같은 것이 느껴지던가요?
=아니요, 술은 실제로 많이 마셨습니다. (웃음) 술을 마시면서 하는 촬영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는 여러 가지를 신경 쓰게 되는데 그런 것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모리가 상원(김의성)과 서양 친구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서양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 모리가 거듭 반복적으로 칭찬하는 그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온 모리의 마음이 하도 간절하여 애틋하기도 하면서 동시에는 행동이 약간 과장되어 있어 다소 웃겨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장면에서 주변 인물들을 두리번거리는 당신의 시선, 약간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몸동작이 참으로 인상적이고 멋졌습니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당신은 어떤 느낌들을 고려했나요.
=홍 감독님이 쓰시는 대사는, 말하기만 해도, 매우 솔직하게 그 사람의 기분을 나타낼 수 있도록 쓰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기해보면, 모리의 후회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화면에서 보면 모리는 귀찮고 성가신 사람이기는 하지만요…. (웃음)

-모리가 꾸는 꿈 장면이 있습니다. 개울가에서 당신이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모~~리, 모~~리’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장면은 영화 속 모리도 말하듯이 이상한 느낌을 주는 꿈인데요, 실제로 촬영현장에서 찍을 때에도 그렇게 으스스하게 나올 것이라고 짐작했나요? 혹은 권(서영화)과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어떠한가요? 두 사람이 언덕을 오를 때 지금과 같이 애틋한 느낌이 날 거라고 예상했었는지요?
=아니요. 저 자신은 장면 속에서 다른 감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혹시 당신 스스로는 <자유의 언덕>의 어떤 장면을 연기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물론 그 이유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의 언덕>을 찍으며 “이렇게 작고도 아름다운 순간이 날마다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느껴서 기뻤다”고 당신은 저희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고도 아름다운 순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는지요.
=대개 사람들은 만들어진 기존의 이미지에 많이 지배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끼고 합리적으로 질서를 세워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홍 감독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실재하는 세계의 궁금함 그 자체, 맑고 탁함을 합친 것 같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마주하도록 가르쳐줍니다. 현대 일상생활에서 사각지대가 되었다고 할 만한 인간 본래의 이유나 감정의 빈틈을 홍 감독님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소한 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게 실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순수한 시선을 감독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라도 사람의 결점을 그토록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요? (웃음) 하지만 결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요. 그런 결점까지 전부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애교 있는 인물들을 영화 안에서 만들어내는 홍 감독님은 매우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홍 감독님의 현장은 스탭이 적어서 모두가 정말로 전력을 다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거기서 시작되는 농밀한 인간관계 또한 함께한 시간을 충실하게 해주었습니다.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만들기 과정상 다소 이례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대개 찍은 순서대로 장면들을 영화에 배치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자유의 언덕>은 현장에서 찍은 순서들과 완성본의 배열 순서가 전에 없이 아주 많이 다릅니다. 완성본을 본 당신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예상했던 것과 결과는 어떻게 같고 다르며 또 흥미롭습니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인터뷰를 읽을 사람도 있을 테니 구체적인 설명은 피하겠습니다만, 완성된 영화가 제 예상과 전혀 달라서 꽤 놀랐다는 점은 말해두겠습니다.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영화의 첫 부분으로, 권이 모리로부터 편지묶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한장을 읽은 다음, 권은 계단에서 편지다발을 떨어뜨립니다. 편지는 흩어지고, 어떤 순서로 쓰였는지 모르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장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줍지도 못합니다. 영화는 그렇게 권이 편지를 읽는 것과 동시에 진행됩니다. 마치 편지에 쓰여 있는 것이 영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거지요. 저는 여기에 대한 해석을 관객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몇번 보고 나서야 보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꼭 프리즘과 같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언덕>에 ‘잠, 꿈, 죽음, 시간, 자유’라는 것들이 가득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당신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게 궁금합니다. 혹시 잠, 꿈, 죽음, 시간, 자유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경험이나 생각이 있다면 들려줄 수 있는지요? 언젠가 가장 길게 자봤던 잠이라거나, 평생 꾸었던 꿈 중에 가장 이상한 꿈이라거나, 죽음이나 시간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생각 같은 것 말입니다.
=삶도 죽음도 모두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데요, 말로 잘 표현하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지금 질문에 나온 단어들은 제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다만 홍 감독님의 영화는 많은 비합리적인 일, 불가사의한 일, 우연 등이 그 자체의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들의 기분과 자연스럽게 공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자유의 언덕>은 당신의 삶에 있어, ‘어떤 일어남’으로, ‘어떤 발생’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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