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포르노물과 할리퀸 로맨스의 이종교배. 영국의 주부 E. L. 제임스가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연재한 소설은, 그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1억부 초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회적 현상으로 이슈의 중심에 섰으며, 마침내 영화화되었다. 2월26일 국내개봉을 앞두고 주부들의 신화가 된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보았다. 영화 연출을 맡은 샘 테일러 우드의 서면 인터뷰와, 화려한 라인업으로 화제가 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O.S.T도 함께 들여다본다.
야동을 보기 위한 ‘필요’가 PC의 공급을 부추기는 것과 같은 상황은 하드웨어의 ‘사용’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변수다. ‘아마존 킨들’의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다름 아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야한 소설이다. 대문짝만하게 제목이 박히지 않아 굳이 커버를 숨기려 애쓰지 않아도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당당하게 꺼내 읽을 수 있는 전자책 킨들은, ‘젖꼭지’, ‘클리토리스’, ‘채찍’, ‘엉덩이 때리기’ 같은 성적 용어들이 한 페이지에 수두룩이 등장하고, ‘BDSM’(결박(Bondage), 훈육(Discipline),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 같은 극단적 성애로 점철된 금서를 맘 놓고 즐길 수 있는 ‘떳떳한’ 창구가 되어주었다.
팬픽이 1억부 베스트셀러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신화가 있기까지, 이 소설은 처음엔 1963년생 영국 주부 E. L. 제임스가 <Snowqueens Icedragon>이라는 제목으로 <트와일라잇> 시리즈 팬페이지에 연재한 팬픽에 불과했다. 살만 루시디가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이 책에 비하자면 <전쟁과 평화> 수준이다”라고 평가한 이 낯 뜨거운 소설은 그러나 발간 이래, 1억부의 판매고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각종 성기구와 성적 용어들이 5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성의 해방 역할을 자처했으며(물론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금서다), 소설의 인기로 섹스토이 산업이 부흥했고, 조만간 베이비붐이 올 거라는 영국 대학교수의 전언이 이어지고 있다. 플로리다의 도서관에서 서가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퇴출 목록에 올랐던 ‘불명예스런’ 사건은 오히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신화를 확장하고 공고히 해주는 적절한 에피소드로 남게 되었다. 소설은 가진 것 없는 순진한 여대생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가 부와 출중한 외모, 능력을 겸비한 성공한 사업가 크리스찬 그레이(제이미 도넌)를 만나 성의 세계에 눈뜨게 된다는 할리퀸 로맨스의 기본 플롯을 바탕으로, 이 둘의 잠자리를 세심하고 집요하게 탐험해나간다. 남자와 단 한번도 자보지 않았던 처녀와 이미 어린 시절 엄마의 친구로부터 받은 가학적 성관계 이후, 15명의 여자와 SM 플레이를 즐겼던 변태 성향의 남자. 성적 경험의 차원이 다른 두 남녀는 철저하게 작성된 계약서에 따라 사랑을 나눌 것을 제안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이 순전히 여성 독자를 위해 고안됐고, 특히 주부층의 마음을 정확히 공략한 ‘주부들의 포르노’라는 점이다. 지배하는 남자 도미넌트와 순종적인 여자 서브미시브 사이에 성 역할 규정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하드코어 포르노물’적인 소설치고 주독자층이 아주 특이한 경우다. 급기야 이 책에 감화받은 영국의 한 주부가 남편에게 ‘그레이와 똑같이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거절당하고 결국 이혼했다는 비극적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영화가 포착한 지점도 바로 여기 있다. 문제적 장면을 충실히 재연하되, 결국 둘 사이의 ‘밀당’, 기존 할리퀸 로맨스물의 성격을 가진 이종교배적인 원작의 정서를 스크린까지 확장해보자는 것이다.
어디까지 묘사되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폴린 레아주의 <O의 이야기>(1954)나 에마뉘엘 아르상의 <에마뉘엘: 여인의 즐거움>(1967) 같은 금서들의 계보를 잇되, 동시대적인 호흡과 멜로의 효용을 모두 가진 작품이다. 딱 까놓고 말해 더 야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영화화 성공은 확실해 보였다. 특히 블록버스터와 장르물에 밀려 할리우드에서는 이제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R등급 영화의 베드신을 제법 큰 규모의 프로젝트로 재연해볼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아메리칸 지골로>(1980), <나인 하프 위크>(1986) 같은 과거 수위 높은 베드신이 가물가물한 지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지점이기도 하다. 과연, 2012년 마켓에 원작의 판권이 나오자마자 할리우드의 관심은 폭발해 6개의 스튜디오가 각축전을 벌였고, 프로듀서들은 끊임없는 미팅을 이어갔다. 결국 유니버설픽처스가 500만달러를 지불하고 금서에 손을 댈 권리를 획득했다. <존 레논 비긴즈-노웨어 보이>(2009) 같은 무난한(!) 작품을 연출한 샘 테일러 우드 감독이 이런 파격적인 작품에 합류한 게 다소 의아해 보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기대가 되는 선택이기도 하다. 주독자층과 비슷한 또래인 중년 여성으로서 감독이 줄 수 있는 디테일한 정서적 공감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23살 연하인 배우 애론 존슨과의 결혼으로 파파라치의 타깃이 된 그녀의 독특한 캐릭터도 이 연출의 과정에 한몫했지 싶다.
판매고에 뒤따르는 홍역은 이미 캐스팅 전쟁에서 시작됐다. 제작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노출 신을 감당해줄 여배우 찾기에 꽤 애를 먹었겠지만, 정작 대중의 관심은 소설의 독자로서 자신이 투영한 완벽한 할리퀸 왕자님이 누가 될 것이냐에 쏠려 있었다. 캐스팅 1순위 물망에 올랐던 찰리 허냄 대신 캘빈 클라인 속옷 모델 출신의 연기 경험 전무한 제이미 도넌이 최종 확정됐을 때,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렸다. 누군가에겐 환호의, 누군가에겐 실망의 반응이지만, 솔직히 이 캐스팅은 어느 쪽으로 가든 1억명 독자와의 팽팽한 신경전이 될 게 뻔했다.
이미 결정난 그레이씨에 왈가왈부할 타이밍은 아니고, 개봉에 앞서 이 영화를 향한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수렴된다. 그래서 원작 속 그들의 하드코어적 성행위가 어느 정도로 재연되었을까. 그 유명한 탐폰 섹스 장면은 들어갔을까? ‘고통의 붉은 방’은 얼마나 공개되는 걸까? 이 변태성욕의 장을 향한 엿보기의 허용치야말로 그레이씨를 만나기 전 우리가 흥분하는 진짜 이유다. 다소 안타깝지만, 영화의 방향성은 일종의 절충안으로 읽힌다. 유니버설은 고액의 판권료에 걸맞은 보다 넓은 관객층을 유도하기 위해, NC-17(17세 이하 절대 관람불가) 등급을 목표로 소설의 파격적인 성행위 묘사를 강행하자는 작가의 의견에 제동을 걸어왔다. BDSM보다 ‘러브 스토리’에 너무 방점을 찍는다면 원작의 효용이 다소 미약해질 우려를 피할 수 없다. 밸런타인데이에 먼저 공개되는 미국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R등급(17세 이하의 경우 부모 또는 보호자의 동반 관람) 판정을 받았다. 붉은 방에 대한 힌트는 여기까지다. 자, 그레이씨를 만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