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진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의 19세기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그림 <폴리세 베르소>(Pollice Verso). 15년 전 리들리 스콧은 드림웍스가 보내온 그 그림을 보고 <글래디에이터>에 사로잡혔다. 콜로세움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격렬한 시합을 벌인 후, 패배자를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 고독한 글래디에이터의 모습에서 그는 1980∼90년대 내내 할리우드에서 악전고투해온 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승리의 기분에 도취되는 것도 잠시, 아찔한 360도 패닝이 이어진 후,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군중을 향해 막시무스(러셀 크로)는 이렇게 외친다. “이래도 만족하지 못하나? 이걸 보러온 게 아닌가!”
리들리 스콧의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거칠게 <글래디에이터>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그는 그렇게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글래디에이터처럼 버텨왔고, 또한 명맥이 끊겼다고 생각되어온 할리우드 시대극을 찬란하게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이하 <엑소더스>)은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간 시대극이자, 지난 시대극들의 총결산과도 같은 작품이다. “나는 무엇이든 거대한 것을 좋아한다. <글래디에이터>를 만들 당시에는 작품에 어떻게 숨결을 불어넣어야 하는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엑소더스>에서도 이집트 문화를 최대한 비슷하게,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모습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하는 리들리 스콧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내린다. “<엑소더스>가 보여주는 모세의 일생은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위대한 모험이자 영성의 추구였다.”
모세와 람세스, 두남자의 필생의 대결
“이탈리아 말을 들으면서 내려오다가 다른 말로 바뀌면, 바로 거기가 예루살렘이다.” <엑소더스>의 수백년 뒤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킹덤 오브 헤븐>(2005)에서 고프리(리암 니슨)는 아들 발리안(올랜도 블룸)에게 나중에라도 꼭 예루살렘으로 찾아오라며 그렇게 이른다. 물론 우여곡절 끝에 곧장 고프리 일행에 합류한 발리안은 함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당도한 도시에서 그는 바닷가에서 소리치며 기도하는 아랍인을 본다. ‘다른 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모습도 보게 된 것. 하지만 그곳은 기독교도의 도시이기에 그가 의아해하자, 옆에 있던 일행이 얘기해준다. “돈만 내면 아랍인도 기도가 허용됩니다.” 뭐랄까, 어떤 방식으로든 ‘공존’에 대한 추구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윽고 그 일행이 아랍어로 그 기도를 해석해준다. “신을 찬양하라. 그게 마땅하리라.” 이에 발리안은 조용히 화답한다. “그러니까 어떤 종교든 우리와 기도 내용이 똑같군.”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개봉 당시 상영관 앞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의 시위가 매일 벌어졌고, 원작 소설을 쓴 작가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당연히 흥행에서도 참패했다. 세월이 흘러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노아>(2014) 또한 보수 기독교파의 비판을 받았다. 성경에 없는 감독의 ‘창작’이 많은 데다가 노아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의 관점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배급사인 파라마운트는 영화 광고에 “이 영화는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들었다”는 문구까지 삽입했다. 현재 <엑소더스>도 모세에 대한 관점으로 인해 일부 기독교도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리스도를 인간적 약점을 지닌 존재로 묘사했던 것처럼, 모세 또한 그렇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메리칸 사이코>(2000)에서 살인마 패트릭,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음지의 심판자 배트맨으로 출연한 크리스천 베일이 모세를 연기한 것부터 묘한 캐스팅이다. 오래전 세실 B. 드밀의 <십계>(1956)에서 위풍당당한 모세를 연기한 할리우드의 대표적 보수파 배우 찰턴 헤스턴의 위풍당당함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지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유대민족이 그들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민족주의 운동, 이른바 ‘시오니즘’(zionism)이라는 관점에서 리들리 스콧이 줄곧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이다. 가령 <킹덤 오브 헤븐>에서 발리안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한 사내가 “이교도 학살은 죄가 아니오. 천국에 갈 선행이오”라고 외칠 때, 그저 한 정신병자의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묘사한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고프리 영주의 땅은 척박하고 가난하지만 기독교, 유대교, 회교도 등 각기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평화롭게 모여 사는 곳으로 그려진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폭력의 광기를 주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자가 너무 많아요. 수많은 살인자들의 눈에서 광기어린 신앙을 보았소. 약자를 돕는 선행과 용기만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오”라는 대답 안에 <엑소더스>까지 가로지르는 감독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로빈 후드>(2010)의 로빈 후드(러셀 크로)는 “난 신이든 누구든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엑소더스> 또한 종교적 갈등을 전면에 극화하고 있지만, 모세와 람세스라는 두 남자의 필생의 대결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말하자면 리들리 스콧은 모세를 전지전능한 종교지도자이기보다는 그의 이전 영화들 속 주인공처럼 보편적인 이상주의자로서 그려낸다.
모세를 새로이 해석하는 데 있어, <엑소더스>의 가장 다른 점으로 얘기되는 부분은 ‘칼’이다. 바로 모세의 지팡이가 칼로 바뀐 것. 말하자면 종교지도자 이전에 칼을 든 군인 혹은 장군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 또한 캐릭터를 빚어내는 리들리 스콧 특유의 관점이기도 하다. <글래디에이터>에서도 그는 막시무스를 강직한 장군으로 묘사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연전연승하며 병사들의 큰 신임을 얻은 막시무스는 황제와 원로원 중 어디를 지지하겠냐는 물음에 ‘난 피아 식별이 분명한 군대 체질’이라고 답한다. 왕세자(와킨 피닉스)보다 막시무스를 더 총애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런 그에게 권력을 계승하길 원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악취나는 정치가 언제 종식될까. 부디 자네가 로마를 지켜주게. 로마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부패를 종식시켜줘.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자네만이 적임자야. 자네처럼 깨끗한 인물이 필요해.” 악취나는 종교와 정치 사이에서 그는 언제나 ‘기사도 정신’의 신봉자였다. 그러고 보면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기사(knight) 크리스천 베일을 모세로 캐스팅한 것도 그 스스로는 ‘신의 한수’라 여길지도 모른다.
동생 토니 스콧에게 바침
<엑소더스>의 모세가 리들리 스콧 필모그래피 남자주인공들의 연장선이라 하더라도, 가장 연약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3주 뒤면 나는 고향에 돌아가 밀을 수확하고 있을 것이다. 철통같이 뭉쳐서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는 막시무스의 불굴의 기상은 말할 것도 없고 <킹덤 오브 헤븐>의 티베리아스(제레미 아이언스)나 <로빈후드>의 윌리엄 마샬(윌리엄 허트)처럼 주변에서 든든한 힘이 되는 지원군도 없다. 모세는 철저히 혼자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남자’를 그려 왔는데, 그 꿈이 언제나 실패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는 그 어떤 포상과 벼슬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아내의 머리처럼 검은 흙에다 낮에는 허브향, 밤에는 재스민향이 나는’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말만 한다. 바로 거기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엑소더스>에서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려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시오니즘과 별개로 아내와 아들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기도 하다. <킹덤 오브 헤븐>의 발리안도 종종 밭에서 일을 하는, 죽은 아내의 환영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랬던 리들리 스콧의 남자들이 이제야 모세의 몸을 빌려 비로소 고향에 가게 된 것이다. 열정과 확신에 가득 찼던 이전 남자들에 비하면, 한없이 지쳐 있는 모세의 근원적인 피로감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동생 토니 스콧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에 큰 울림이 있다고들 한다. 어쩌면 진짜 고향으로 돌아간 동생을 보면서 자기 영화 주인공들에게 ‘귀향’의 순간을 선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지막 자막을 보면서 수많은 리들리 스콧 영화 속 형제들이 떠올랐다. 자살을 한 형수의 시체를 두고, 자살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시체의 목을 잘랐던 동생을 불구덩이로 밀어넣어 태워 죽였던 <킹덤 오브 헤븐>의 형 발리안도 떠오르지만, 기본적으로 <1492 콜럼버스>에서 콜럼버스(제라르 드파르디외)의 어린 두 아들이자 형제처럼 그는 언제나 영화 속 형제를 애틋하게 그려왔다. 모두가 실패작이라 말하지만, 난파 장면만큼은 역시 리들리 스콧 특유의 넘쳐나는 활력을 느낄 수 있었던 <화이트 스콜>(1996)에서 속 깊은 동생 척 기그(스콧 울프)는 대학을 포기하고 바다에 나가 싸우는 1년짜리 해양학교에 지원한다. 아버지도 형처럼 대학을 가라고 말하고 충분히 성적도 되지만, 형과 자신 둘 다 대학에 보낼 집안 형편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떠난 것이다. 그처럼 <엑소더스>는 모세의 험난한 일대기와 더불어 동생에게 바치는 마지막 자막이 기묘한 화음을 빚어낸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오랜 꿈을 이룬 지금, 리들리 스콧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모세와 10가지 재앙
성경에 따르면, 람세스가 이스라엘 노예들을 풀어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거절한 이후, 이집트에 연속으로 10개의 재앙이 닥친다. <엑소더스>는 익히 알려진 그 10가지 재앙을 특수효과를 빌려 스펙터클하게 그려낸다. 먼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나일강이 붉게 물드는데, 리들리 스콧은 그 첫 장면부터 어딘가 ‘신의 이기심’을 드러내려한 것처럼 악어들이 배에 미친 듯이 달려들어 잡아먹으려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무리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지만 하나같이 끔찍한 재앙들이기 때문에 그로서는 그나마 ‘균형’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내 나일강이 시뻘건 핏빛으로 변하고 산소 부족으로 죽은 물고기들이 수면에 빼곡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람세스의 도시 ‘피람세스’에 개구리떼가 먹이를 찾아 몰려오는데, 람세스의 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이집트 전역을 개구리가 뒤덮는 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실제 개구리 400마리와 개구리를 다루는 전문가 6명, 개구리를 다루는 전문견 한 마리가 세트장에 동원됐다. 그다음에는 구더기가 들끓는 개구리들의 사체에서 생겨난 거대한 파리떼가 람세스의 도시를 장악하고, 거리는 마치 검은 커튼처럼 온통 파리떼에 둘러싸인다.
다음으로는 거의 모든 이집트인의 몸에 종기가 발생하는 재앙이 닥친다. 그리고 거대한 메뚜기떼가 들이닥치고 밤에는 돌만 한 우박이 쏟아진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자연의 법칙으로,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그 비밀을 ‘환경의 재앙’으로 풀어내려 했던 재앙이라면, 마지막 10번째로 ‘신의 개입’이라는 표현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친다. 파라오의 아들을 비롯하여 이집트인의 장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다 죽어버린 것. 이후 람세스는 이스라엘 노예들의 아이는 죽지 않은 사실을 알고, 마침내 그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피람세스의 몰락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집트에 고대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또한 오직 성경에만 실려 있다. 무려 100여명의 자녀를 두고 67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지도자 람세스의 재위 기간과 그 출애굽의 시기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서 성경 혹은 모세를 다룬 영화들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모세와 그 신이 파라오와 이집트의 신들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신의 대리인 앞에서 머뭇거리고 다소 우유부단한 모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는 ‘결단’의 순간이 생략돼 있을뿐더러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했다’는 식의 마술과도 같은 일도 묘사하지 않는다. 리들리 스콧은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상징 사이에서 모세라는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