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관점, 상상, 그리고 믿음
2014-12-16
글 :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십계>와 <이집트 왕자>를 경유하여,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의 신학적 관점
<십계>

성경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때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은 무엇일까? 예수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고 그다음 순위를 차 지하는 것을 고르라면 단연 모세의 출애굽 관련 내용이 아닐까 싶다. 찰턴 헤스턴이 주인공 모세로 나왔던 <십계>(1956),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1998)가 대표적이고,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이하 <엑소더스>)은 구약성서 속 ‘출애굽기’를 뜻하는 영어 ‘Exodus’를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다. ‘애굽’이 한자어로 이집트를 뜻하는 말이니, ‘출애굽기’는 풀이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할리우드는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모세를 소환해 다시 무대로 올리는 것일까?

왜, 다시 모세인가?

‘엑소더스’라는 말에는 일종의 주술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서구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그 무엇을 의식의 차원으로 호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자유(Freedom)다. ‘엑소더스’는 ‘자유’에 대한 이러한 서구인들의 집단무의식을 기억하게 하고 재생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유와 해방의 원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의 모든 숭고한 소재들이 그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엑소더스’처럼 주기적으로 영화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에 비해 성서 속 출애굽기에는 영화 흥행의 필수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말인데, 예를 들면 출생의 비밀, 스펙터클, 증오와 복수 같은 요즘 유행하는 극영화의 기본문법들이 그것이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이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엮는 강력한 내러티브가 없었다면 성서 속 모세 이야기는 사장되어버렸을 것이다. ‘엑소더스’ 안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한 인간이 신과의 접신을 통해 슈퍼맨으로 변신해 결국에는 기적과 같은 역사를 이루었다’는 강력한 판타지가 있다.

하지만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기에 관해서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출애굽 시기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홍해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호기심까지 실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출애굽의 방식도 영화에서와 같이 40만명이 한꺼번에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주장에서부터 몇 차례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출애굽을 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도모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2014년 할리우드의 극영화 <엑소더스>와 그 안에 배치되어 있는 21세기 모세를 어떤 시각으로 관전해야 하는 걸까? 이러한 물음을 갖고 얼마간 고민을 하다가 <엑소더스>에 나오는 모세의 캐릭터를 다른 모세 관련 영화와 비교하면서 시대마다 달랐던 모세의 초상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각 시대에 대한 징후적 독해도 가능할 것이고, 모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말이다.

뭐니뭐니해도 성서 속 출애굽 사건을 영화한 것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찰턴 헤스턴이 모세로 나왔던 영화 <십계>다. <십계>는 1956년 헝가리의 소련에 대한 항거가 진압되던 해에 만들어졌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확립되고, (미국 입장에서) 소련의 패권주의가 확인되던 그 무렵이었다. 반면,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8년에 개봉됐다. 1998년은 소련으로 대표되는 현실 사회주의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10년이 되어가던 해였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비록 많은 갈등과 저항들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을 하나씩 완성해가던 무렵이었다. 이렇듯 두 영화 사이에는 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물심양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출애굽 관련 영화 속 주인공 모세는 이러한 시대상의 투영이라 할 만하다. 특별히 <십계>에서 모세 역을 담당했던 찰턴 헤스턴은 람보, 코만도, 록키 등 냉전시대 할리우드 근육질 영웅들의 조상쯤 되지 않을까 싶다. 강철과 같은 의지와 불같은 추진력으로 악의 무리를 때려부수는 불패의 영웅 말이다. 한편, <이집트 왕자>에 등장하는 모세는 외형적 조건에서부터 찰턴 헤스턴과 대조적이다. 야리야리한 체격과 촉촉한 눈망울 하며 어느 모습 하나 혁명을 완수할 전사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모세와 람세스와의 역학관계에서도 <십계>와 <이집트 왕자> 속 서로 다른 모세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십계>에서 모세의 상대역 람세스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대머리 배우로 유명했던 율 브린너였다. 찰턴 헤스턴과 율 브린너의 관계는 처음부터 팽팽했고 대화의 상대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마치 1956년 당시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집트 왕자> 속 모세와 람세스의 관계는 함께 궁궐에서 자라며 유년기 추억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일종의 형제애 내지 우정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아(我)와 피아(彼我)간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여러 갈등이 등장하지만 단선적인 해석의 잣대로 해명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관계법칙이 1998년에 제작된 <이집트 왕자>에는 깔려 있는 셈이다.

<이집트 왕자>

개인적으로 <엑소더스>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십계>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성경에 적혀 있는 것처럼 모세가 되어 바다 위로 팔을 내밀자 바닥이 말라서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로 난 마른땅을 밟고 지나갔다. 하지만 <엑소더스>에서는 모세가 팔을 바다 위로 내밀지도 않았고, 마른땅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흐르는 물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어떤 기적이나 징표를 보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 자체가 기적이고 신적 행동이 되는 장면이었다.

이것을 미학적인 견지에서 바라보자면, 기존의 미학이론에서는 미적 주체가 미적대상을 구현함에 있어 미메시스, 즉 모방을 최우선 가치에 두었다. 하지만 현대예술은 이런 ‘재현(再現)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개시(開示)로서의 진리’를 주장한다. 단순히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행위를 함으로써 예술가는 새로운 미적 질서를 열어 보인다는 측면에서 개시인 것이다. 신적인 체험과 기억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모방해서 신전과 신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신상을 만들고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고대인들은 신과 만났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미적 원리를 <예술 작품의 근원>이라는 글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술체험을 회고하면서 서술했다. <엑소더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 그와 같다. 마른땅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퍼런 물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흐르는 바다를 향해 몸을 맡긴다. 그러면서 새 역사를 스스로 창조해갔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신을 쟁취해냈다.

람세스는 바다를 향해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적하는 도중에 맞닥뜨린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묻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신한다! 이쪽이다.” 람세스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같은 시각 모세가 앞을 가로막는 바다를 바라보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절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모르겠습니다”와 “나는 확신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종교적인 언어일까? 우리는 흔히 선(善)의 반대말을 악(惡)이라 말하지만, 악을 현실에서 구분해내기란 만만치 않다. 어쩌면 악은 우리의 현실에서 ‘절대’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이 종교적 확실성이든, 이념적 맹목성이든 간에 인류가 저질렀던 모든 만행과 학살과 광기는 영화 속 람세스가 했던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절대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 아닐까?

신을 만나는 자리, 혹은 신이 오는 자리

문득 영화 속 모세가 산에서 신을 만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성경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있는 야훼를 만났다고 적고 있다. <십계> 속 찰턴 헤스턴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신을 만나겠노라고 하면서 산으로 오르지만, 2014년 <엑소더스>의 모세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산을 헤매다가 얼떨결에 신을 만난다. 일상의 고된 노동의 현장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것초자 신의 섭리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실에 뿌리박은 자신의 남루한 삶을 거역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았던 모세가 그 삶 속에서 신적 원리를 발견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즉,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자리는, 신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내가 그 음성을 듣겠다고, 내가 그 신을 보겠다고 해서 찾아지거나 획득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람세스가 한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발언은 신이 오는 통로를 가로막는 바리케이드와 같다. 신을 만나는 자리는, 혹은 신이 오는 자리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실존적인 고민을 갖고 몸부림치는 여린 영혼이 위치한 그곳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현실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이 서 있는 자리여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곳이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고, 바로 그곳으로 신은 찾아온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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