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보니 고인을 만난 것은 열일곱해 전의 일이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에서 김덕수 선생의 음악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김덕수와 친구들≫이라는 앨범을 기획 중이었다. 여러 훌륭한 뮤지션들이 이 앨범에 참여했다. 신해철은 <난장부기>라는 곡을 헌정했다.
스튜디오에 그가 처음 오기로 한 날, 스탭과 엔지니어들은 살짝 긴장해 있었다. 레코딩 스튜디오는 유명인들이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슬리퍼를 끌며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공간이기는 하나, 신해철은 당대의 슈퍼스타였을 뿐 아니라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뮤지션을 기다리는 스탭의 것이라기보다는, 록스타를 맞이하는 팬들의 마음에 더 가까웠을 것 같다. 이윽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고, 간단한 소개가 끝난 후 편한 모습으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금은 널리 알려진 그 ‘입담’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사석에서 얼마나 격의 없이 따뜻한 사람인지, ‘거침없는 독설가’라는 이미지 뒤의 진짜 그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나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중의 사랑을 그만큼 받아온 이에게 스타로서의 아우라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즐겁게 대화를 주도해갈 때의 그는, 많은 이들의 표현대로 그저 마음 좋은 동네 형이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녹음기간은 항상 유쾌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음악이었다. 최근의 녹음에서 어떤 시도를 했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예컨대, 타악기를 수십 차례 겹쳐서 녹음했더니 오히려 소리가 얇아지다가 어느 순간을 넘어서니 마음에 드는 힘 있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있었고, 뭘 또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나 싶은 것도 있었다. 아무튼 대충 적당한 데서 멈출 생각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음악에 대해서라면 끝까지 가보겠다는, 아니면 적어도 힘이 닿는 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다는 태세였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전력으로 달려서 그가 도달한 곳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두해 전에 고인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가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나의 PS 파트너>)의 음악감독을 맡은 덕분이었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회식 자리에서 그는 여전히 유쾌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여전히 많았다. 런던에서의 녹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이내믹마이크를 사용하는 보컬리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같은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기에,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힘을 내어 좀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앞에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힘을 얻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왜 이렇게 서둘러 떠나야 했을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그가 우리에게 남길 수 있었을 것들을 생각한다.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나는 돌려내라고 떼를 좀 써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예를 갖추어 전해야 할 말을 전하도록 하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의 덕분에 우리는 생의 가장 예민하고 연약한 시기를 견뎌낼 위로를 얻었다. 신해철이 없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삭막할 테지만, 그에게서 이미 받은 위안들은 그 또한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감사합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