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으로 날아갔다. 쉽게, 자주, 또 폭넓게 접하지 못해 낯선, 그래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웨덴 영화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함께했다. 도착하기 전, 스웨덴 영화사의 서두에 이름을 올릴 몇몇을 기억해보는 일로 워밍업을 시작했다. 인간과 신, 죽음과 구원을 특유의 익살로 풀어낸 잉마르 베리만, 노동계급의 역사를 자신의 작품의 정수에 올렸던 얀 트로엘, 사색적인 영화와 거리를 두며 실천적 의미의 영화 만들기로 직행했던 보 비더버그와 같은 거장들이 제일 먼저다. 그레타 가르보나 잉그리드 버드먼처럼 세계 영화사의 한 시기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기억되게 만든 배우들도 있다. 이들은 스웨덴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보기 드문 유산이자, 스웨덴 영화인들의 자부심이다. 그 뒤로도 스웨덴 영화인 인명 사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있다. 부조리극과 블랙코미디 사이를 오가는 로이 앤더슨이나 과장되지 않은 코미디극에 능하다는 라세 할스트롬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웨덴 장르영화가 일으킨 신선한 돌풍도 이야기돼야 한다. 2000년대 후반, 뱀파이어 성장무비라고 해도 좋을 <렛미인>(2008)과 스티그 라르손 원작을 영화화한 <밀레니엄> 3부작의 성공은 스웨덴영화만의 독특한 무드를 만들어내며 두루 회자되곤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선댄스에서는 고란 올슨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 <더 블랙 파워 믹스테이프>(2011)가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말리크 벤디엘로울의 <서칭 포 슈가맨>(2012)이라는 경탄스러운 다큐멘터리의 등장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스웨덴 출신의 영화 장인들과 그 후속 세대의 등장이 곧 스웨덴 영화산업에 대한 세계 영화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다. 스웨덴영화는 여전히 유럽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스웨덴영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을까, 스웨덴의 관객은 어떻게 영화를 소비하는가, 스웨덴 영화계는 어떤 이야기와 인물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나. 인간답게 잘 사는 길을 오랫동안 고민해온 스웨덴 사회의 전통과 지향이 그들의 영화산업 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나. 질문들을 챙겨 스웨덴 영화계의 두 거점, 스톡홀름과 예테보리를 방문해 스웨덴 영화인들에게 직접 물었다. 스웨덴영화협회(Swedish Film Institute, 이하 SFI)로부터는 스웨덴 영화제작의 기본적인 과정을, 예테보리국제영화제의 아트 디렉터에게는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영화에 대한 전망을 전해 들었다. 현장 경험이 많은 감독과 제작자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 중인 스웨덴 영화계의 어른 로이 앤더슨 감독과의 인터뷰가 있다. 여성 제작자 집단인 제작사 도리스 필름 방문기까지 더하면, 이 짧은 취재기가 스웨덴영화로의 쓸모 있는 안내서, 스웨덴영화에 대한 의미 있는 예상도로 완성된다.
규모의 경제에 휘말리지 않고 자국영화 육성
‘스웨덴 영화 시장은 상당히 작다.’ 만나는 스웨덴 영화인들마다 이 말을 하이쿠(일본 단시)처럼 붙인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 기준 스웨덴의 영화 관객수는 1840여만명, 자국영화 제작편수는 51편, 스크린 수는 816개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49편의 스웨덴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됐는데 이는 전체 스웨덴 영화 시장의 25%에 해당한다. 스웨덴 극장 상영작의 65% 이상을 할리우드영화가 차지하고 있고 유럽영화가 9%대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수치상으로만 보자면 스웨덴 영화계는 세계 영화계가 신경을 바짝 쓰고 지켜봐야 할 경쟁력 있는 규모의 시장은 확실히 아니다. 스웨덴 영화계가 노르웨이, 덴마크에 이어 핀란드, 아이슬란드 영화계와 공동 제작을 계속해나가는 이유에는 이처럼 작은 자국 시장 상황을 타계해보려는 시도가 얽혀 있기도 하다.
한편 스웨덴 영화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말이 있다. 바로 ‘공적 지원의 확대와 차별 없는 제작 환경 조성’이다. 이것은 스웨덴 영화인들이 규모의 경제 논리에서 한발 떨어져서 자국의 영화산업을 안정적으로 견인해나가기 위해 택한 방안이었다. 스웨덴 문화부미디어•필름 부서의 카샤 비오르클룬드 부국장이 “창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영화를 산업에 앞서 예술로 바라봐야 한다. 이 관점을 견지하면서 지속 가능한 영화제작 여건을 만들어야만 자국의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스웨덴의 영화인들은 시장의 유동성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상태에서 영화제작을 할 수 있는 이유로 SFI의 지원을 꼽는다. SFI는 1963년 문을 연 이후로 영화학교, 시네마테크, 필름 커미션을 하나씩 만들어오며 영상물 제작 및 보존을 담당하는 준정부기관이다. 시나리오 기획 개발부터 제작 지원, 영화의 배급 및 해외 수출, 필름 아카이빙과 디지털화 업무까지 두루 관여한다. 그중에서도 SFI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분야는 영화제작이다. 스웨덴 필름 및 TV 프로듀서연합 소속의 프로듀서 일라 베리크비스트 울풍은 “제작비의 50% 정도를 SFI에서 받고 있다. 나머지 비용은 스톡홀름을 포함한 4개 지역에서 조성된 지역 기반 펀드, 배급업자, 스웨덴 공영방송(Sveriges Television, 이하 SVT),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는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SFI 자금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전한다.
SFI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크게 보면 두 군데다. 정부의 공적 자금과 ‘스웨덴 영화 협약’의 기금이다. ‘스웨덴 영화 협약’은 2013년 1월1일부터 스웨덴 영상 제작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발효된 협약이다. 정부도 일정 정도 기금을 냈고 영화 및 TV 관련 제작자들, 방송사들이 자발적으로 기금 확보에 참여해 481억원에 가까운 초기 자금을 마련했다. 기금은 주로 장•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 TV 드라마 제작 지원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SFI 자금이 마련되는 또 다른 출처가 있다. 바로 영화 티켓에서 나오는 영화발전기금이다. 스웨덴에서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경우, 티켓값(편당 대략 1만4천원이다)의 10%가 SFI의 제작 지원금으로 자동 적립된다. 이렇게 형성된 SFI 자금으로 2013년 제작된 스웨덴영화 49편 중 31편이 제작 지원을 받았다.
영화산업 내의 성평등을 지지한다
SFI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게 또 하나 있다. 이른바 영화산업 내의 성비 불균형을 깨뜨리려는 그들의 시도다. SFI의 커뮤니케이션 부서장인 레베카 이오안니디스 린드베리는 “성평등은 스웨덴 영화계뿐 아니라 스웨덴 사회 전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다. SFI는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왔다. 그 결과 2013년에 SFI가 제작 지원한 장편 극영화의 60% 이상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고 여성 작가가 쓴 시나리오가 지원작의 46%를 차지했다. 단편다큐멘터리 제작의 경우는 감독, 작가, 프로듀서 세 분야 모두 60% 이상 여성 영화인들로 구성됐다”고 강조한다.이렇게 만들어진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상당수가 SVT를 포함한 TV용 영화로 배급되고 있다. SFI가 영화뿐 아니라 스웨덴 방송사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다 스웨덴 영화산업 자체가 방송 플랫폼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난 통계 자료가 하나 있다. SFI의 집계에 따르면 2013년 한해 스웨덴 국민 한명이 본 영화 편수는 무려 80편이다. 하지만 이중 관객이 직접 극장에 가서 본 영화는 단 2편에 불과하다. 스웨덴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대부분 TV와 DVD, VOD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의미다. 스웨덴에서 만난 제작사 필름 렌스(Film lance)의 프로듀서인 프란쉬 수팅에르는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장편 극영화의 예산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반면 스웨덴에서 단편 제작은 패키징 과정이 수월한 데다 TV 방영이라는 확실한 수익 창출 플랫폼이 있어 활발히 진행 중이다”라고 말한다.
※ 스웨덴 영화계 취재에 주한 스웨덴대사관이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