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버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도 뜯어보면 순정남이었다. 잔정은 많지만 그리 내색하지 않는 경상도 순정남. 이제 막 뜨겁게 첫사랑을 통과하는 <쎄시봉>의 오근태는 쓰레기보다 풋풋하고 어수룩한 순정남이다.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어?” 라고 묻는 첫사랑 자영에게 “평생 널위해 노래할게”라고 대답하는 남자. 낯간지러운 멜로를 천연덕스러운 일상의 멜로로 탈바꿈하는 데 출중한 재주를 지닌 정우가 제대로 사랑에 빠졌다.
-<응답하라 1994> 이후 어떻게 지냈나. 불러주는 데가 많아 제대로 쉬지도 못했겠다.
=물리적으로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찾아주는 분들은 너무 많은데 그걸 다 소화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다 보니 힘든 일들이 생기더라. 2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무조건 배운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배우로서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30대 즈음부터는 내가 진심으로 애정을 느끼고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 뜻과는 달리 상처주는 일들이 생겨서 요즘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럽다.
-<쎄시봉>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렸나.
=전부 다. 모든 게 충족됐다. 김현석 감독님 작품도 좋아했고 시나리오도 재밌었다. 시나리오 보면서 울었고 또 설렜다. 김희애, 김윤석 선배님이 캐스팅된 상태였는데, 선배님들과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영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설렜나.
=근태가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나 역시 느낀 적이 있으니까. 그 감정들이 대사를 통해 나를 찌를 때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러다 눈물도 흘렸고. 기뻐서 혹은 슬퍼서 혹은 아련해서. <쎄시봉>은 옛 감정을 추억하게 해주는, 추억여행 같은 영화다.
-민자영에게 첫눈에 반해 노래를 부르는 오근태는 대단한 순정남이다.
=순정남이라기보다 그냥 한 사람만 좋아하는 거다. 한 사람만. 그 친구(자영)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노래도 하고 기타도 치고. 첫사랑의 의미가 좀 큰 인물인 거지.
-실제 정우와 근태는 얼마나 닮았나.
=분명 닮은 지점이 있다. 근태뿐만 아니라 내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가 그렇다. 캐릭터에 나를 맞추려 하기보다 ‘나라면…’이란 생각으로 캐릭터를 내게 끌어오는 편이다. 그러니 군데군데 실제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다.
-당시의 포크 음악을 평소에도 좋아했나.
=쎄시봉 선배님들은 물론이고 김현식, 김광석, 이문세 선배님의 노래들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사랑 내 곁에> <그녀가 처음 울던 날>과 같은 정서의 곡들이 내게 잘 맞는 것 같다. 예전에 부모님이 서점을 하셨는데 서점에 라디오나 음악을 늘 틀어놓았다. 생각해보면 그걸 듣고 자란 영향 같기도 하고.
-현장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편인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 어색함이 없어지면 장난을 좀 치는데 처음부터 활발하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현재 촬영 중인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에선 막내다. 막내인데도 조용히 있나.
=조용~하다. (웃음) 조성하 선배님, 황정민 선배님이 워낙 재밌고 편하게 해주셔서 리액션만 열심히 하고 있다.
-<히말라야>도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선택한 작품인가.
=안 할 이유가 없다는 그 말이 개인적으론 너무 무난한 느낌이 든다. 안 할 이유가 없어서 선택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이 진짜 하고 싶었다.
-다시 <쎄시봉> 이야기로 돌아가면, 배우 김윤석이 40대의 근태를 연기한다. 사실 두 배우의 이미지는 꽤 다른데.
=그런가? 외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웃음) 김윤석 선배님이 아무래도 카리스마 있고 무거운 역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 같다. 밝고 코믹한 느낌은 아니니까. 김윤석 선배님과 비교를 하는 게 아니라 내게도 분명 선배님이 가진 남성적인 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이 영화 중간중간에 나올 거다. 근태라는 인물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작아지는 캐릭터지만 동성 친구들 사이에선 절대 소심한 친구가 아니다.
-<쎄시봉> 찍으면서 나의 스무살 시절과 20대를 돌아보게 됐을 것 같다.
=또래 친구들과 음악에 파묻혀 촬영한다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다. 드라마, 광고, 화보 촬영으로 많이 지쳐 있을 때였는데 <쎄시봉> 찍으면서 많이 치유받은 것 같다. 현장이 즐거웠고, 나는 즐겁게 연기만 하면 됐다.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
=<히말라야> 이후 계획은 아직 없다. 특별히 계획을 세우며 살지 않는다. 세워봐야 계획대로 안 되더라. 어렸을 땐 계획을 잘 세웠다. 올해에는 영화 몇 작품 하고 드라마 몇 작품 하고…. 그런데 어디 뜻대로 되나, 안 되지. 또 사사로운 계획이 쌓이다보니 내가 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느낌이 들더라. 물론 큰 계획은 세우기도 한다. <응답하라 1994> 끝나고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쎄시봉>과 <히말라야>를 하게 됐다.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 있다면 그게 드라마든 영화든 혹은 예능이든 가리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