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당신이 올가을 부산을 찾아야 할 30가지 이유(2)
2014-09-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윤혜지
글 : 김성훈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 아르헨티나, 덴마크, 멕시코, 미국 / 2014년 / 108분 / 월드 시네마 / 드라마

1882년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는 이 거대하고 황량한 미지의 땅에 덴마크 점령군들이 들어와 있다. 장교 군너 딘센은 열다섯살 된 딸을 데리고 막사에서 생활한다. 그녀가 이곳의 유일한 여성이다. 비극은 딸이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져 도망가면서 시작된다. 딸을 잃은 아버지 군너는 병영을 빠져나와 초원과 사막과 황야를 헤매며 딸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어느 날 그는 딸과 함께 도망친 젊은 장교를 발견하지만 그는 이미 원주민에게 당해 죽어가고 있고 딸은 온데간데없다. 군너는 말까지 원주민에게 빼앗겨 걷고 또 걸으며 다시 딸을 찾는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던 그 앞에 털 빠진 개 한 마리가 나타나고 개가 인도하는 곳으로 이끌려간 군너가 중년의 한 여인을 만나게 될 때 <도원경>의 영화적 경이는 정점에 다다른다. 아르헨티나의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는 <도원경>으로 자신의 첫 번째 시대극을 만드는 동시에 유명 배우와의 첫 번째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 동반자는 비고 모르텐슨이다. 피로와 절망이 깃든 아버지 군너 역을 맡은 비고 모르텐슨의 연기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멋지다. 한편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수많은 명작들을 함께한 촬영감독 티모 살미넨은 파타고니아의 풍경을 숭고하게 담아낸다. 1.85:1로 촬영한 뒤 후반작업에서 4:3 화면으로 자른 화면비율의 기이함 속에서 인물들의 형상은 엄중하면서도 구슬퍼 보인다. 바위에 쓰러져 잠드는 군너의 머리 위로 별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그 장면, 비고 모르텐슨과 공동으로 음악을 맡은 버킷헤드의 멜랑콜릭한 기타 연주가 흐르는 바로 그 장면의 아름다움을 잊기란 어려울 것이다.

<내 남자> My Man
구마키리 가즈요시 / 일본 / 2013년 / 129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멜로

홋카이도의 외딴 마을, 준고는 쓰나미로 고아가 된 하나를 거두어 키운다. 둘은 아버지와 딸처럼 지내면서도 점점 자신들의 관계가 보통의 부녀와는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를 손녀처럼 아끼던 오시오는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 하나를 설득하지만 이미 하나는 이전의 해맑은 소녀가 아니다. 준고와 하나가 변해가면서 홋카이도의 서늘하고 깨끗한 풍광도 점차 어둡고 더러운 도시로 옮겨간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준고는 도시로 이사를 하지만 하나가 성장할수록 준고는 몰락해간다. <내 남자>는 사쿠라바 가즈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준고와 하나가 처음으로 몸을 섞는 장면은 사뭇 초현실적으로 연출되었는데 첫사랑의 설렘과 비열한 욕망, 금기를 어기는 쾌감을 동시에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사노 다다노부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일본의 젊은 배우 중 단연 돋보이는 니카이도 후미 역시 아사노 다다노부에 밀리지 않는 뛰어난 연기를 해낸다. <내 남자>는 제3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2011년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프로젝트 선정작.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 Silvered Water, Syria Self-Portrait
오사마 모하메드, 위함 시마브 베디르산 / 시리아, 프랑스 / 2014년 / 92분 / 와이드 앵글 / 다큐멘터리

영화의 첫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폐허가 된 건물 모퉁이에 놓인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마치 울 힘조차 없는 가냘픈 누군가가 울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 자막이 등장한다. “이것은 1001명의 시리아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내가 찍은, 1001개의 이미지들로 만들어진 영화다.”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은 시리아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휴대폰과 카메라로 찍힌 각종 이미지들을 모아 편집하여 만든 영화다. 프랑스로 망명한 감독은 자신이 찍은 몇개의 이미지를 겨우 더할 뿐이다. 이미지들은 대개 참혹하기 그지없다. 고문당하는 소년, 시체가 된 소녀, 짓밟히고 끌려가는 남자와 여자, 폐허가 된 건물, 비쩍 마르거나 불타서 화상을 입은 고양이와 개. 이 이미지들이 흐르는 가운데 쿠르드족 이름으로 “은빛 수면”이라는 뜻을 지닌 여성감독 위함 시마브 베디르산과 망명객 오사마 모하메드 이렇게 두명의 화자가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설정이다. 이미지는 온통 참혹한데도 구성의 리듬은 참혹에 관한 뛰어난 영상 에세이 혹은 시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유려하다는 것이 놀랍다.

<그들이 죽었다>
백재호 / 대한민국 / 2014년 / 102분 / 뉴 커런츠 / 드라마

김상석은 옥탑방에 살고 있는 무명배우다. 친구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김상석과 친구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나서서 연출도 하고 주인공도 하는 영화 한편을 제작해보자고 의기투합한다. 동시에 김상석은 자기만의 영화 시나리오도 따로 쓰기 시작한다. 물론 마음먹은 것처럼 잘되어가는 일은 없거니와 후반부에 이르면 김상석의 삶과 영화는 서로 경계를 넘어 기이하게 뒤엉켜간다. 젊은 창작자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곤경과 무력감이 <그들이 죽었다>의 주요한 동기일 것이다. 주인공 김상석은 실제로도 김상석이며 배우이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장점이 많았던 장편 극영화 <별일 아니다>의 감독이다. 이 영화의 회심의 일격은 흔히 볼 수 있는 청춘영화의 이야기에 종말론이라는 분위기와 장치를 입혀서 막막한 청춘의 삶을 자극적으로 되물으려는 데에 있다. 지구 종말 직전에 처한 이 청춘의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영화는 묻고 있다.

<백일염화> Black Coal, Thin Ice
댜오이난 / 중국, 홍콩 / 2014년 / 106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범죄 스릴러

중국 북구 지방의 한 소도시. 석탄공장에서 토막난 시체가 발견된다. 형사 장지리(리아오판)는 사건을 수사하던 중 동료 형사를 잃고 용의자도 놓친다. 그로부터 5년 뒤, 살인자가 다시 등장한다. 장지리는 우연히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비밀스러운 여인(계륜미)을 만나 사건을 다시 쫓는다. 5년 동안 사건을 놓치지 않는 형사 장지리의 집요함, 형사와 비밀스러운 여인의 위험한 사랑과 배신, 부조리한 유머,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중국 소도시의 싸늘한 풍경 등 여러 매력이 범죄영화의 틀 안에서 버무려져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주인공 리아오판만큼이나 이야기에 신비스러운 공기를 불어넣은 계륜미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댜오이난 감독은 데뷔작 <방직성 경찰>(2003)로 2003년 밴쿠버영화제 용호상과 2004년 로테르담영화제 넷팩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두 번째 영화 <야간열차>(2007)로 2007년 바르샤바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다. <백일염화>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 수상작.

<돌에 새긴 기억> Memories on Stone
샤우캇 아민 코르키 / 쿠르디스탄, 이라크, 독일 / 2014년 / 97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드라마

1988년 이라크의 쿠르드족 대량 살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오랜 벗인 후세인과 알란은 사담 후세인의 알 안팔 학살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여배우 캐스팅 문제로 난항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캐스팅에 성공하나 여배우의 예비남편이자 사촌인 히와가 수시로 촬영현장에 나타나 이것저것 간섭하는 통에 애를 먹는다. 흥행을 위해 캐스팅한 가수 로즈 역시 영화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눈치다. <킥 오프>의 샤우캇 아민 코르키 감독의 신작이다. 실제로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제작이 지연되는 극중 상황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만드는 영화 속 현실이 겹치는 모양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의 영화와 실제의 간극에 관한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다큐멘터리적인 긴장감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가운데 이와 대조적인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의 분위기를 동시에 풍기는 점이 묘하다.

<자연 과학> Natural Sciences
마티아스 루체시 / 아르헨티나, 프랑스 / 2014년 / 71분 / 플래시 포워드 / 성장드라마

릴라는 씩씩한 소녀다. 태어난 뒤로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담임선생님 히메나가 릴라를 걱정한 나머지 여행길에 동행한다. 이름은커녕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넓디넓은 아르헨티나 대륙에서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은 여러 곳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얻은 단서를 가지고 겨우 아버지를 만난다. 하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아버지는 릴라의 기대만큼 그녀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기대가 지나치면 실망도 큰 법.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실망도 어떤 감정인지 모른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자연 과학>은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는 소녀 릴라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풍경과 작은 체구의 릴라가 대비되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대상 수상작.

<섹스 어필> (Sex)Appeal
왕웨이밍 / 대만 / 2014년 / 107분 / 뉴 커런츠 / 드라마

<섹스 어필>은 대만에서 발생했던 교수의 제자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 삼아 재구성한 영화다. 대만의 한 음악대학. 신입생 바이바이는 우연히 지도교수 리의 집에 갔다가 성폭행을 당한다. 원치 않은 관계였지만 “너를 특별한 학생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지도교수의 협박에 어쩔 수 없었다. 수치심을 느낀 바이바이는 결국 자살 기도를 하고, 자신의 딸이 교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이바이의 엄마는 교수를 고소한다. 같은 대학의 교수 린이 바이바이의 사연을 듣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섹스 어필>의 후반부는 상당한 분량의 법정 신이 펼쳐지긴 하나, 양쪽의 공방을 그리는 데 주력하는 법정영화는 아니다. 성폭행 때문에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그로 인한 자살 충동으로 고통받는 바이바이를 보듬는 데 집중한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바이바이를 통해 가해자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치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것이 룰> These Are the Rules
오그넨 스빌리치츠 / 크로아티아, 프랑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 2014년 / 78분 / 월드 시네마 / 드라마

한적한 곳에 자리한 가정집, 중년 부부 이보와 마야는 마치 세상에 둘뿐인 것처럼 서로에게 각별하다. 부부는 평소와 같이 사이좋게 식사를 준비하고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범한 하루를 보내려 한다. 하지만 이날은 어쩐지 아침부터 이상하다. 오래된 가스레인지는 고장이 나고, 덜컥대던 문고리는 잡자마자 똑 떨어져버린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 토미카는 부모를 방에 들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잠시 뒤 토미카의 방문이 열리고, 부부의 눈에 들어오는 건 상처투성이인 토미카의 얼굴이다. 토미카는 의식을 잃고, 부부는 두려움에 떨며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주변과 소통하려는 부부의 노력은 자꾸만 실패한다. 평화인 줄로만 알았던 조용함은 무관심과 고독이 되어 돌아오고, 외딴곳에 자리한 작은 집은 이들을 고립시킨다. 이보를 연기한 에밀 하드지하피즈베고빅은 제7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서 특별연기자상을 수상했다.

<낮은 밤보다 길다>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계>

새로운 물결!

조지아 특별전: 여인천하-조지아 여성감독의 힘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굴곡의 역사를 감내해야 했던 나라, 조지아. 올해 부산영화제는 최근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조지아 출신의 여성감독들이 만든 12편의 영화를 ‘조지아 특별전: 여인천하-조지아 여성감독의 힘’을 통해 소개한다. 지리적 위치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지아에서 탄생한 영화들은 인접한 국가인 러시아나 유럽의 영화들과 같지 않은, 특유의 개성과 성취를 이뤄왔다는 점에서 이번 특별전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조지아 뉴웨이브’를 선도하는 이들은 젊은 여성감독들이지만, 이들이 주목받게 된 데에는 조지아 최초의 여성감독인 누차 고고베리제의 영향이 크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녀의 1930년작 <부바, 라차산 봉우리에서>를 비롯해 그녀의 딸 라나 고고베리제의 <낮은 밤보다 길다>, 손녀 살로메 알렉시의 <펠리시타> 등 3대에 걸친 여성감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월드다큐멘터리대상을 수상한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상영된 <신부들> 등도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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