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당신이 올가을 부산을 찾아야 할 30가지 이유(4)
2014-09-30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김성훈
글 : 윤혜지

<윈터 슬립> Winter Sleep
누리 빌게 세일란 / 터키, 독일, 프랑스 / 2014년 / 196분 / 월드 시네마 / 작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 제한된 공간, 소수의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하는 이 영화는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의 캐릭터 스터디라고도 부를 만하다. 기나긴 겨울,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는 남자 아이딘이 주인공이다. 아름답고 젊은 아내와 함께 살며, 지역의 유지이기도 한 그는 얼핏 보기엔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개인적인 성취감을 위해 여가 시간에 지역 신문에 쓸 칼럼과 터키 극장에 대한 역사서의 집필을 구상하던 아이딘의 평화로운 일상은 그의 자동차에 돌을 던진 한 소년의 출현으로 흔들리게 된다.

타인에게는 엄격하나 정작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부르주아 어른과, 그런 그에게 부모가 빚독촉을 받는다는 이유로 자동차에 돌을 던져 그를 위험에 빠뜨린 소년. 우리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인가. <윈터 슬립>은 인간의 도덕과 위선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질문으로 가득하다. 상대를 바꾸어가며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기나긴 대사는 하나의 명징한 답으로 수렴되지 않는 복합적인 고민 거리를 던져주고, 그들의 긴 논쟁은 각자에게 상처와 깨달음을 동시에 안긴다. 가끔씩 등장인물의 근심어린 얼굴들로부터 빠져나와 카메라가 조명하는 아나톨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약함을 암시하는 듯 사색적이고도 관조적이다. 세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동안 <윈터 슬립>은 진중하고 유려하게 인간 군상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그 여정이 다소 예측 가능할지라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세일란의 엄정함에 매혹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 미국 / 2014년 / 122분 / 월드 시네마 / 서부극

서부 개척시대를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젊은 여인 메리. 강건하면서도 바른 그녀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긴다. 정신병에 걸린 불쌍한 세 여인을 동부 지역으로 이송하는 것이다. 가는 길이 험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빤하다. 여인 혼자서 하기란 벅찬 일이다. 그때 메리는 조지 브릭이라는 늙은 무뢰한 하나를 만난다. 교수형 직전에 처해 있던 브릭을 메리가 구해주고 메리의 일을 브릭이 돕기로 하면서 두 사람은 험난하고 거친 여행길의 동반자가 된다. 감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우 토미 리 존스다. 토미 리 존스는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번의 장례식>에서 시나리오작가 기예르모 아리아가의 각본을 바탕으로 서부극을 만든 바 있다. 그렇다면 <더 홈스맨>을 통해 두 번째 서부극을 선보이는 셈이다. 이야기는 전작보다 비교적 간단해졌지만 리듬은 훨씬 더 중후하고 우아해졌으며 한층 더 고양된 연출 실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명망 있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가 그려내는 풍경들까지 더해져 영화는 한없이 그윽하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꿈보다 해몽>
이광국 / 한국 / 2014년 / 99분 /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 드라마

어느 연극 공연장, 막이 오를 시간이 다 됐지만 관객은 한명도 없고 객석은 텅텅 비어 있다. 주연을 맡은 여배우는 화가 나서 공연장을 뛰쳐나간다. 한겨울이지만 술 한병을 사들고 인근 공원에 올라가 잠시 앉아 마시려는데 어디선가 좀 이상해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서는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다.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꿈 해몽에 능한 형사라는 말에 여배우는 호기심이 생겨 지난밤 꾸었던 이상한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넓은 평원, 차 한대가 서 있었던 여자의 꿈으로 영화가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그러더니 꿈은 이 사람의 꿈에서 저 사람의 꿈으로, 혹은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꿈으로 인물과 이야기의 선을 따라 자유롭게 넘나든다.

<꿈보다 해몽>은 <로맨스 조>를 연출하여 주목받은 이광국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전작 <로맨스 조>에서 보여주었던 다층적 구조의 방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현실이 꿈에 미칠 수 있는 영향들을 한 무명 여배우의 일상을 통해 유쾌하게 표현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유려하고 유능하게 실현된 것 같다.

<틈입자> Red Amnesia
왕샤오솨이 / 중국 / 2014년 / 115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드라마, 미스터리

중국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왕샤오솨이의 신작. 미망인 덩은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가정을 꾸린 첫째 아들, 동성 연인과 함께 지내는 둘째 아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그녀의 방식은 오히려 가족으로부터 덩을 소외되게 한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망령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누군가로부터 응답하지 않는 전화가 걸려오고 빨간 모자를 쓴 소년이 덩의 곁을 맴돌기 시작한다. 미스터리한 구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 모든 것이 빠르게 잊혀져가는 현대 중국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그러한 과거에 대한 현대 중국인들의 기억상실이 갈등과 또 다른 비극을 빚어낸다. 왕샤오솨이 감독은 담담한 시선으로 과거의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금씩 무너져내리는 여인의 초상을 조명한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찾아온, 애써 잊으려 했던 과거와 마주하는 여인을 연기하는 중국 여배우 루중의 호연이 인상적이다.

<사랑은 마시고 노래하며> Life of Riley
알랭 레네 / 프랑스 / 2014년 / 108분 / 월드 시네마 / 작가

알랭 레네의 유작.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남자 조지 라일리를 둘러싼 세 중년 커플의 소동을 그린 이야기다. 영국 요크셔 지방에 살고 있는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의사 콜린(지라르도)과 그의 아내 캐서린(아제마)은 친구인 조지 라일리가 암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캐서린의 친구 타마라(캐롤린 실홀)와 모니카(산드린 키벌레인)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한다. 모니카는 조지의 전처였다. 타마라는 조지의 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남편 잭(미셸 빌레모)에게 조지와의 숨겨진 추억을 밝힌다. 모니카의 남편 시몽(앙드레 뒤솔리에)은 아내의 전남편 조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면서 세 중년 커플은 조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억하고, 동경하고,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영화에서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조지 라일리. 어쩌면 알랭 레네는 조지 라일리라는 남자에게 자신을 투영해 죽음을 준비했던 건 아닐까. 알랭 레네가 <스모킹, 노 스모킹> <마음>에 이어 세 번째로 영국 극작가 앨런 에이크본의 희곡을 각색한 작품이다.

<번식기> The Inseminator
킴퀴 부이 / 베트남 / 2014년 / 87분 / 아시아영화의 창 / 작가

부모는 항상 자식을 걱정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도 자신의 안위보다 자식 걱정이 먼저다. 자식이 지적 장애를 겪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베트남의 외딴 시골 마을. 시한부 인생의 아버지는 지적 장애인 아들과 평범한 딸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그는 가족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아들이 특히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아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농사 짓는 법부터 혈통을 잇는 법까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가르친다. 특히, 대를 이으려면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하고, 자식을 만들려면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려주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한다. 죽음이 가까워오자 아버지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딸을 아들의 상대로 선택한 것. <번식기>는 한 남자의 노력이 광기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모습이 개발되지 않은 자연과 맞물리면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분출한다. 킴퀴 부이의 데뷔작이다.

<천국의 모퉁이> A Corner of Heaven
장마오옌 / 중국, 프랑스 / 2014년 / 94분 / 아시아영화의 창 / 성장

<샤오린 샤오리>(2006), <검은 피>(2011)에 이은 장마오옌의 세 번째 장편영화. 전작과 마찬가지로 흑백영화로 만들어져 수묵화처럼 아름답다가도 때로는 지독하게 어둡고 절망적이다. 이번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소년의 이야기다. 어느 가을, 어머니가 사라진다. 소년은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들고 어머니를 찾아나선다. 걷고 또 걸어 황량한 탄광 마을에 이른 소년은 못된 무리에 붙잡혀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 유독가스를 마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소년은 그곳에서 다른 소년들을 만난다. 친구인 줄 알았던 아이들은 소년을 도둑질과 마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시장에서 음식을 훔치다 들킨 소년은 왼팔이 부러지고 만다. 소년의 삶은 벌써 너무 무거워져버렸다. 소년은 지쳐 집으로 돌아오지만 여동생은 어디론가 팔려가고 없다. 소년은 다시 여동생의 사진을 품에 넣고 길을 나서려고 문을 연다. 한번 문을 열었지만, 또 하나의 문이 있다. 간신히 문을 밀어 연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처음보다 더욱 광활하고 까마득한 세계다.

<언어와의 작별> Goodbye to Language
장 뤽 고다르 / 프랑스 / 2014년 / 70분 / 월드 시네마 / 영상 포엠

<언어와의 작별>의 시놉시스라며 고다르는 이렇게 썼다.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결혼한 여자 그리고 독신남이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고, 그들은 다투고, 주먹들이 날아다니고/ 한 마리 개가 도시와 촌 사이를 떠돈다/ 계절은 지나가고/ 남자와 여자는 또 만나고/ 그 개는 그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찾는다/ 다른 하나는 하나 안에/ 하나는 다른 하나 안에/ 그리고 이제 그들은 셋이다. (이하 생략)” 고다르의 설명처럼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인 그리고 검둥개 한 마리와 몇명의 조연 정도가 등장하는 영화이지만 그들 사이로 개입해 들어오는 이슈들은 한정이 없다. <언어와의 작별>은 확실히 고다르의 기념비적 작품 <영화사(들)> 이후의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영화가 인간과 예술과 영화의 역사에 관해 질문하는 거대 입방체의 일환이라는 뜻이다. 지금 고다르는 그 질문들을 3D로 하고 있다. “고다르는 이미 오래전부터 언어에, 보다 정확히는 공통의 언어에 작별을 고해왔”으며 이 영화가 바로 마지막 고별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테헤란의 낮과 밤> Tales
락샨 바니 에테마드 / 이란 / 2014년 / 88분 / 아시아영화의 창 / 드라마

락샨 바니 에테마드는 이란의 유명 여성감독이다. <테헤란의 낮과 밤>으로는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는데 이 영화의 원제는 ‘이야기들’(Tales)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일화별로 꼬리를 이어가는, 이야기의 이어달리기다. 노동 환경 문제를 기록하는 다큐 감독과 그를 태운 택시 기사가 첫 번째 일화의 주자다. 이내 주자가 바뀐다. 아파서 우는 아이를 안고 택시에 탄, 목적지도 돈도 없는 한 젊은 매춘부가 등장한다. 영업을 마치고 택시 기사가 어머니에게 들르자 이제는 그의 어머니가 이야기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녀는 사장에게 떼인 공장 급료를 호소하기 위해 해당 관청을 찾지만 문맹이어서 어느 노신사에게 서류 작성을 부탁한다. 그 노신사는 무례하고 무관심한 해당 관료 때문에 성과도 없이 집에 돌아간다. 영화는 이렇게 가난하고 힘겹고 차별받는 이들을 조명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가엾은 이들이 사는 테헤란의 낮과 밤이며 그에 관한 천일야화다.

<콜드>
<나는 그가 아니다>

터키영화의 현재

터키 특별전: 뉴 터키 시네마-21세기의 얼굴들

2014년은 터키영화 탄생 100주년일 뿐만 아니라 올해 열린 제67회 칸영화제에서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이 <윈터 슬립>으로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특별한 해다. 그런 의미에서 ‘터키 특별전: 뉴 터키 시네마-21세기의 얼굴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뒤늦게 가속이 붙은 터키 영화산업의 성장과 현재를 살핀다. 아름다운 영상으로 꽉 찬 복수극 <콜드>(2013), 독특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나는 그가 아니다>(2013), 죽음이 찾아온 땅에서 생명의 노래로 절망을 극복하는 여인들의 이야기 <노래하는 여인들>(2013)을 포함해 7편의 영화가 관객을 기다린다. <인사이드>(2012)는 사회에서 비껴나 고독한 삶을 사는 은둔자 무하렘의 고통을 그린다.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미래의 사자상을 수상한 신예 알리 아이딘의 <쿠프>(2012)는 아들의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역무원 바스리의 삶을 담았다. <젤랄 탄과 그 가족의 극단적인 비극>(2011)은 중산층의 가식과 허세를 조롱하는 코미디이며, 터키 영화계의 팔방미인 아멧 보야치오글루의 <블랙 앤 화이트>(2010)는 사연 많은 손님들과 바 블랙앤화이트 매니저 파룩의 우정을 다루는 따뜻한 드라마다. 모두 기억해두면 좋을 터키 영화계의 특별한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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