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더이상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이리 답답한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네 문화에서 고인에 대한 소소한 추억을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며 서로의 마음을 도닥이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에겐 그를 기억하는 팬들과 지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런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사실 난 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힘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릴까 했다. 남들도 알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그 시작의 순간에 대해. 바로 <고스트스테이션>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이다.
2001년 3월 SBS 라디오 봄 개편을 앞두고 신해철과 나는 여의도 모 빌딩 1층 커피숍에서 만났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DJ와 PD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벼움과 허무맹랑함으로 키득거리며 구성을 짜봤다. 큰 틀은 이랬다. 우선 반말로 하자. 그리고 욕도 하자. 비방용 멘트, 브랜드명도 마음대로 말하자. 물론 전략은 필요했다. 공중파인 SBS 라디오는 비록 새벽 2시지만 방송심의를 고려해 “삐” 처리나 문제되는 부분을 삭제•편집하기로 하고, 대신 지금은 사라진 포털 사이트 ‘라이코스’에 무삭제 더티(dirty) 버전을 내보내기로. 그리고 신해철을 추종하는 청취자에게 유령이니 마녀니 좀비 같은 흉측한 이름들을 그들의 충성도에 맞게 붙여주기로 했다. 일종의 계급처럼. 그렇게 그가 왕인 그 나라의 이름은 바로 ‘고스트스테이션’이었다. 그러고 나서 신해철은 뉴욕으로 가버렸다. 우린 가끔 통화를 했을 뿐 거의 방송 파일로만 서로를 만났다.
지금은 놀라운 속도를 자랑하는 인터넷이지만 당시 인터넷 환경은 그야말로 엉망인 초보 수준이었다. 뉴욕 플러싱 어느 PC방에서 방송을 업로드하는 데 서너 시간이 걸리고 서울에서 다운로드하는 데에도 서너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한번에 오면 다행이었던 방송. 신해철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시도조차 못해볼 일이었다. 자신이 재미있겠다고 여기는 일을 제안하면 정말 애처럼 들떠서 앞뒤 생각 않고 일단 덤비는 그를 보며 걱정보단 신기함이 컸다고 기억한다. 어느 날은 뉴욕의 녹음 스튜디오가 폭우로 물에 잠겼단다. 그래서 마이크를 올려놓고 멀리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며 큰소리로 한 시간을 녹음해 보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고방식이 유연하다기보다는 애초에 어떤 제한과 틀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어느 날은 파일에 음악이 없는 거다. 아무리 들어도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50분 넘게 혼자 떠들고 나서야, 한 시간 러닝타임을 거의 다 채우고서야 첫곡이자 마지막 곡을 튼 적도 있다. 그 긴 시간을 대본도 없이 떠들다니. 그런 날은 오히려 이야기의 논리가 더 정연했다.
사실 초기 방송은 누더기옷 같았다. 반말과 욕을 편집하다 보면 방송이 온통 “삐”투성이가 된다. “고스” 식구들은 그런 거친 방송에 더 즐거워했고 열광했다. SNS가 전무한 시절, 새벽 2시에 전파를 타던 <고스트스테이션>은 그 시간대 최고 청취율을 기록했다. 중학생부터 40대 아저씨까지 그의 추종자들은 계속 늘어갔다. 신해철은 방송에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지만 가끔씩 모두를 대신해서 한명을 옹호하거나 위로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가끔 신기했고 궁금했다. 저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고. 타고난 기질도 있고 대단한 독서량도 한몫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 판단은 이렇다. 신해철은 사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언제라도 책임질 준비가 돼 있으면서도 그로 인해 바라는 대가가 없는 사람. 인기도 비난도 관심없는 사람. 마이크 앞에서도 무대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늘 당당했던 신해철이 많이 그리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