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윤여정] 여자라는 운명
2015-04-06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장수상회> 윤여정

무슨 늦바람이 불어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까. 윤여정이 연기한 금님은 앞집 남자 성칠에게 우렁각시 같은 여자다. 성칠 집에 몰래 들어가 밥반찬을 해놓고 나오는가 하면, 그런 자신을 도둑으로 몬 성칠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밥이나 사라고 말하는 그다. 이름만큼이나 심성이 곱디고운 여자 금님은 최근 윤여정이 연기했던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무척 낯설다. 돈으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백금옥(<돈의 맛>(2012))을 비롯해 잘난 구석 없는 삼남매를 사랑으로 보듬었던 엄마(<고령화가족>(2013)), 게스트하우스 여주인 구옥(<자유의 언덕>(2014))은 소녀 같은 금님과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윤여정이 <장수상회>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오글거렸”던 것도 그래서다. “젊었을 때 남자를 배신하는 역할을 많이 연기했는데 남자를 쫓아다니는 역할을 하려니…. (웃음)”

말은 그렇게 해도 윤여정은 “금님이 좋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좋게 말하면 강렬한 역할을, 나쁘게 말하면 그로테스크한 역할을 맡았”고, “최근에도 사랑에 빠지는 여자를 연기한 적이 없”기에 변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얼굴에 점 하나 찍는다고, 새 안경을 쓴다고 변신하는 게 아니잖나. 내 안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장수상회> 시나리오가 오글거렸던 것도 그간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그랬던 것 같다.” 무엇보다 출연을 결심하게 된 건 반전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아끼며 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아름답겠다” 싶었다. 하지만 당시 윤여정은 드라마 <참 좋은 시절>(2014) 촬영 때문에 출연을 거절했다. 강제규 감독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 “결국 하기로 했다. 내 거였나 봐. 살아오면서 배운 게 있다. 내 것이 아닌 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오지 않는다. 반대로 내 것은 반드시 내게 온다.” 금님은 윤여정의 것이었고, 그것이 운명이었다.

물론 금님이라는 옷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최근의 역할과 달리 파트너 박근형과 함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주인공이었던 까닭에 책임감을 짊어진 양 어깨가 무거웠다. “상업영화라 젊은 관객이 우리 나이대의 사랑을 받아들일까 걱정은 했다. 티켓파워를 가진 배우도 아닌데 민폐를 끼칠까봐…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도 그 책임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강제규 감독의 배려와 박근형의 조력 덕분에 윤여정은 어렵지 않게 금님을 만들어갔다. “캐릭터를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시나리오를 쭉 읽으면서 외모나 헤어스타일 같은 인물의 거죽을 떠올린다. 거죽을 떠올리고 나면 내면이 눈에 보인다. 인물의 내면은 시나리오에 다 나와 있다.”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을 통해 윤여정의 “못된 내면을 끄집어낸 것”처럼 강제규 감독은 <장수상회>를 통해 그의 곱고, 참한 내면을 끄집어냈다. 임상수, 홍상수 감독과 주로 작업하던 그에게 강제규 감독과의 작업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엔 놀랐다. 테이크를 한번 만에 가니까. 더 많은 테이크를 가봐야 늙은 내게 빼먹을 게 없다 싶어 한번 만에 오케이를 하는 건가 해서 촬영 초반에는 걱정도 많이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 감독님은 리허설을 철저하게 하고, 한번에 테이크를 가는 스타일이었다. 그와 함께 편하게 작업했는데 다음 작품을 어떻게 찍나 싶다. (웃음)”

알려진 대로 그의 차기작은 <계춘할망>(감독 창감독). 어릴 적 사고로 잃어버린 손녀딸 혜지(김고은)가 13년 만에 극적으로 할머니(윤여정) 품으로 돌아와 성장하는 이야기다. “사실 그것도 안 하려고 했다. 한용운 시인의 호가 만해인 것처럼 나는 ‘안해’ 윤여정이다. (웃음) 나이가 들면 귀찮은 걸 싫어하게 돼서 고집이나 아집이 많아진다. 지방 촬영이라 불편할 것 같았고, 캐릭터가 해녀 출신이라 준비할 게 얼마나 많겠나. 그래서 거절하려고 까다로운 요청을 했는데 그걸 다 들어주니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무리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도 출연하게 됐으니 <계춘할망> 역시 윤여정의 운명이다. “그런가보다. 해야지. 어쩌겠나.”

스타일리스트 김성일, 서정화·헤어 강성아·메이크업 이수민(씰헤어드레싱)·의상협찬 르베이지, NO.21 by 수퍼노말, 까르띠에, 마시모두띠, 퍼블리카, 몬드, 엔조안지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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