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 웨던 감독은 난치성 워커홀릭이다. 얼마나 중증이냐면 전편 <어벤져스> 촬영을 끝내고 본격적 후반작업에 들어가기 전 짧은 휴식기에 “재충전을 위해서” 자택에서 셰익스피어 원작을 현대로 옮긴 흑백 저예산영화 <헛소동>을 찍었다. 그리고 실제로 에너지를 얻고 관점을 전환해 <어벤져스>를 훨씬 신나게 완성했다고 한다. 불면증이 있지만 걱정이 많아서라기보다 다음 일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는 열정의 인간답게, 촬영 도중 짬을 내 기자들을 만난 조스 웨던은 역력한 과로의 기색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활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웨던은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코믹스의 ‘팬’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먼저 스토리를 입수하고 매일 아침 어벤져스 멤버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 뛰는. 어벤져스의 제트기 퀸제트가 격납된 세트로 걸어들어온 조스 웨던은 테이블에 놓인 십수대의 녹음기 마이크에 일일이 “안녕, 안녕, 안녕” 귀여운 인사를 던지며 달변에 시동을 걸었다.
-1편에 비해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작업이 편한가.
=어떤 면에서는. 전편이 있었기에 조스 웨던의 <어벤져스> 영화에 대한 상(像), 어떤 견본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생겼다. 1편에서도 배우들이 신뢰해주긴 했지만, 연기자와 스탭들이 내가 선택한 특정 숏, 미장센, 리듬의 이유를 현장에서는 미처 몰랐던 적도 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 2편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게다가 <어벤져스> 이후 <토르: 다크 월드>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가 나왔다. 다들 이 우주에서 자기 캐릭터의 위치를 더 잘 이해하는 상태다.
-<헛소동>으로 인해 셰익스피어 극에 대한 당신의 애정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와 마블 유니버스가 공유하는 매력이 있다면.
=마블 코믹스 자체가 장중하고 연극적인 스토리를 풀어놓는 경향이 있다. 배신도 많고 로봇들이 출동해 활약해야 마땅한 판국에 (옥좌에 폼 잡고 기대앉는 시늉을 하며) 이러고 앉아 있는 장면도 상당히 자주 나오고…. (좌중 웃음) 거대한 캔버스에 큰 주제가 펼쳐지지만 어디까지나 캐릭터를 통해 인간의 차원에서 표현된다는 점도 닮았다. 우리는 모두 셰익스피어를 흉내내지만 마블은 특별히 더 그렇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악당 울트론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관객이 대도시를 때려부수는 슈퍼히어로영화 악당들에 대해 식상해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함정을 피할 수 있었나.
=우리도 “헤이, 방금 우리가 도시 하나를 때려부수고 승리했네? 다들 참 잘했어요!” 하는 식의 서사에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나나 케빈 파이기 대표, 프로듀서 제레미 레첨은 슈퍼히어로들의 싸움이 보통 사람의 삶에 끼치는 영향과 영웅에 대한 인식을 극중에서 꼭 다루려고 하며 끝까지 주의를 기울일 거다. 하지만 거대한 스케일에서 작업하면서 미세한 요소에 연연할 수도 없다. 요컨대 관객에게 흥분을 안기면서도 대량파괴의 스펙터클을 착취하지 않는 선을 찾아야 한다. 울트론의 큰 특징은, 내가 아는 가장 덜 로봇스러운 로봇이라는 점이다. 제임스 스페이더를 울트론 역으로 원한 이유는 그에게 기이한 성격, 정제된 광기를 표현하는 일탈적 면모가 있어서다. 원작 코믹스의 울트론은 50년째 분노로 들끓고 있는 캐릭터로, 심리치료사가 필요하다. (좌중 폭소) 울트론은 본인의 행위에 의해 남들만큼이나 자기도 혼란에 빠진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과는 다르다. 물론 울트론은 HAL도 일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벤져스> 말미에 등장한 타노스가 2편의 주적이라고 짐작한 관객도 많았다.
=나는 타노스를 당장 다음 영화의 악당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울트론이 어벤져스들과 DNA를 공유한 존재라면, 타노스는 오랜 시간 어둠 안에 들어앉아 있는 거물이다. 아무리 궁해도 함부로 쓰지 말고 ‘킵’해두어야 할 캐릭터랄까.
-캐릭터들은 1편으로부터 어떻게 성장하나.
=내가 영화를 쓰고 완성해가는 방식은, 캐스트 전원이 “이건 내 영화야”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모든 캐릭터가 온전한 궤적을 갖고, 가능한 한 풍부하게 상호 연결되도록 노력한다. 1편이 있어서 이제는 멤버끼리의 관계나 과거사를 파고들어갈 여력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외) 독자적 프랜차이즈를 갖지 않은 캐릭터들에 언제나 더 흥미를 느낀다. 제약이 적어서 쓰기도 더 쉽다. (웃음) 이번 영화는 모든 인물에게 고루 봉사할 거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퀵 실버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퀵 실버와 어떻게 다르게 그려지나.
=<엑스맨>쪽에서 퀵 실버 출연을 발표했을 무렵 난 이미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각본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도 두 퀵 실버는 매우 다르다. 일단 배우가 다르고 이야기에 입장하는 이유도 다르다. 스칼렛 위치와 퀵 실버는 내가 읽으며 자란 코믹스에서 중요한 멤버였고 시각적으로 영화적 쾌감을 고조시킬 수 있는 종류의 (직접적 완력과 무관한) 초능력을 가졌다. 음, 그들이 어벤져스를 좋아하리라는 보장은 없고 전환점이 오기까지는 꽤 큰 해를 입힐 수도 있다. 나는 어벤져스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줄 이질적 관점을 소유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게다가 조력자라고는 자기복제물밖에 없는 악당 딱 하나만 갖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직접 연출하지 않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에 대해서도 모니터링을 하는 것으로 안다. 향후 이 우주의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불침번(the watcher)이다. 예전에는 불침번 중 한명(a watcher)이었는데 이제 제일 중요한 불침번(the watcher)으로 승진했달까. (웃음) 케빈 파이기가 주로 모든 영화의 각본을 읽고 메모를 전달하고 촬영본을 모니터링하고 다시 방향을 잡는다. 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제2기에 몇몇 장면을 쓰기도 하면서 케빈과 각 영화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도왔다. 그러나 여타 영화 자문은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쫑났다. 찍고 편집하는 동시에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장면을 고쳐 쓰는 바쁜 상황이다. 마블 영화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모른다. 내가 그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서 12달러를 지불하는 모습. 그 정도가 보인다. (웃음)
-<어벤져스>를 촬영한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에 비해 이곳 런던이 나은가.
=“낫다”는 좀 센 표현인 것 같고… 음, 사실 낫다. (좌중 폭소) 런던은 어디와 비교해도 뛰어나다. 지금까지 내 커리어는 조건에 맞춰가는 타협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스토리는 전달됐으니, 다음 작품을 하자”는 식으로 진행돼왔다. 그런데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영국을 포함한 4개국 로케이션의 고유한 깊이와 질감을 가진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촬영감독, 미술감독 다들 만족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계속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을 때까지는 안 떠날래” 하는 욕심이 고개를 든다. 지금껏 제작비와 기간 엄수가 내 자랑이었건만, “멋지다! 그런데 더 끝내주면 어떨까?” 싶다.
-1편과 2편 사이에 얼마의 극중 시차가 있나.
=그야 1편의 끝부터 시간이 흐른 만큼이다. 물론 마블식 시간으로. 코믹스에는 정해진 시간 개념이 없다. 예전에 내가 코믹스 <엑스맨>(<Astonishing X-men>을 말한다.-편집자)의 스토리 작가로서 콜로서스를 재등장시켰을 때 다들 “쟤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됐더라?” 헷갈려했다. 우린 절대 ‘몇년’이라고 명시 안 한다. 피터 파커가 대학을 몇년 다녔겠나? (웃음)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등에는 “사람은 힘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자유로부터의 자유” 같은 주장이 자꾸 등장한다. 마블 유니버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관계 있을까.
=세계를 창조하는 규모의 영화를 만들다보면 불가피하게 파시즘적 의견이 대두된다. 아이코노그래피를 다루는 코믹스도 마찬가지다. 톰 히들스턴 같은 배우는 로키나 코리올라누스(히들스턴이 주연한 연극의 인물) 같은 역을 통해 파시스트적 철학에 설득력을 불어넣는데 급기야 섹시하기까지 하다. (웃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매력을 가진 배우들이 표현하는 슈퍼히어로와 아이콘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이런 자문과 마주친다. 우리에겐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힘이 있고 지도해줄 힘을 희구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냥 우리가 나머지 인류에 뭘 할지 명령하는 게 옳지 않을까? 파시즘으로 통하는 안온한 토닥거림에 끌리는 본능이다.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런 생각을 반박함으로써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 인간성 최악의 측면을 수용하는 셈이며 그럼에도 그것들이 인간성을 질식시키는 완전무결한 질서보다는 낫다고 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